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중학교 시절 시바타 겐자부로의 ‘미야모토 무사시’와 ‘비천무’, ‘네무리 쿄시로’ 등의 일본 무협물을 접하면서 무협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무협과 비교해서 시바 료타로나 시바타 겐자부로가 특이한 점은 실제 검호의 심득이나 기술, 일화를 차용, 변형해서 좀더 현실감을 높였던 점입니다.
요즘의 판타지나 무협을 보면 묵향이나 드래곤 체이서 같은 옛날 작품의 설정을 너무 그대로 써서 이제 약간 지겹습니다. 특히 이제는 당연하게 된 검강(오러블레이드)을 건물높이만큼 내뿜는 거나, 단계별 소드마스터 설정 같은거 말입니다.
박제후님의 ‘황금 십자가’를 비롯해서 이제 실제의 중세 검술의 검투를 재현한 괜찮은 전투신을 묘사한 판타지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검기나 심검, 무검과 같은 환상의 경지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아직 엄밀한 설정이 없는 것 같더군요. 뭐, 실제로 그런게 없으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찾아보니까 그런 것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무술가들의 전서를 찾아서 읽다 보니 의외로 기의 운용이나 최상의 경지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 꽤 있더군요. 제가 아는 한 몇가지를 좀 소개하겠습니다.
몽상검
이것은 일도류의 개조 이토 잇토사이가 검의 묘리를 얻기 위해서 신궁에서 참배를 하다가 수상한 기척을 느끼고 부지불식간에 베어 버린 일화에서 나온 일도류의 극의입니다. 이것만 보면 초보 무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거랑 비교해서 별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극의라고 보기에는 약간 미흡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손가 태극권의 개조 손록당이 쓴 권의술진에서는 도가의 수련과 권법의 수련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면서 적이 불시에 습격하자 내가 깨닫지도 못하는데 단전의 기가 발동하더니 적을 공격하는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권술에서 연허합도에 이르면 진의를 화하여 지극히 허허롭고 지극히 없는 경지에 이른다. 움직이지 않을 때에 내부는 고요히 비어 허허로워 그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갑자기 위험한 일을 당할 지경에 이르러서는 비록 보고 듣지 않아도 능히 깨닫고 그것을 피할 수 있다.”
스스로의 정신이 지극히 고요해서 주위와 합일된 상태에서 자신이 인지하지 않더라도 몸이 움직이는 그런 상태를 묘사한 것 같군요.
무검
무검(無劍)이나 무도(無刀)를 논한 무사들을 논한다면 야규신음류를 연 야규 세키슈사이와 일도정전무도류를 연 야마오카 뎃슈가 대표적입니다.
야규 신음류에서 말하는 무검이란 무엇일까요? 세키슈사이의 아들인 야규 무네노리는 병법가전서 무도(無刀)의 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도(無刀)라는 반드시 상대의 칼을 뺏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칼이 없을 때에 베이지 않게 하는 것이 무도(無刀)니 보여주기 위한 예능이나 명예 따위가 아니다. 베이지 않는 것이 승리이다. 검을 가지고 있지 않는데 도망가는 자로부터 일부러 검을 뺏을 필요도 없다. 무도의 심득은 검을 갖고 있지 않을 때에 주위의 도구를 사용해서 이기는 것이다. 부채로도 지팡이로도 좋고 상대의 검을 빼앗아도 좋다.”
말하자면 자기의 검을 잡거나 남의 검을 탈취하는 것에 고집하지 말고, 유연한 심신의 운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병법가전서 무도의 권의 ‘감춰야 되는 일(秘事)’로 무도세(無刀勢 ), 수도세(手刀勢 ), 무수세(無手勢)라는 항목이 나옵니다. 숨겨야 하는 사항(秘事)이기 때문인지 설명도 없이 이름만 있는데 칼이 없는데 칼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움직이는게 점점 칼을 짧게 해서 나중에는 손이 칼이라고 생각하고 나중에는 손도 없이 몸의 움직임만으로 적을 제압하는 단계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더군요.
