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바리안
작가 : 성상현
출판사 : 파피루스(였던듯)
성상현 작가의 바바리안을 처음 사권까지 읽었을 때, 나는 이 소설이 완전한 오락소설이라 생각했다.
여섯 권 나온 무협소설과 겨우 두 권 나온 라이트노벨이 잠정적으로 연중되었던 타이밍에 나왔던 신작이 하필이면 최근(물론 그 당시의 최근) 유행하던 몬스터 레이드 계통의 현대판타지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었다.
작품 내용도 지금까지의 성상현 작가의 스타일보다 유쾌한게 뭐랄까, 독자의 말초 신경을 좀 더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천년무제 초중반부도 비슷한 느낌이었던거 같긴 한데, 이건 작품 배경도 현대이고 무엇보다도 최근의 트렌드인 '갑질'에 무게를 둔 것 같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성상현 작가가 유행에 맞춰서 보다 독자친화적으로 신작을 낸 것이라 생각했다. 하긴, 전작이었던 낙오무사가 너무 암울하고 무겁고 머리쓰는 내용이긴 했다. 그런만큼 신작은 보다 가볍게 별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을 낸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완전한 오산이었다.
초고도의 과학문명을 이룩했으나 갑작스레 침공해온 몬스터에 의해 어이없게 멸망당한 28세기의 지구. 최후의 생존자 메이슨은 차원문을 통해 다른 세계로 도망치지만, 그 곳은 다름아닌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21세기의 평행세계. 28세기 문명을 살아가던 메이슨에게는 원시시대나 다름없는 이 곳에서 메이슨은 다시 한 번 몬스터를 상대로 인류의 운명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
작가의 전작, 천년무제를 읽은 사람에게 '비교할 강자가 없는 먼치킨 주인공이 자신이 살던 사회와 다른 시간대로 이동하여 무쌍을 펼친다'는 설정은 꽤 익숙할 것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간 게 아니라 미래에서 과거로 왔다는 점만 빼면 바바리안과 천년무제의 설정은 상당히 닮은 점이 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바바리안은 천년무제의 현대판타지형 변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말은 다르다.
처음에는 유쾌하고 가볍게 시작하는듯 보였던 바바리안의 전개는 중후반부로 접어들수록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해, 급기야는 지금까지 읽어본 성상현 작가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무겁고 절망적인 엔딩을 보여준다. 작가의 후일담에서 언급된 낙향무사 진엔딩 정도가 그나마 여기에 따라갈까. 사실 그조차도 여기에 못미치는 감이 있다.
이렇게 암울한 전개를 통해 작가가 그려내는 것은 다름아닌 헬조선, 더 없는 헬조선 사회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메이슨과 대립하는 대상은 몬스터가 아니다. 물론 몬스터는 메이슨이 살아가던 28세기를 파괴한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 수 있으며, 매 챕터마다 강력한 보스급 몬스터가 꼭 하나씩은 튀어나오면서 끊임없이 이야기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메이슨과 대립하는 주 대상은 몬스터가 아니다. 단순히 증오해 마지않는 원수, 끊임없는 투쟁의 대상은 오히려 흔들림 없이 굳건하기에 메이슨의 마인드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메이슨과 끊임없이 부딛히는 것은 오히려 인간 측이다.
28세기 문명을 살아가던 메이슨에게 21세기의 헬조선은 폭력과 야만성 그 자체다. 우리가 평범한듯 살아가는 자본주의 헬조선에서의 일상은 외부인의 시각을 통해 낱낱히 분해되어 파헤쳐진다. 그저 몬스터들에게서 인류를 보호하며 그저 함께 싸운다는 생각 밖에 없었던 순수한 초인 메이슨은 헬조선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립하지만, 점차 사회에 동화되어 끝내 무너지고 만다.
어떤 면에서 바바리안은 천년무제의 대극점이기도 하고, 최근 트렌드로서'갑질물'에 대한 안티테제를 보여주기도 한다. 끊임없이 갑을 추구하며 개인의 성공신화에 집착하는 갑질물 현대판타지의 극한은 결국 인간성이 매몰되어 일그러진 마왕으로 귀결된다.
바바리안은 무척 재밌는 소설이고 그 어두운 결말 또한 독자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완벽한 소설은 아니다. 초반과 후반의 분위기가 너무 차이나고, 이야기에 매번 긴장감을 넣느라 무리한 전개도 있다. 분명 떡밥은 던졌는데 다룰 틈이 없어 잊혀진 등장인물과 소재도 많다.
거기다 출판본/E북에는 에필로그가 빠져있어서 문피아에서 쌩돈 100원을 날려가면서 따로 에필로그를 찾아 읽어야 했다. 이건 편집의 문제라 할 것이다. 사실 이 감상글을 쓰는 도중에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감상글의 내용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반성해라 편집.
그러나 분명 작가는 바바리안을 통해 지금까지 그가 써온 무협소설과는 다른 시도를 보여줬고, 충분한 성과를 거뒀다.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이제 낙오무사라던가 소환학원의 암살자라던가 연중해버린 작품을 써주면 좋겠지만 그건 깨몽인거 같고 정답은 3... 아니 다음 신작은 과연 어떤 느낌일지 기대가 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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