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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교

작성자
Lv.32 착정검주
작성
02.10.31 19:21
조회
1,819

  거대 영토의 지배와 중앙권력의 독점을 장기간 유지하는 면에 있어 중국 왕조는 비할 바 없이 뛰어나다. 유럽의 어느 통치자도 중국처럼 법률/정의/윤리/종교/예술/군대/공공사업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갖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왕조별로 역사를 구획하는 것이 세기별로 구획하는 것보다 이치에 맞는다. 왕조의 지속은 통일 충동의 결과이며, 통일은 안정/평화/번영을 약속해주는 이상이었다.

  개인/가족/정권에서 성장과 쇠퇴는 꾸준한 주의를 요구한다. 제자백가는 그리스 철학자들과 동시대인이며, 알렉산더와 진시황제는 대칭된다. 로마제국과 한제국은 동시에 번영했다. 야만인들의 침입으로 제국이 분열되자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전파되었다. 중국 정사에서 왕조의 말기에 이르면 자연재해/지진/홍수/혜성/일식/월식의 불길한 조짐이 천명 상실의 증거로 나열된다. 민중의 사기와 사회심리의 측면에서 자기암시가 왕조의 순환에 영향을 미쳤다. 도덕적 위신에 기초한 왕조가 체면을 상실하면 왕조 이데올로기는 양날의 칼이 된다. 황실의 무능과 왕조의 쇠퇴는 함께 간다. 부담이 누적되고 가족제도가 일탈하여 외척의 악명이 높아진다.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토지가 점차 과세대상에서 빠져나가며 정부 세입이 줄어든다. 이것이 결국 농민의 반발을 초래한다.

  황제제도는 오랜 경험을 통해 세련된 내구력을 갖추게 되었다. -771년 주왕실은 낙양으로 천도하여 동주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미 중앙권력의 외곽에 제후국들이 성장했다. 동맹/연맹/흡수를 통해 전국시대에는 7개국만이 경쟁에 살아남았다. 지배자의 권위는 희생/전쟁/사냥이라는 의례적으로 인가받은 폭력에 근거했다. 사냥은 희생에 쓰일 동물을, 전쟁은 희생에 쓰일 죄수를 공급했다. 전쟁은 점을 치고, 승리를 기원하고 서약하는 의식과 조상 제단에 공식 보고를 하고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적 행사였다.

  춘추전국시대에 국가권력과 사회질서의 이론적 근거를 추구하는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사회조직에 대한 유교의 이론적 근거는 우주질서와 상하우열의 계층관계에 기초한다. 개인의 행위는 관례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기대에 일치되어야 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역할에 충실한다면 사회질서는 제대로 유지될 것이다. 지배층의 권위는 집단의 평가와 도덕적 판단에 의존한다. 집단에 의해 경멸당하는 것은 체면/자부심에 손상받는 일이다. 도덕성은 자기수양을 통해 달성될 수도 있지만 외적 모범을 흉내내는 것도 가능하다. 예는 신분에 맞는 적절한 행위이다.

  군자는 고대 문헌에 기록된 예를 따르는 사람이다. 일반 서인은 상벌에 의해 규제받고, 지배층은 도덕적 원리에 의해 규제받는다. 개인적 행위를 이상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폭군에게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유학자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열정은 전통을 확인하고 보존하려는 것이다. 유교는 불가지론적 현세주의이며, 인내와 타협, 중용과 평화, 조상/노인/학자에 대한 존경,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를 중시했다. 기존의 권위를 존중하여 사회의 안정성을 확보한 성공적인 보수주의 체계였다. 중국의 학자는 관직에 있을 때 유가였고 관직을 떠나면 도가였다. 대중에서 번창한 도교는 유교적 규범에 저항한 학파였다. 전통적으로 도교는 노자에서 비롯된다. 도교는 다양한 믿음과 관습의 저장소가 되었다. 정령숭배/연금술/마술/불로불사/신선술/의술/신비주의가 결합되었다. 도덕적 사고야말로 타락의 징표이다. 예는 세상의 혼란을 반영한다. 오히려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무위가 해결책이다.

  전쟁에서 북방민족의 영향으로 산악의 보병이 전차를 대체하고 철기와 기병이 등장했다. 문화적으로 뒤쳐진 진은 서북에 기반하여 법가 상앙의 개혁을 제도화했다. 엄형에 의존하여 인민을 상벌로 다스렸다. 뭉치면 착한 사람이고 흩어지면 악한 사람이다. 군주의 목적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백성은 국가의 동원력이다. 지방의 유력가문을 지배하기 위해 관료제를 발전시켰다. 나라를 31개 현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가 통치했다. 작위에 따라 요역과 조세를 변제해주고 귀족계층과는 다른 새로운 지배층을 만들어 군주에게 종속시켰다. 일반의 토지매매를 허용하여 생산의욕을 자극시켰다. 형법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했다. 5가 단위로 연좌제를 반포하여 개별 범죄에 대해 집단적으로 책임을 지웠다. 지체 없는 신고주의가 발전했다.

