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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금검경혼

작성자
Lv.32 착정검주
작성
02.10.04 23:04
조회
3,326

옛날 옛적에, 동네 만화가게의 어느 한 구석에 먼지를 먹은 채로 숨어있던, 이미 읽을대로 읽어서 귀퉁이들이 달아버린 무협소설 한 질을 발견했다. 책 제목은 바로 '금검경혼'!

  처음에는 문체의 신선함과 깔끔함으로, 다음에는 내용의 숨막히는 긴박감과 박진감으로, 그리고는 그 복잡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전개와 귀결로 인해 나는 책을 읽다가 다시 표제에 적힌 작가 이름을 눈 여겨보고, 읽다가 다시 작가에게 찬탄하면서, 한 명의 작가 이름을 인상깊게 기억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금강'이다.

  그 이후로 금강의 팬이 되었고, 그의 작품들을 두루 찾아 읽고, 신간을 기다리고, 신간이 없으면 다시 읽었던 작품들을 세 번, 네 번, 다시 읽곤 했지만, 아무래도 한 작가를 처음으로 발견했던 그 신선하던 시절의 추억이 유난히 강렬한 것은 '처음'이라는 특별한 시간의 특권 때문일 것이다.

  금검경혼, 경동천하, 뇌정경혼, 독비경혼 등 초창기 금강 작품들이 주던 호쾌한 격동을 잊지 못하던 차에 90년대 중반(94년)에 서울창작을 통해 재간된 옛 작품들을 서점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이제 금검경혼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감상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한다.

  모든 소설에는 주인공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에 대한 독자의 감정이입은 그 작품에 대해 개인적인 애정을 갖기 위한 조건이 된다. 금검경혼의 주인공은 황보영이다. 그렇다면 황보영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황보영의 인물됨을 소개하는 것이 바로 제1장의 제목, 즉 '왕옥산의 젊은 은자'이다. 산 속에 사는 은자라면 어느 정도 세상사에 대해 초연한 청담사상의 소유자일 것 같다. 더구나 그 은자가 뜻밖에도 혈기왕성한 나이의 젊은 청년이라면, 그런 사람은 현세에 보기드문 인물, 아마도 제갈량 스타일의 인물일 것은 틀림없다.

  소요수사 공량과 한운수 고구는 무림의 안정을 위협하는 신비세력의 존재를 감지하고는 도움을 요청키 위해 왕옥산 광명곡을 찾아든다. 그 뒤를 미행하던 신비세력의 급습, 그리고 운무 자욱한 광명곡의 기진이 걷히고, 때마침 단실에서 연단을 마무리짓는 무명옷 차림의 소탈한 소년, 그가 바로 황보영이다.

  금강류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한 가지 기질은 바로 개인적인 은자적 성향과 사회적인 책임감 사이의 갈등이다.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내면을 관조하는 은일을 도모하고자 하나 세상사의 긴박함은 일신의 안일을 허락하지 않으니, 차마 생명을 원한다면 이 한 목숨마저 바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보 후퇴와 이보 전진 사이의 내적 갈등이 금강 특유의 박자감각을 이루며 그 강약과 중강약이 바로 중원무림에 풍운을 불러오는 태풍의 발원지가 된다.

  제2장의 제목은 강호출도이다. 은자의 강호출도란 그 자체로 어긋남과 비틀림을 보여준다. 황보영이 나름대로 차분하게 설계하고 준비한 인생길이 뒤틀린 것이다. 선천적인 고질병으로 인해 무공이 증가할수록 수명이 단축되자 의학에 매진했던 것인데, 이제 무림의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5년을 한정하고 강호에 출도한다. 그러나 만사가 계획대로 돌아갈 지는 과연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출도하자마자 황보영은 삼재교의 실상을 탐지하는 한편, 소요수사의 동료들과 사보의 사면천왕을 포섭해서 훗날의 반전을 위한 세력기반을 형성한다.

  황보영이 활약하게 되는 첫 번째 무대는 무림삼보 중 하나로 꼽히는 화운옥소 쟁탈전이다. 여기에서 그는 귀곡선자와 묘한 인연을 맺게 된다. 달의 정기를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흡수해야 하는 태백신강을 연마하던 귀곡선자의 오묘한 모습을 훔쳐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친 황보영! 냅다 꽁무니를 빼지만 이미 꼬랑지를 내린 상태다.

