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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Comment ' 13

  • 작성자
    Lv.84 고락JS
    작성일
    20.05.03 06:47
    No. 1

    키가 컸다는 건 식습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고,

    인종적으로 일반적 동양인과 상이하게 다르다는 건 확실치 않아 보입니다. 사실 고려조에 이 동방까지 흘러들어온 그런 종족이 마땅히 떠오르지도 않고요.
    북방 유목민족설이 있는데, 북해도 원주민 정도나 위구르족이 아닌 다음에는 사실 한국인과 크게 구별되지도 않죠.

    찬성: 0 | 반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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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Lv.99 이통천
    작성일
    20.05.03 07:32
    No. 2

    고려말이라면 원의 색목인들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명을 피했지만 비단길을 지날만큼의 능력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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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Lv.52 사마택
    작성일
    20.05.03 07:51
    No. 3

    고려 시대 양수척(티타르족/ 우랄산맥 서쪽, 볼가강과 그 지류인 카마강 유역에 사는 투르크 어계(語系)의 종족) 이 넘어왔습니다.
    푸른 눈의 벽안도 심심치 않게 보였고. 조선말에 미국 공사관 소속 서기관이 백인 윌리엄 플랭크린 샘즈는 처음 조선에 도착하여 제물포 항에 도착했는데 처음으로 본 조선인 백정들이어서 조선이 미국처럼 다양한 인종의 국가라고 생각했죠. 백인이 보기에도 아시아인으로 보기에는 자기네(백인)와 비슷하다 여긴거죠.

    찬성: 1 | 반대: 1

  • 작성자
    Lv.68 고지라가
    작성일
    20.05.03 07:17
    No. 4

    소재로서 백정의 이야기는 더이상 신선하지 않은 것입니다. 조금 비틀던가, 혹은 신라에 정착한 무슬림들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할지도 모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8 대추토마토
    작성일
    20.05.03 15:16
    No. 5

    우리나라에서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유사합니다.
    거기에 더해 납세와 군역의 의무가 없고, 죽이지만 않으면 어지간한 짓은 뭐든 해도 벌금 몇 푼이면 넘어가는 계급.

    대림동, 안산에서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유사합니다.
    거기에 더해 납세와 군역의 의무가 없고, 죽이지만 않으면 어지간한 짓은 뭐든 해도 벌금 몇 푼이면 넘어가는 계급.

    대림동, 안산이 밖에서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 지를 생각하고, 그것이 나라에서 묵인하는 정도를 넘어 나서서 낙인을 찍은 정도라면,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리라 봅니다.

    남의 땅에서 뭉쳐 살아가며 제 문화를 지키는 일.
    융화되길 거부하고 자립하길 원하며 나라에 의무를 다하지 않는 무리.
    당연히 국가는 이들을 감시하고 격리해 관리하는 것이 편합니다.
    21세기에야 인권을 운운한다지만요.

    많은 사람들이 백정이라 하면 그저 천민 계급으로 도축업에 종사한다고만 아니, 사극 등지에서 그나마 동정심이라도 받는 것이지 모든 사정을 다 알고 나면 그 작은 동정심마저 가질리 없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당장에 우리나라에서 세금 안 내고 장사해서 큰돈 벌었다고 하면, 미운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거기에 더해서 남들은 온갖 착취다, 군역이다, 뭐다 해가며 캐먹을 나무 뿌리도 없었는데, 늘 고기 다루며 재물을 쌓아가는 꼴을 보고 신분적 차등에 대한 인정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거라 생각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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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Lv.49 유통기한
    작성일
    20.05.03 17:52
    No. 6

    본문에는 대추토마토님이 말씀하신 시절 이후에 정착하고 융화되어서도 천대멸시구박받았다 되어 있는데 혹시 어느 쪽이 사실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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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Lv.78 대추토마토
    작성일
    20.05.03 19:03
    No. 7

    세종의 화척의 백정화는 실패한 정책입니다.
    억지로 제도의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강제로 정착시키려 했고, 화척은 그에 반발했습니다.
    본래부터 신분적 차별과 천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착 생활을 거부하고 농본의 조선에서 소를 멋대로 도살하여 먹는 것을 금지하는 것에 반발하며, 농사지어 끼니를 연명하는 것보다야 가진 자들의 것을 강탈하는 행위를 더 쉽게 여긴 화척이 문제였습니다.

