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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꽤 알려진 문화비평서 입니다. 전문적인 공부를 한 이가 서브컬쳐에 대해 쓴 입문서 가운데는 가장 이름이 알려진 것 중 하나라 하겠지요. 책의 내용은 제목에서 이미 드러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은 인간의 동물화 라는 것이지요. 좀더 내용에 연관되게 말하면 일본 서브컬쳐 문화는 동물화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겪고 있다고 분석하는 책입니다.
동물화란 꽤 묘한 표현인데, 이는 코제브를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지난 세기 철학로 앞으로 인류의 생활양식을 미국적인 소비생화과 일본적 스노비즘으로 나뉠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 평가는 과거 일본이 잘 나갈 때 일본 사람들이 자국문화에 대해 자위할때 써먹곤 하던 것입니다. 여기서 동물화가 바로 미국적인 것입니다. 물론 코제브는 미국적인 문화방식을 높게 치지 않고 일본적인 것을 높게 켰지만 그러한 가치판단은 어디가지나 그의 것이고, 사실 동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양자중 어느 것이 더 좋은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판정할 수 없습니다.
한데 그러면 동물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의 질투를 기대하지 않는 생활 양식입니다. 이것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는다고 다소 어렵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적 스노비즘은 반대로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는 생활양식이라고 매우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좀더 간단히 말하면 체면을 차리는 삶과, 체면을 무시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왜 미국적인 것이 동물화인가. 코제브는 인간이 인간이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타인의 질투를 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확히 말하면 헤겔의 의견입니다. 동물은 욕구가 있지만 그것은 생리적인 것으로 다른 동물의 존재에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 않지만, 인간만은 결코 그런 욕구에서 그치지 않고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욕망은 바로 타자에 대한 욕망, 다른 이들이 나를 원하고 인정하고, 그래서 질투하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미국적인 생활양식은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상품에 대한 소비를 통해 자기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소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문화마저 그러했지요.
코제브 이런 평가는 당시에는 '문화상품'이란 낮설었고 경멸적이기가지 했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이런 먼저 설명이 필요한 이유는 이 책이 분석하는 일본 서브컬쳐 문화의 포스트모던화가 바로 이러한 원리에서 '타인'을 원하지 않는 것이 되어 가고 있다고 저자가 진단하기 때문입니다. 오덕 문화의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라는 것이 인간적이기 보다는 동물적인 행위에 가깝다는 거죠. 내 취향은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사적인 것이라는 주장과 그것이 광범위하게 인정되는 문화란 사실 저런 구도 속에서는 인간적이기 보다 동물적인게 맞습니다. 그것은 반성적이기보다 즉각즉각 문화적인 허기를 해소하는 것이니까요. 즉 체면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갑니다. 배고프니까 밥을 그냥 게걸스레 먹듯 좋아하니까 문화상품을 소비합니다.
그러한 동물적인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일본 서브컬쳐의 캐릭터성에 대한 집착입니다. 꽤 오래 전 부터 일본 서브컬쳐에서는 이야기가 아니라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왔고, 그 캐릭터 또한 단순히 캐릭터가 아니라 모에라는 표현을 통해 통칠되는 무수한 속성의 집합체 같은 것이 되어 왔습니다. 성격에서 츤데레, 용모에서 포니테일, 말투에서 간사이벤, 연령에서 고등학생.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이 문화의 소비층은 그러런 캐릭터의 여러 속성을 보고 그 가운데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취득해 소비합니다. 그 결과 이야기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캐릭터를 소비하는 행위는 굉장히 흔해졋고, 실제 이야기는 실패했는데 캐릭터 덕분에 성공하는 작품도 흔히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캐릭터의 소비형태는 그 캐릭터가 서 있는 복잡한 세계나 플롯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고 그 캐릭터 자체만을 즉각적으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동물적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굉장히 문화를 파편적으로 즐긴다는 것이고 파편화된 문화를 즐긴다는 건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는 듯이, 타인의 시선에 대한 고려 없이 오직 자신의 취향에만 철저하게 충실한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경향 자체는 분명 포스트모더니즘이라에 포함될 수 있는 성격이 뚜렷하게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오덕 문화는 포스트모던화를 거치고 있으며, 그것을 동물화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아즈마 히로키의 분석은 그의 스승이 가라타니 고진이라는데도 아마 적지 않지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의 근대문학론을 통해 근대문학이란 근대를 만드는데 강력한 힘을 발휘한 이념적 생산물이었다 주장하고, 그런 힘을 이제 문학이 가질 수 없게 되었기에 근대문학은 끝났다고, 그 유명한 근대문학의 종언을 주장한 사람이니까요.
그의 영향권 아래 잇는 저자가 끝장난 근대문학의 이후 이어진 라이트노벨을 비롯한 서브컬쳐에서의 많은 '이야기'들이 극단적인 파편화를 통해 소비되고 있다는 점을 보면서 서브컬쳐문화에 대해 동물화하고 있다는 분석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제 이야기들은 어려움을 견뎌가면서 다 읽고 그 위에서 즐겨야 한다는 권위를 잃었고, 그래서 소비자들은 마음대로 해체하고 거기서 자기 취향에 맞는 기호를 발견해내 거기에만 집중해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이건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흐름이죠.
그러나 이 책에는 또한 단점이 있는데 일단 오덕 문화에 대해 좀 이해도가 깊은 사람이 보면 정보의 정확도 같은 것에 짜증낼만한 것이 많기도 하고,(읽은지 오래 돼서 기억은 잘 안남) 또 무엇보다 동물화라고 하는 그의 분석 자체가 구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대의 서브컬쳐 소비 방식은 확실히 파편적이고, 즉각적입니다. 그것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지요. 이야기의 힘으로 성공하는 작품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이 문화의 소비층이 그렇게까지 동물화 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비자들은 각자의 그런 취향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확실하게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 싸우고, 찬양하는 등, 과거 문화소비자들이 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는 짓을 보면 더 심해진 측면도 있습니다.
다만 취향이 자기의 욕구에 철저하게 편중되어 있고, 타인과 교류하는 것은 대체로 익명을 통해서라 타인에 대해 과거에 비해 훨씬 덜 신경을 쓰는 이들이 서브컬쳐 문화의 주료가 되었다는 면에서는 이 글에서 주장하는 바가 생각해볼 바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서브컬쳐 문화가 이렇게 동물화 했는가에 대해 설명해 봐야 하겠지만 아쉽게도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냥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걸작이라면서 에로게나 열심히 찬양할뿐.(...) 뭐 이 부분에 관해서는 달리 많은 책이 있으니 굳이 아쉬워 할 필요는 없겠지요. 일본 서브컬쳐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일독할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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