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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Comment ' 18

  • 작성자
    Lv.56 다크월넛
    작성일
    17.11.07 18:40
    No. 1

    변화가 폭력이라면 비폭력을 위해서는 일관이 필요하군요. 하지만 자연계 어디를 보아도 바뀌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떠 있는 해는 실시간으로 폭발중이고 행성들은 회전하고 이동하며 나무는 성장하고 돌은 깎여나갑니다. '우리 사랑 변치 말자'가 결코 지켜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죠. 모든 것은 변하고, 사람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6 강림주의
    작성일
    17.11.07 20:31
    No. 2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사람의 삶에는 관성 역시 매우 강하게 있다 생각합니다. 사람이 변하는건 필연이지만 동시에 사람은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불편할지언정 점점 익숙해져서 결국 안주하고자하는 것 같다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성보다는 감성의 영역이라 생각하고, 일반적으로는 제법 성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현실이 불만스러우면서도 변화가 두려워 안주해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요? 그런 상황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와는 별개로 얼마나 낯설을까요? 가부장제는 여성을 억압하는 동시에 정해진 역할과 자리를 주었고, 그것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걸 생각도 못한채로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오히려 가부장제가 사라진다는게 더 두려울 수도 있죠. 페미니즘이 처음 뿌리 내리는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남성 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하고도 부딪혔다는걸 감안한다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11.07 19:02
    No. 3

    변화란 지금의 내가 바라지 않는것을 하는것만이 변화가 아닙니다.
    내가 바라지 않지만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더이상 하지 않는것도 변화지요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가 바란건 이게 아니였다고 생각하여 바꾸는 것도 변화입니다.
    변화는 폭력이 아닙니다.
    변화는 변화예요.
    변화에 폭력이라는 틀을 씌우려고 노력해봤자 그 틀은 맞지않습니다.
    변화가 별 모양이라면 폭력은 하트모양입니다. 둘을 끼워봤자 이리저리 삐죽삐죽 튀어나오거나 남아요.

    타협을 할 수도, 점진적으로 하려 할 수도, 최대한 마찰을 줄이려 노력할 수 있다고요?
    변화의 일부분만 바라보고 그게 변화의 전부라고 생각하시는거 아닌지요
    내가 원해서, 내가 바란것이 이게 아니였음을 깨달아서,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에 내 마음이 가는대로 변화할 수도 있습니다.

    변화에는 폭력이 필요없습니다. 변화에 폭력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것이죠

    찬성: 1 | 반대: 2

  • 답글
    작성자
    Lv.96 강림주의
    작성일
    17.11.07 20:39
    No. 4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내가 바라지 않지만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왜 지금까지 해 온 것일까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된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런 식의 말을 두를 수는 있다 생각하지만 그 핵심에는 그러지 않은 다른 삶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이 자리잡고 있다 생각합니다. 만약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이미 경험한 적 있고 그게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계속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많은 노숙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쉘터를 나와 익숙한 삶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생각하여 바꾸는 것도 변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만으로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믿지 않습니다. 잠깐의 변화는 일으킬지 몰라도, 영구적인 변화로는 이어질 수 없다 생각합니다. 저는 오직 행동을 통해 현실이, 다시 현실을 통해 경험하는 삶이 변해 그렇게 변한 경험이 장기적으로 축적되면서 인간의 두뇌를 물리적으로 변화시켜야만 영구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생각합니다.

    찬성: 0 | 반대: 1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11.07 20:53
    No. 5

    저는 변화가 폭력적인것만 있는것이 아닌 더 다양함을 알려드리기 위해 예시를 언급했으나 강림주의님은 또 특정 예시에 대해서 폭력적임을 보이고 싶어하시는군요

    왜 자꾸 특정 상황에 대한 원인이 다양함을 인정하지않고 한가지 자기가 생각하는 경우로 확정시키나요? 님 말씀대로 바라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는 삶이 낯설어서 그럴수도 있죠
    반대로 너무 익숙하기에 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억지로 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모순적인 말이지요.
    결국 행동을 한건 스스로이니까요. 누군가가 이렇게 하지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을 했다하더라도 결국 본인이 '원하는걸하고 죽는다'와 '원하는걸 하지않고 산다' 중에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볼수도 있겠죠.


