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0-1. 내가 이렇게 감상을 남기듯, 소통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지 싶다. 누군가는 이 명제를 부정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부정 역시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나. 그러니 어물쩍 넘어가 보자. 아무튼, 때문에 이야기의 전승은 오래도록 이어져왔고, 이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형태 중 하나로 서사시가 존재한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이야기의 즐거움과 시적 기품을 동시에 갖춘 것이 서사시라 하는데, 널리 알려진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가장 대표적인 서사시, 그 중에서도 영웅서사시라 한다.
0-2. 하지만, 동일 카테고리인 영웅서사로 함께 분류되더라도 ‘길가메시’와 ‘오디세이아’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두 서사시에서 주인공들은 수많은 역경을 힘으로, 힘이 모자랄 땐 기지로 해쳐나간다. 허나 길가메시와 페르세우스가 여정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풍경은 황량한 폐허과 지상의 낙원보다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한쪽은 온갖 역경과 고초 뒤에 비로소 원하던 바를 이루게 되었다는 희열을, 또 한쪽은 그 희열이 사실은 덧없음에 불과하다는 좌절을 노래한다.
1. ‘오디세이아’의 변주로써 ‘은빛 트릴로지’
1-1. 평작을 모방하면 표절이 되고, 고전을 모방하면 수작이 된다. 이 구문처럼 카이첼은 길가메시 서사시를 차용해 ‘희망을 위한 찬가’를 구성한다. 은결을 중심으로 글을 읽노라면 길가메시보단 작중에 비중있게 언급되는 카프카의 ‘변신’에 가깝지 않나 싶지만, 사실 ‘희망찬’의 주제의식은 은결이 아닌 수행을 중심으로 읽었을 때 더욱 잘 드러난다. 그의 관점에서 글을 읽노라면 ‘희망찬’이 ‘갈가메시’의 변주라는 점을 명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감상을 쓰는 ‘은빛 트릴로지’가 바로 ‘오디세이아’의 변주로 쓰인 작품이다.
1-2. 트릴로지의 시작은 ‘잃어버린 이름’이다. 여기서 이름이란 단순히 기억이나 과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구성하는 정체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때문에 이름을 잃은 위버의 여정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타케 섬)을 향해 나아가는 오디세우스의 일대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이 은빛 트릴로지의 내러티브를 거칠게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주인공이 온전하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질문 하나를 던지게 된다. 주인공이 돌아가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란 어떤 자신인가. 즉, ‘당신은 누구인가.’
1-3.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맞아 주인공은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자신의 이름, ‘위버’라 답할 밖에야. 하지만 이 대답의 의미는 알다시피 ‘위버’스런, 즉 우스꽝스런 답밖에 될 수 없다. 이름은 그 자체로 전부이지만, 설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른 답은 자신을 투영하는 세상을 비추고, 그곳에서 어떤 행위를 하는가를 증명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해진다. 그것이 2부작, ‘은빛 어비스’의 작업이다. ‘근대성’의 이상적인 구현으로서 ‘어비스’가 존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위버는 ‘자유’한다.
2. 자유의 가능성과 자유의 주체
2-1.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또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자유란 외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때문에 이 개념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연상시킨다. 나의 의지와 타인의 의지가 부딪히는 지점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가 욕망의 이명(異名)임은 이 지점에서 증명된다. 욕망이란 강자의 욕망이고 의지일 수밖에 없다는 대공들의 발언은, 그러므로 타당하다. 이 논리 선상에서 위버는 대공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강자였기 때문이다. 강자의 욕망은 그 방향과 무관하게, 당연하다.
2-2. 서구의 헤브라이즘적 사고에서 선한 것은 언제나 선하고, 악한 것은 언제나 악하다. 즉 항상성이 사고의 기저에 존재한다. 이것은 은빛 트릴로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심지어 욕망의 크기로 존재의 의의가 결정되는 악마에까지 마찬가지이다. 대공은 대공의 씨앗에서, 데우는 미케알라에서 시작된다. 즉, 약자는 처음부터 약자이고, 강자는 처음부터 강자로 자리한다. 이는 태생부터 계급을 지닌 인간은 물론 고등 생물인 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기에 자유의 가능성은, 그 주체는 그저 강자에만 적용되는 이상론에 불과하다.
2-3. 논리 하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패배적이다. 욕망하고 자유할 수 있는 존재만이 진정한 의미의 주체라면, ‘은빛’의 세계에서건 현실에서건 한줌도 되지 않는 수의 인간만이 주체로 존재할 따름일 것이다. 또한 위버 역시 뒤파루스와의 설전에서 이러한 논리를 수긍한다. 그럼, 우리는 패배를 긍정하고 본 논의를 마무리지어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존재가 바로 3부, ‘세개의 권좌’의 숨겨진 주인공, 혹은 진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투리에’이다.