    임꺽정이라는 일개 도적놈이 후대의 미화와 당시 윤원형 등의 패악을 반증하는 재료로 대단한 위인인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백정의 박해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백정에 대한 분노와 차별이 가득했던 시기는 백정 자체가 살인과 약탈, 강도, 방화 등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잘못했다는 인식조차 없는 백정의 문제였습니다.
    후대로 흘러가 정착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시기에는 이미 전기의 백정에 대한 기록은 흩어져 찾기 어렵습니다.

    후대의 백정은 양인 신분으로서 천한 일에 종사하는 이른바 신량역천이 있었고, 당연히 천한 일이라는 인식이 있을 뿐 백정이라는 집단으로서의 천대와 차별은 크지 않았습니다.
    즉, 인종과 생김새 등의 차이로 인한 차별이 아닌, 조선시대에 천하다 생각했던 직업을 가진 이들에 대한 차별인 것이니 본문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물론 융화되지 못했던 화척의 무리 중 도적질하다 관노가 되고 죄를 짓고 역을 살다 뿔뿔이 흩어진 이들이 양인의 신분을 가지지 못하였기에 흘러흘러 백정일을 하게 된 경우가 없다 할 수는 없으나, 후대의 백정이 모두 그들이었으며 상술한 사연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사농공상이라 하여 양반 계층인 선비와 양인 계층인 농민을 제외한 나머지를 천시 여기는 풍조의 백정은 생각보다 그리 박한 대접을 받지 않았습니다.
    조선조의 법률은 사노비라 하여 마음대로 죽이는 것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피와 칼, 생명을 끊는 일을 하는 이들을 쉽게 힘으로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단순히 정육점을 떠올리는 고기를 도축하는 백정으로 한정짓는다면 이 차이는 더욱 커집니다.
    고기는 모두가 필요로하나 도살하고 도축하는 행위 자체만을 천시 여겼으니 당연히 그 행위는 돈이 됩니다.


    상여꾼을 부를 수 없고 무덤을 만들 수 없으며 혼례를 양인들과 같이 치를 수 없었다는 말은 일견 옳은 말인듯 해보이나, 백정들은 저네들끼리 모여 사는 마을을 꾸린 경우가 대다수였으며 관아와 양반, 양인이 이들을 천대한다 하여도 그 천한 일로 모은 재물로 남부러울 것 없는 행위가 가능했습니다.
    값을 치르고 사람을 구해 상여를 메고, 산을 사 지관을 써 명당을 찾지는 못할 것이나 시신을 매장하는 일 정도는 누구나 가능했으며, 혼례 또한 마을 전체의 축제 규모로까지 키우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본문이 잘못된 건 전후관계를 온통 뒤섞어버림으로써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데, 화척은 끝끝내 조선의 통치에 반발하다 임꺽정을 마지막으로 그 기록이 사라집니다.

    백정은 대개 자신들이 하는 일을 대신할 이들이 없고, 그 반면에도 자신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니, 그것 자체가 또한 권력이었고 이를 잘 이용한 자들은 양반 부럽지 않은 행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찬성: 3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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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Lv.49 유통기한
    작성일
    20.05.03 19:09
    No. 8

    열심히 써 주신 것이 아쉽지 않으시도록 꼼꼼히 읽었어요!
    정보글 정말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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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Lv.52 사마택
    작성일
    20.05.03 22:08
    No. 9