    말씀하신 "만약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이미 경험한 적 있고 그게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계속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라는 부분에서 이미 강림주의님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는가 싶네요
    소수일지 몰라도 계속 하는 사람이 있다고.
    폭력적이지 않은 변화는 존재한다고 말이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6 강림주의
    작성일
    17.11.07 22:47
    No. 6

    '님 말씀대로 바라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는 삶이 낯설어서 그럴수도 있죠' 라고 말하셨는데, 제 댓글을 어떻게 읽으신건지 모르겠습니다. 관련 부분을 다시 읊자면,

    '그러지 않은 다른 삶이 낯설게 느껴진다' 였을텐데, 그와 연결되는 그 전에 한 말은,

    '내가 바라지 않지만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왜 지금까지 해 온 것일까요?' 였고 이건 님이 하신

    '내가 바라지 않지만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더이상 하지 않는것도 변화'와 연결되어있었으니, '그러지 않은 다른 삶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내가 바라지 않지만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더 이상 하지 않는 다른 삶이 낯설게 느껴진다'를 줄여 말한 것이었습니다.

    제 댓글은 님이 언급하신 예시에 대한 저의 반박시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님이 예시를 들어 제 주장을 반박하려 했고 저는 다시 그 예시를 반박하려 한 것인데, 그것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제가 이상한 일을 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으로 댓글을 시작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저의 생각에 대한 근거와 논리를 충분히 제시하지 않아서 생산적인 논쟁을 벌이기 어렵다 비판하셨다면 저는 그것이 매우 옳은 말이라 했겠지만요.

    마지막 문단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만약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이미 경험한 적 있고 그게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계속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라는 말은 님이 말씀하신

    '내가 바라지 않지만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더이상 하지 않는것도 변화' 발언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소수일지 몰라도 계속 하는 사람이 있다고. 폭력적이지 않은 변화는 존재한다고 말이죠'는 말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도 변화'라 말씀하시고 억지로 해야하는 것을 계속 하는 것도 (폭력적이지 않은) 변화라 말씀하시는건 무슨 말인지 아리송합니다.

    문맥상 '소수일지 몰라도 계속하는 사람'은 위에 '계속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라는 부분과 연결되는데, 제가 한 그 말은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도 변화'라는 님의 말에 대한 반박시도였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11.07 23:23
    No. 7

    제가 전반적으로 강림주의님 댓글을 오독한것 같습니다.
    오독한 상태로 이렇다저렇다 얘기했으니 강림주의님 입장에서 어이가 없으셨을것 같네요. 사과드립니다.

    제가 여전히 강림주의님의 댓글이 이해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지 않지만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더이상 하지 않는것도 변화'라는 말에 '만약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이미 경험한 적 있고 그게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계속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로 반박한거라 하셨는데 즉 '억지로 해야되었던 것을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사람들이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라는건데 어떻게 이게 이어지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6 강림주의
    작성일
    17.11.08 07:56
    No. 8

    제 생각을 좀 더 풀어 말하자면(소통을 그리 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무언가를 계속 억지로 하던 사람이 억지로 하던 것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 결정을 내린다면 그 사람은 그러지 않는 삶의 방식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변화 보다는 복귀라고 부르는게 더 적합하지 않을까, 이 정도였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던 사람이 기회가 생기자 원래 자신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11.07 20:21
    No. 9

    폭력이란 강제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변화는 곧 폭력이라 할 때는 전제조건이 붙습니다.
    [스스로 일어나는 변화는 없다.] 가 고정됩니다. 스스로 일어나는 변화라면 '변화는 곧 폭력'이 아니기 때문이죠.

    강제로 변화시키는 폭력을 수반하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날 수 없을 때. '변화는 곧 폭력' 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스스로 일어나는 변화' 는 일어날 수 없으므로 인간은 강제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런 조건을 기준으로 세상을 접하면 두가지 유형으로 흐르게 됩니다.

    첫째. 옳은 방향으로 폭력을 함으로써 일어나는 변화.

    둘째. 그른 방향으로 폭력을 함으로써 일어나는 변화.

