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짝퉁의 전설
작가 : 몽계
출판사 : 문피아 연재중
간혹 글을 읽다 보면 글의 줄거리 자체와는 관계없는 이슈가 쟁점이 될 때도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이 갖는 편향성이라던지, 한비야의 여행기가 갖는 부정적 영향 같은 거 말이죠.
이번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짝퉁의 전설은 각종 명품을 베껴 모조품을 만들어내던 기술자의 이야기입니다. 어찌어찌하다가 과거로 돌아가고, 자신이 알고 있던 명품에 대한 지식과 짝퉁 제조기술을 이용해서 독자적인 브랜드로 성공하는 그런 이야기지요. 현재 45화까지 연재된지라 뒷 이야기가 어떻게 될 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미래를 아는 먼치킨 캐릭터가 패션업계에서 성공하는 그런 줄거리가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적인 플롯은 전형적인 현대환생물과 크게 다를 것 없습니다. 흙수저들이 고생하는 요즘 세태에 무시받던 짝퉁 기술자가 크게 성공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죠. 소재가 꽤나 독특하긴 한데 큰 내용만 놓고 보면 특별히 감상을 따로 적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 연재분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시각입니다. 제대로 된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위해 뉴욕으로 간 주인공. 그런데 여기서부터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정말 뛰어난 미래의 디자이너지만 그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는 게이였다.”
“그래, 네가 유명 디자이너 아니었으면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을 거다.”
“뒤만 조심하면... 만사 오케이인 사람이네.”
“저 녀석이 만약 늦은 밤까지 나를 붙잡고 늘어지면 어떡하지? 조금 곤란했지만 여차하면 주먹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절대 철칙을 세웠다. 술과 그가 건네주는 마실 거는 손을 대지 않겠다는 거다.”
- 짝퉁의 전설, 44화 중에서
아직 뒷부분에서 어떻게 전개가 되는지 모르는 관계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의 전개로 봤을 때는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냥 주인공이 갖는 게이에 대한 공포(호모포비아)를 묘사할 뿐이죠. 이는 주인공 뿐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미국에는 멀쩡한 정신을 가진 남성 디자이너가 별로 없네. 반쯤은 게이이거나 진짜 게이가 많아.”
“참고로 전 디자이너로서의 교류는 원하지만 게이는 싫습니다.”
“만약 내가 게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이사장님 앞에서 허리 숙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짝퉁의 전설, 45화 중에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게이는 남자라면 무조건 집적거리고 보는, 여차하면 약물을 써서 데이트 강간도 서슴치 않는 정신이상자로 묘사되고 있는 거죠.
뭐, 동성애자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거야 개인의 자유니까요. 동성애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나라인 미국에서도 극단주의 교회 목사가 죽은 사람 장례식에서 대놓고 “이 사람은 게이라서 지옥갈거다”라고 말해도 개인적인 정치적 신념 발언이라고 체포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 결과 그 목사는 전국구 또라이 취급을 받긴 했지만요.
하지만 짝퉁의 전설에서 언급되는 동성애 관련 내용은 정치적 신념에 따른 발언과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합니다. 해당 주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별도의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슬쩍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끼워넣어서 오해와 증오를 낳기 때문이죠.
동성애라는 소재 자체가 희화화 되고 패러디 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종교나 정치권도 풍자당하는 마당에 동성애라고 무슨 성역마냥 보호받을 이유는 없죠. 베트게이 만화나 일렉트릭 식스의 게이바 뮤직 비디오를 보면 게이가 유머의 소재로 활용되지만 논란거리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는 사람들이 이건 농담이라는 걸 다 알거든요. 누구도 이걸 보면서 게이 복장을 한 배트맨이나 링컨 분장을 한 게이가 자신을 덥칠 거라며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짝퉁의 전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라면 동성애자에 대한 선입견을 갖기 충분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이유에서 홍석천씨가 게이들 사이에서 비난받는다는 말도 있죠. 커밍아웃하고 게이 이미지로 인기를 얻으면서 괜히 남자 출연진에게 찝적대는 캐릭터가 되는 바람에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불러일으킨다구요. 트랜스젠더로서의 하리수가 갖는 이미지와 비교해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악의적 편견과 증오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말이죠. 차라리 주인공 캐릭터가 호모포비아를 갖고 있고, 철저하게 그런 캐릭터성을 표출한다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가 될 겁니다. 연쇄살인범이나 대량학살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런 소설들은 읽다보면 독자가 어느 새 연쇄살인에 동조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주인공의 시각에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작가의 시점에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읽다보면 ‘이 주인공, 게이를 엄청 싫어하는구나’가 아니라 ‘게이는 잠재적 강간범이라 조심해야 하는 존재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거죠.
제가 볼 때는 패션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미국 패션 디자이너들의 주류인 호모섹슈얼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인식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혼자서 싫어하는 것과 “나는 게이가 싫어”라고 말하는 것과 “게이는 위험한 존재다”라고 편견을 확대재생산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소설이 사회 정의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죠.
그냥 쉽게 말하면 위에서 인용한 소설에서 동성애자를 흑인으로 바꿔보죠. 강간을 무식함이나 폭력범죄로 바꿔보구요. 좀 더 불편해지지 않나요? 여성으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여자는 남자보다 일 못한다는 전제를 깔고 말이죠. 특정 지역 (전라도나 경상도) 출신으로 바꿔서 생각한다면? 뒷통수치는 멍청도 출신이나 폭력적인 개쌍도 출신이라는 표현이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후진국일수록 동성애에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선진국일수록 동성애를 사회적으로 인정한다는 통계를 본 적 있는데, 이건 사실 동성애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 사회가 갖는 문화적 포용성과 인권에 대한 높은 관심이 반영되었을 겁니다. 그냥 해당 소설 안 보고 하차하면 되는 것을 이렇게 글까지 써내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부당한 편견이 재생산되면서 사회적 정의가 훼손된다면 뭐라도 한마디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죠. 일본에서 극우 정치인의 노망난 발언보다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가 제국주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강려크한 제로센!), 미국에서는 동양인 상대로 테러하는 갱단보다 무서운 게 한국인을 돈만 아는 박쥐같은 족속으로 묘사하는 소설입니다.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공부하면서 LGBT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관련 과목을 필수 교양으로 들었던 입장에서 답답한 마음에 몇 글자 적어봤습니다.
Comment '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