3. 충동과 허무의 변증법
3-1. 3부에서 위버의 활약 무대는 이미 예견한 바와 같이 극도로 한정적이다. 세계의 패권을 쥐고 흔드는 초월자의 반열에 들어선 위버가 사건의 표면에 등장하는 자체가 이미 내러티브적 차원에서 넌센스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설은 조연들의 성장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2부까지 작품의 감초역을 맡았던 투리에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투리에의 성장은 조연의 성장이란 의미를 넘어 작품의 주제의식이란 차원에서 심원한 중요성을 지닌다.
3-2. 오로지 투리에만이 잠재성이 아닌 가능성을 현현시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투리에를 제외한 모든 주, 조연급 인물들은 이미 내재된 잠재성을 발현시키는 타고난 ‘강자’들이다. 이를테면 이미 보석의 원석에 그저 세공과정만을 거칠 뿐이다. 그러나 투리에는 다르다. 그는 ‘약자’이고, 탄소이다. 그것이 열과 압력의 작용으로 흑연이 될지, 다이아몬드가 될지는 가능성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헤아리기 힘든 노력과 우연을 가장한 기적들에 힘입어 기어코 다이아몬드로 변이해낸다. 즉, 약자가 강자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산 증인인 셈이다.
3-3.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노력을 요하는가. 그것은 충동과 허무의 변증법을 필요로 한다. 일정 이상의 수준에 달한 투리에는 마치 불가의 가르침을 연상케 하는 삶의 무상함, 즉 허무를 통감한다. 그리고 넘어설 수 없는 벽을 기어코 넘어서고자 할 때에 본능의 극단이라 할 수 있는 충동의 영역에서 들어선다. 그는 이 허무와 충동을 무수히 오가며 그것들의 경계, 그러니 자유, 혹은 욕망을 끊임없이 자신의 원동력으로 삼음으로써 어느 순간엔가 쥘 수 없어 보이는 황홀한 반짝임을 손에 쥐고야 마는 것이다.
4. 미완의 자유로 ‘은빛 트릴로지’, 그리고 그 이후
4-1. 물론 은빛 트릴로지는 투리에의 성취가 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수긍한다. 하지만 위버는 그러한 가능성을 ‘믿음’으로써 어쩌면 방종으로 끝날지도 모르는 자유를 인간의 손에 쥐어주고자 욕망한다. 이 투리에로 방증되는 가능성을 긍정, 혹은 거절하는가의 가름으로 위버는 비로소 대공과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의를 거쳐서야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위버는 답할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의미로 ‘자유, 혹은 욕망하는 인간’이라고. 설혹 그 끝이 패배의 길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4-2. 카이첼이 풀어낸 ‘오디세이아’, 자기 자신으로의 여정은 이렇게 끝이 난다. 자유하는 인간임을 선언함으로써. 허나 다시 한 번 명확히 해야 하리라. 20년간의 고초 끝에 이타케 섬으로 귀환한 오디세우스가 정적들을 숙청하고서 페넬로페를 되찾은 뒤, 행복한 삶 살았다는 후일담과는 달리, 은빛에서 선언한 자유는 가능성의 증명으로 끝났기에 기실은 미완의 자유로 끝난 이야기임을, 우리는 수긍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미완의 자유가 어떻게 종결되는가를 살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가능성을 넘어선 지점에 우리가 서 있으므로.
4-3. 근대 이후의, 자유를 손에 넣은 인간이 어떻게 패배로 스며들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고, ‘희망을 위한 찬가’의 문제제기이기도 하며, 나아가 인류 최초의 서사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삶의 끝이 죽음이라면, 자유의 종착지가 패배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기 위해 카이첼은 ‘희망을 위한 찬가’를 썼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한다. 희망하지 않음으로 절망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저 한발씩 나아갈 뿐이라고. 이렇게 그의 거대서사는 마무리 된다.
5. 정리하며
5-1. 도입부에 언뜻 본문과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희망을 위한 찬가’를 굳이 언급한 이유는 시작과 끝에 그것을 가볍게라도 짚어봄으로 ‘은빛’에서 ‘희망찬’으로 이어지는 카이첼 식의 거대서사를 일관성 있게 구성해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논리적으로 ‘오디세이아’를, ‘길가메시 서사시’를 표방함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재구성 된 그것들의 주제의식은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올바로 독해하고, 본문에서 논리정현하게 풀어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의 몫으로 돌아가리라.
5-2. 쉬지 않고 달려온 카이첼의 거대서사는 이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씩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나 또한 감상을 남겨왔다. 그리고 이것이 그 마지막이라 하니 기분이 참으로 묘하다 할까. 글의 도입에서 소통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때문에 이 글을 작성한 나의 욕망 역시 또한 읽는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상이기를 바란다. 꽤 한동안 이곳에 남길 마지막 감상일텐데, 당신이 즐겁게 읽었다면 졸문에 마침표를 찍은 나에게도 하나의 즐거움이 되리라. 부디 그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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