    그러나 세상의 모든 악행은 이 두가지를 기치로 일어났으며, 세상의 모든 선행은 이 두가지가 아닐 때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는 곧 폭력이라 함은, 스스로 일어나지 않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을 때 폭주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일어나는 변화를 가늠하고, 그것의 기폭제로서의 폭력이 수반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6 강림주의
    작성일
    17.11.07 20:48
    No. 10

    글쎄요. 트로츠키 역시 공업화를 꿈꿨지만 스탈린은 그것을 가장 가능한 극단까지 밀어붙였습니다. 그것이 매우 폭력적인 행위였다는 것은 우크라니아 대기근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공업화를 시작한지 10년 후 나치 독일은 침공했고, 그 전쟁에서 소련은 아슬아슬하게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공업화를 폭력적으로 밀어붙여서 엄청난 성과를 보인 이후에도 소련은 패배의 목전까지 몰려 전쟁이 끝났을 때는 최소 2천만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한반도 인구가 남북한 모두 합쳐 2천5백만이었습니다.

    공업화의 성취가 애매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지는 매우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소련에 가한 이 엄청난 폭력은 악행인가요? 모릅니다. 그렇다고 이게 선행이냐면 그것도 뭐라 대답하기 어렵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을 판단하는데 있어 선악은 매우 작위적인 기준 같다는 부분일 것입니다.

    찬성: 0 | 반대: 1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11.07 21:07
    No. 11

    히틀러의 나찌는 유태인을 학살할 때. 그것이 옳으므로 폭력을 행사하여 독일을 변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유태인이 독일에 해악이 있으니 없애는 수단. 이것이 곧 강제적인 폭력을 함으로써 옳은 방향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위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지금 글작성자님께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매우 폭력적인 행위였다는 것은 우크라니아 대기근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찌 선일 수 있습니까?

    또 독일과의 싸움에서 소련이 승리한 견인차는 스탈린의 공업화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나폴레옹은 많은 병기와 장병을 가지고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승승장구 했으나 . 러시아의 겨울에 패퇴하였습니다. 이길수가 없었죠.

    되돌아가서 당시 소련에서는 2천만을 죽였는데요. 소련은 두번째 유형입니다.
    '독일은 그르니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일어나는 변화를 꾀한다.'

    글작성자님은 2천만을 죽이는게 선입니까? 러시아의 영토는 끝에서 끝까지 광대합니다. 그걸 다 정복당합니까? 2천만이 왜 죽었습니까?

    레닌그라드는 못주겠다며 땜빵해서 사람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래서 죽었죠.
    이것은 곧 '독일의 그른 방향에 폭력을 행함으로써 일어나는 변화' 를 노리는 일이었습니다.

    한반도 인구는 남북합쳐 2천5백인데, 소련땅을 한반도 만하듯 말씀하시는게 이상하네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11.07 21:09
    No. 12

    '선악은 매우 작위적인 기준 ' 이라 하시면. 원래 선악은 작위적입니다. 동물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었기에 선악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잣대는 중한 것이기도 하다고 믿습니다.

    이거 굉장히 인문학적인 문답이라 생각보다 유익해서 좋네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6 강림주의
    작성일
    17.11.07 22:18
    No. 13

    1. 말씀하신대로 히틀러,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히틀러와 배후중상론에 심취한 이들은 폭력을 행사해 독일을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악행입니다. 하지만 토리다스님께서는 '모든' 악행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악과 선의 구분을 가르기 어렵다고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사례에 대해 말했습니다. 논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x는 y다' 라는 명제에 대한 반례로는 y가 아닌 x를 단 한 사례만 제시하여도 됩니다. 그렇기에 또다른 악행의 사례를 제시하셔도 제가 제시한 반례를 직접적으로 반박하는게 아니라면 큰 의미는 없다 생각합니다.

    2. 저는 스탈린의 공업화가 선행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선행과 악행의 이분법으로 나누기에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3.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많은 패배를 겪었습니다. 그 중 근세의 사례만 놓고 보아도 러시아는 스웨덴 제국과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에게 많은 패배를 겪었습니다. 러시아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마지막 승자가 되긴 했지만, 무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겨울에 패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최근 연구에 의하면 그 해 겨울은 다른 때보다 더 온난한 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패배는 러시아군 전략의 성공과 프랑스군의 보급문제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일어났습니다.