    화척을 백정으로 만든 정책은 당대에는 실패라기 보다는 시작이었죠. 세종이 왕위에 올랐을때 조선 건국이 고작 삼십녀연 밖에 안됩니다. 나라의 틀을 잡은 시기였기에 당대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처리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결과 시간이 흘러 백정들도 조선 사회 녹아내립니다. 군에 투신하는 이도 있었고, 망나니, 도축, 가죽신이나, 고리 궤작이나 죽립등을 만들어 생업을 이어갔죠. 하지만. 밑바닥 신분으로 여전히 천시를 받았고 자기들 끼리 모여 사는 것도 자기네들 정통을 지킨다기 보다는 그것은 일부로 그런게 아니라 천시를 받으니까는 스스로를 보호 하려 백정들끼리 마을을 만든 것입니다.
    돈이 대나무로 만든 초랭이 조차도 쓰지 못했습니다. 가죽신도 신을수 없고 오늘날 웨딩드레스나 턱시도 처럼 혼례때 쪽두리와 연지도 찍을 수 없었고 관모와 관복도 입을 수 없었죠. 물론 돈은 많이 벌어 일부 양인들 중에 스스로가 백정이 된 일도 있었죠.
    무슨 양반 부럽지 않은 삶입니까. 갑오개혁 이후로 반상의 법도가 사라졌지만 백정은 그 덕을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차별에 견디다 못한 백정들이 1923년 형평사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8 대추토마토
    작성일
    20.05.04 05:23
    No. 10

    세종 이후 화척이 흩어지기까지 백 년이 더 걸렸습니다.
    백 년간 살인과 그에 준하는 강력범죄의 대다수가 세종이 강제로 추진한 화척의 백정화였어요.
    실패한 건 실패한 겁니다.
    강제로 묶어두고 감시할 방책도 없이 무작정 화척을 백성으로 받아들이려 했고, 이건 사농공상 할 것 없이 다 반대한 데다가 화척의 호응도 얻지 못했습니다.

    백정끼리 마을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백정을 가두고 감시하기 위해 마을을 만든 겁니다.
    이 백정은 도축업에 종사하는 백정이 아니라 화척을 말하는 것이구요.

    관모와 관복은 당연히 관직에 나설 수 없으니 누구라도 그러한 것이고, 조선의 예법을 따르지 않으니 혼례 또한 그렇게 치르지 않습니다.
    반촌의 백정은 일개 백정 수준이 아니라 객주를 거느리고 기루를 손에 쥐며 왈패의 우두머리역을 겸하며 양반과 호형호제했습니다.


    그리고 위의 모든 내용은 비단 백정 뿐만이 아니라, 천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이었습니다.

    본래 비단은 그 색감에 따라 양반도 가려야 할 것이 있고, 가죽신이라고 말씀하시면 부당한 것이 천인이 신을 수 있는 것과 양반이 신는 것, 양인이 신는 것 모두 가죽신이라 해도 그 제작 방식과 치장에 따라 다릅니다.


    조선시대는 신분이 뚜렷한 제도 하에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이를 고려치 않고 마치 만민평등을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일제시대 이후에나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도 당연히 그 신분제가 철폐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천역은 천하게 대접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익히 아는 백정은 그럴만한 이유를 그들이 만들었던 인간 말종들이었고, 흔히 사극 등에서 접하는 고기를 도축하는 백정들은 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전형적인 필요에 의한 동정론인 것이고, 이것이 백정을 피해자로, 억업당하는 민중으로 그려내기에 적절했기 따름입니다.
    천민 중의 천민이라는 위치가 된 이유 또한 그 과정을 살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임꺽정이 백정이라 하지만 도축하는 백정이 아니라 유기를 만드는 백정이었으니, 엄밀히 후대의 분류로 따지면 백정이 아니라 공인입니다.
    이런 차이를 알지 않고 백정은 밑바닥이라 말씀하신다면 이야기가 진행될 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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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52 사마택
    작성일
    20.05.04 13:15
    No. 11