  인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진의 군사력을 향상시켰다. 관리와 잠재적 군사층인 농민을 우대하고 상인/수공업자를 천대했다. 철기/쇠퇴로 무장한 기마병과 보병이 전차를 대체했다. 분권적인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적인 관료통치로 넘어간 것이다. -221년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제국을 군현으로 나누었다. 지방의 유력 호족들은 수도로 강제 이주당하고 일부 성벽은 파괴되었다. 문자/도량형/화폐/도로가 통일되었다. 시황제의 인력과 조세에 대한 가혹한 징발은 국가의 자원을 고갈시켰다. -210년 시황제가 사망하자 진은 순식간에 분열되었다. 한은 진의 관료제를 확장하면서도 보다 완만하게 추진하고 황제에 초점을 맞춘 도덕적 우주관과 결합시켰다.

  한은 -206년 서부 14개 군을 설치하고 동부 10개 세습왕국을 인정하여 제국을 통치했다. 점차 제후들의 규모를 축소시켜 -108년 84개 군과 18왕국으로 단순화했다. 지방호족 출신 공신들과 친척들에게는 특정 지역의 조세와 인민을 독점할 작위를 수여했다. 역전제도로 지역을 연결하고 주에 자사를 임명하여 호족을 견제하고 행정을 보고했다. 태후를 통한 외척의 발호에 환관의 보좌로 맞서면서 궁정은 음모의 온상이 되었다. 수도 장안과 모든 도시의 거래는 정부가 정한 시에서 관리가 상품가격을 결정하고 상업세를 징수했다. 시적에 등재되지 않은 상인들은 역전을 따라 교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고 대지주가 되었다.

  상업은 관료를 매수하는 경향이 있었다. 관상복합체에 의해 기업가 정신은 제거되었다. 염/철/양조장/화폐주조권을 정부가 독점했다. 한의 통치 중에 인구가 증가하고 지방호족이 토지를 집적해서 성장했다. 관료와 친족관계로 맺어지고 지역적으로 독립성을 지닌 지식인들이 학문과 예술을 독점한 상층 지배집단으로 등장했다. 화북의 경제벅 발전은 무역과 군사적 팽창을 자극했다. 한무제(140-87)는 남만주와 한반도에 진출하고 중국 남부와 북부 베트남에 진격했다. 북부와 서북부 변경만 남게 되었다. 기마궁수를 앞세워 화북을 침략하던 투르크 계 유목민인 흉노에 대해 한은 남흉노를 회유하여 복속국으로 만들고 호전적인 북흉노를 방어했다. 화친정책으로 선우에게 한의 공주와 비단을 제공했다. 전쟁/매수를 통해 유목민들끼리 다투도록 以夷制夷 정책을 폈다. 유목민의 측면을 따라 중앙 아시아 오아시스 국가를 거쳐 비단길 사절을 파견했다. 티베트 원류인 강족이 교역로를 위협했으므로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 파미르고원을 넘어 알렉산더가 진출했던 지역까지 진출했다. 유목민에 대한 중국의 조공은 유목군주를 강화시켜 후일의 후환거리가 되었다.

  관료를 충원하기 위해 학문을 장려하고 국가이념으로 유교를 수용했다. 진의 법가주의적이고 전제주의적인 통치술에다 유교의 이념구조를 첨가했다. 한의 제국유교는 공자/맹자나 송유학과 구분된다. 군주는 법가를 선호하고 관료는 유교를 선호했다. 군주는 형벌과 군사력으로 통치하고 특권을 유지하면서 유학자를 통해 자비롭고 예의바른 행동을 장려했다. 유교는 부드러움으로 강력함을 제어하는 정치이다.

  천인상관의 우주론은 -139년 회남자에서 잘 드러난다. 머리가 둥글고 다리가 네모난 것은 천원지방을 닮은 것이다. 하늘은 사계/오행/구류/366일로 구성된다. 사람은 사지/오장/구관/366개 관절로 구성된다. 하늘의 기후변화와 사람의 희노애락, 눈과 귀는 해와 달이며 피와 영혼은 바람과 비다. 자동적인 상관구조인 오행원리에 따른 수비학이 성행했다. 시간계산을 위해 십간 십이지 60진법을 고안했다. 주역은 각기 6개(세 자리 2진법) 음양 평행선의 조합으로 구성된 64괘였다. 이러한 감응이론은 한의학과 연금술에 도움이 되었다. 천문관측은 대단히 정확했다. 유학자들은 상대의 정인들처럼 황제를 위해 천인상관설로 전조를 해석해 주었다.

  황제는 황권/경찰/군대/사회통제기구를 가지고 권력과 힘을 장악했으며 문인 엘리트는 권력을 정당화하고 지식을 제공했다. -124년 태학이 설치되어 유교의 위치는 공고해졌다. 역경/서경/시경/춘추/예기 오경박사가 설치되었고 -2세기 중엽 태학에 3만의 학생이 있었다. 유교의 행동규범은 선사시대에 확립되었다고 생각되었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것이다. 권리보다 의무를 중시하며 모두가 자기 의무를 다하면 공익 질서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가족의 효는 부모의 통제권를 확립시켰고 국가의 충은 왕조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관료들은 질서를 추구하지만 황제는 독단적이고 예측할 수 없다. 관료를 처형하는 황제의 결정은 희생제 제사장으로부터 전국시대에서 계승된 인가받은 폭력이었다. 천자는 신의 화신이며 종묘는 황제를 숭배하는 장소이다. 관료는 문민질서를 숭앙했지만 사실 무의 측면이 더욱 강력했다. 사마천은 궁형을 통해 황권의 위협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황권을 정당화할 뿐 그 근원을 질문하지 않는다. 학문은 통치의 기술로 전락했으며 교육도 이념교육의 수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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