    역사적 사례를 제외하고 단순히 독소전쟁만 놓고 보아도, 소련은 충분히 패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 독소전을 전문으로 연구한 사학자들의 의견입니다. 미국의 랜드리즈, 일본의 불참 및 그로인해 가능했던 극동병력의 재배치, 그외 여러 요소들 중 하나만 부족했더라도 소련은 패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4. 러시아는 광활하지만 그 중 유럽방면이 차지하는 인구는 80% 가량 됩니다.

    5. 소련에서는 2천만을 죽였다는 말은 뭔가 좀 이상합니다. 작성자님께서는 북한이 남침을 했을 때 남한정부에서 인명피해가 두려워 교전 없이 무조건항복을 하길 바라시는건지 궁금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좀 많이 이상할 것 같고, 만약 아니라면 왜 2천만 인명피해에 대한 책임을 소련에게 전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6. 2천5백만 언급은 2천만이란 숫자와 비교할만한 예시로서 언급했습니다.

    7. 2천만명이 죽었다는 말을 했을 때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건,

    공업화는 매우 폭력적으로 이루어졌지만 10년 후에는 그러고나서도 2천만명이나 죽었을만큼 처절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공업화를 하지 않았다면 기다리는건 침략자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미래였다. 공업화는 폭력적이었지만,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나서도 그걸 선이나 악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쉽게 단정내릴 수 있을까?

    라는 말이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11.12 12:05
    No. 14

    어이구. 저를 박살낼 수도 있었는데 많이 봐주셨네요. 저도 선악은 작위적이라고 썻으므로 논리적으로 저는 작위적인 선과 악만 나누면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작위적이라 했으니 제 마음대로 나누어도 선과 악은 바뀔 수 있죠. 교활하지 않습니까? 이런 논쟁이 즐거워 남겨두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얄밉게도 이런게 가능하죠.
    여기서 저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죠.
    당시 소련은 전략적으로 움직여서 적을 섬멸하고 아군의 희생을 줄이기 보다 레닌그라드라는 의미만을 쫓다보니 아군의 희생이 어떠하든 무시하여 투입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소련의 잘못이다. 아무리 다급했더라도 국민의 희생을 무시하고 도시를 수호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폴레옹의 패전이라는 경험에서 보듯 군홧발에 밟히는 미래는 없었기 때문이다.

    후퇴하여 수습하고 몰아쳤다면 2천만이나 되는 사상자를 1천만이나 5백만으로 줄일 수도 있었건만, 당시 장군들 조차도 어이없어 하며 전투를 치룬 것이 그 골자이니 결국 공업화가 잘 되어서 물리쳤다는 어폐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는 소련의 악이다.

    이렇게 써 놓으면 논쟁이 이어지는데요. 어차피 저는 님을 못이깁니다. 쭉 논쟁할 뿐이죠.
    제가 이런 저런 말로 지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이길수는 없는 논쟁임을 압니다.

    박살낼 수 있었음에도 면목은 세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남깁니다. 어차피 지난 글이라 보시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글 남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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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96 강림주의
    작성일
    17.11.12 13:34
    No. 15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11.07 21:33
    No. 16

    좀 기다렸는데 안오시네요. 덕분에 유익하면서도 인문학의 낭만을 잠깐 품고 갑니다. 약간아쉽기도 하네요. (엄청난 무언가가 카운터로 올 거 같은데....) 덧글이 또 달리면 그때는 어떨지는 봐야 알겠지만, (역시 카운터가 클 거 같은 느낌;) 어찌되었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계속 기다릴 수는 없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6 강림주의
    작성일
    17.11.07 21:44
    No. 17

    저도 굳이 제 생각을 끄적인 이유가 제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얘기를 나누고자하는데 있었으니, 즐거우셨다는 말에 저도 즐겁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5 일민2
    작성일
    17.11.07 21:44
    No. 18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진적 변화를 희망하지요.
    급변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폭력보다도 무서울 수 있으니.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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