    하아. 여전히 말의 요지는 못 알아먹고 본인 하고픈 말만 하시네. 이래서 내가 님이 글이나 댓글에는 답글 안달려고 했던고요. 님이 분명 지적을 했는데 실속 없고 논지를 벗어나니 참...
    1. 세종 정책 실패 했다고 주장하셨죠. (조선 건국 초기였으니 진행 했죠. 전조(고려) 시대에 넘어온 화척들이 세종때 부터 시작해서 결국 조선 사회에 하층민으로 녹여났죠. 그 전에는 떠돌이 범죄 집단이었는데.
    2. 돈 있으니 양반 부럽지 않다고 하셨죠. (사람 대우 못 받는데 무슨 백정은 양인이 죽여도 살인에 해당 되지도 않았어요.)
    좀 본인이 아는게 전부인 것 마냥 확정 짓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제 글좀 잘 봅시다 님이 주장하는 거와 제가 말하는게 겹치죠. 단 마지막에 만민평등이 아니라 백정이 윗윗대가 화척질 한 것 때문에 당시에는 그런 대우 받아도 할 말 없지만 조선 사회에 녹아서까지 사람 대우 못 받는게 안타깝다고 했고 본분에 돈은 많이 벌었다고 말했는데. 도대체 뭔 주장을 하고 싶은건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8 대추토마토
    작성일
    20.05.04 15:20
    No. 12

    다시 한번 천천히 설명드리죠.
    세종조에 실행한 정책은 양수척에서 화척으로 이어지는 도살을 주로 업으로 삼는 유민의 무리를 무작정 양인으로 받아들이려 한 정책입니다. 위에 언급하신대로 거란의 무리라는 기록도 있고, 북방 유목민이라는 기록도 있으니 인종적 특성이 부분적으로 다르기도 했죠.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다름에 대한 이해나 명확한 대처방안 없이 호칭만 화척에서 백정으로 바꾼 시책이었고, 당연히 이에 반발한 기존의 백정(百丁)은 이름 자체를 구와 신으로 나누어 구분지으려 했습니다.
    즉, 완전히 실패한 정책이라는 겁니다.
    강제로 떠돌이생활을 끝내게끔 하고 한곳에 모여 살게 하니 오히려 관의 눈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고 저들끼리 무기를 만들고 사람을 사냥하며 산 게 초기의 백정이고, 이는 관도 쉬이 하지 못할 힘이 있었기에 살인을 저지른 자가 숨어도 쉽게 조사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이 백 년이 더 흐른 뒤까지 끊임없이 반란과 토벌, 진압의 역사가 진행되었고, 임꺽정 이후 기록이 스러집니다.

    이걸 실패라 하지 않으면, 뭐라 말할까요?
    세종조의 이야기라 너무 답을 내려놓고 끼워맞추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네요.


    그리고 백정은 양인이 죽여도 살인에 해당하지도 않는다는 말.
    대체 근거가 무엇입니까?

    초기의 백정은 말씀하신대로, 또 제가 이야기한 대로 죽을 죄를 너무도 많이 짓고 살았습니다.
    이민족이 국토를 유린하며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으며 살았으니까요.

    후기의 백정은 태반이 양민이었습니다.
    단순히 도축일을 하는 백정은 생각하시는 것처럼 엄격한 구분에 의해서 천것이라 확정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랏법은 그들을 양인으로 분류했고, 그 하는 일이 천하다는 인식을 벗지 못해 천속으로 취급한 것일 뿐 엄연히 노비보다 높은 신분이었습니다.

    초기의 화척의 백정화와 중기 이후의 백정은 엄연히 다른 개념인 것을 구태여 하나로 묶으려 하니 이런 오류가 발생하는 겁니다.
    조금 더 자료를 폭넓게 살펴보시는 건 어떨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52 사마택
    작성일
    20.05.04 18:23
    No. 13

    아니 ㅎㅎㅎ 말의 요지를 못 알아들으시네 네 님 말씀이 다 맞아요 누가 노비 보다 높은 신분인지 몰라요 그건 다연하잖아요 설탕은 달죠 그걸 모르시는것 같아 알려드리고요 ㅎㅎ 어때유 제가 그 기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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