  절세의 무공으로 신마대를 괴멸시킨 황보영. 그러나 화운옥소로 군협들을 도살한 신녀대 유난향과의 격돌. 여기서 세가 불리하자 황보영은 본의아니게(?) 무림초유의 치한신공을 발휘한다. 가슴에 시선을 집중해서 상대를 흥분시킨 뒤에 한 대 맞고 냅다 도망친 것.

  소녀대를 이끄는 인재교주를 개방방주 사정악과 협공하지만, 결국 양패구상 당하고는 유난향 덕분에 생명을 건진다. 치한신공이 오히려 방심을 흔들었으니 황보영으로서는 귀신에게 홀린 듯하다. 생사를 함께한 사정악과 형제지의를 맺고는 다시 무산 연혼당을 붕괴시키고, 옛 마교의 두 지류인 삼재교와 철혈문이 서로 싸우게 유도하여 삼각분립으로 드디어 한 숨 돌릴 겨를을 마련한다.

  무림재패를 꿈꾸던 선기도주 냉여빙과 황보영이 지재교주의 촘촘한 그물망을 뚫고 가까스로 벗어나는 장면은 무협팬들로서는 놓쳐서는 안되는 명장면 중의 하나이다. 위기의 순간에 황보영을 구하는 것은 귀곡선자 모녀. 여기서 황보영과 귀곡선자 손지혜는 그만 눈으로 통하고 마음으로 말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이때부터 황보영과 손지혜는 마음을 허락한 사이로 함께 강호활동에 나서고, 삼재교의 유난향은 황보영을 보호하다가 절벽에서 추락한다. 소림과 무당은 철혈교와 삼재교에게 유린당하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무림 정세 속에서 황보영은 생모에게 맞아 죽는다.

  그 뒤의 엄청난 반전과 역반전은 아마도 무협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지만, 줄거리 설명은 이쯤 략하기로 한다.

  금검경혼에서 전대의 젊은 영웅들이자 한 쌍의 절친한 친우였던 절대쌍소와 그들의 부인들은 바로 당금 강호의 세력판도를 구획하는 결정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의 애정관계와 사승관계, 세력구도와 정마지간의 대결상이 다음 세대에 와서 마와 협이 뒤바뀐 관계로 뒤틀린 채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절대쌍소의 고사 자체가 한 편의 소설을 구성할 수 있는 유형의 것이므로, 이렇게 복잡한 고사들은 중간중간에 쉬어가는 지점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는 편안한 마음으로 여러 화자들을 통해 드문드문 흘려주었어야 유장한 맛을 더할 수 있을 것인데, 아마도 지면의 한계로 인해 너무 급박하게 당사자들의 직접 대화를 통해 발설되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또한 금강님이 직접 지면의 한계로 인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황보영과 손지혜가 여기저기 풍류 가득한 명승지에서 청춘을 즐기고 애정의 희비를 교류하는 연애 사화도 전무한 것이 안타까운 점이다. 손지혜나 유난향의 개성있는 품격을 맛보고 인상깊은 애틋한 사연을 기대하던 독자들에게는 무척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금검경혼은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는 속도에 점점 가속도가 붙듯이 결전들이 급박하게 이어지는 숨막히는 작품으로서 무협소설 중의 대단한 걸작이며, 만일 지면이 충분해서 인물의 성격들이 필설로 묘사될 뿐 아니라 또한 잊을 수 없는 장면들에 충분히 배이기도 했다면, 독자들에게 훨씬 더 큰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현재 내가 소장하고 있는 금검경혼은 증보개정본이라서 80년대에 금강이라는 작가에게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그 문제의 원본과 얼마나 다른 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권을 다 읽고는 혈압이 올라서, 즉시 다음 권을 꺼내면서 집에 갈 시간을 걱정하던 그 시절의 그 급박한 박자는 개정본 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금검경혼은 참 재미있는 작품이며, -내가 실제로 그렇게 하는데-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별로 질리지 않는 작품이다. 무협소설 중에는 아주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다. 그렇지만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 작품은 사실 아주 드물다. 금강류에 배여 있는 숨은 마공은 바로 '질리지 않음'이라는 암흑마교의 신비주술이다.

  *이 글은 한 독자의 개인적 감상일 뿐이며, 결코 객관적인 평가나 전문적인 비평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자인합니다. 저와는 다른 감상을 받은 분들의 견해도 십분 인정하며, 암튼 차이점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일독하시기를 흔쾌히 권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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