이렇게만 보면 유술이나 권법의 움직임과 같아서 검술의 극의라고 보기에는 약간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소설에서 최종오의가 남의 칼 뺏는 걸로 나오면 참 허무하잖습니까?
일도정전무도류의 류조 야마오카 뎃슈는 무도(無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도(無刀)란 마음 밖에 칼이 없다는 것으로 삼계유일심야(三,界 唯一心也) 내외본래무일물(內外本來無一物)인 고로 적을 대할 때 앞에 적이 없고 뒤에 나가 없고, 묘응무방(妙應無方하)여 짐적(朕跡 )을 남기지 않는다. 이것이 무도류의 뜻이다.”
적아를 분별하지 말고 자유롭게 검을 쓰는 것을 무도라고 하지 딱히 검을 안드는 것에 집착을 하는 것 같지는 않게 보입니다. 독구구검이 자유로운 초식의 운용, 무초를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합니다.
검기
야마오카 뎃슈와 카츠카이슈가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할때, 카츠카이슈가 자신이 젊은 시절에 에도에서 시라이 토오루(白 井亨)이라는 노검사와 시합을 한 감상을 술회하는게 야마오카 뎃슈의 회고록에 나와있습니다. 카츠카이슈는 야마오카 뎃슈가 참선의 깨달음으로부터 일도정전무도류를 만든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검이든지 참선이든지 글자가 다르고, 이름이 다를 뿐 같은 것이다. 나는 옛날에 에도에서 시라이 토오루(白 井亨)라는 검사와 시합을 했는데 그에게는 일종의 신통력이 있었다. 그가 검을 내린채 있으면 품연(稟然하)면서 신연(神然)한 도저히 범할 수가 없는 신기(神氣)가 칼끝에서 뿜어져 왔는데 정말로 신기했다. 나는 도저히 제대로 상대할 수가 없었다. 나도 결단코 그 경지에 도달하고자 열심히 수행했는데 안타깝지만 그 사람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내가 이에 대해서 시라이에게 말하자 시라이는 웃으면서 ”당신이 다소 검법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나의 칼끝이 무섭게 보인 것이다. 무아무심(無我無心)의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 바로 그것이 검법의 극의이다.“ 나는 그말을 듣고서 공포심이 생기면서 내가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막말에 막부의 해군봉행(해군참모총장)이자 정치가로 유명한 카츠카이슈지만 직심영류의 면허개전을 딴 상당한 검사이기도 했습니다. 야마오카 뎃슈의 무도류도 견식했을 카이슈가 시라이에 대해서 저정도의 평가를 한 것으로 봐서 시라이의 검법을 뎃슈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던걸까요?
시라이 토오루 자신은 자신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기(神氣)에 대해서 혁기(赫氣)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문인들에게 잊어야 할것을 세가지, 명심해야할 것을 세가지를 가르쳤습니다. 잊어야 할 세가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검과, 자신의 몸, 그리고 적이며, 명심해야할 세가지는 단전과 혁기(赫氣), 진공(眞空)이라고 합니다. 시라이 토오루는 단전에 진기를 길러 그 진기가 검에 충실하게 뻗어 나가는 것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자신의 스승이었던 데라다 무네아리(寺田宗有)는 자신의 검끝에서는 불꽃이 나온다고 묘사했습니다. 진공이란 자신의 몸에 진기가 차오르면서 느낄수 있는 공기 중에 천지의 기가 교류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라이는 자신의 진기와 이 진공(眞空)의 기가 합일해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나오는 것을 천진(天眞)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시라이는 이러한 검기를 실전에서 쓰는 것에 대해서 검끝으로부터 혁기(赫氣)가 강하게 나와서 적을 꿰뚫어 적을 제압하는 長透貫이라는 기술과, 나와 적과 진공을 하나로 보고 이 허령한 진공을 쪼개어(劈) 적을 제압하는 遠撃渕이라는 기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長刺貫이라고 불렀는데 수행함에 따라서 혁기가 굵어졌기 때문에 長透貫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단전에서 칼끝으로 뻗어 나온 혁기가 진공과 아우러져 있는 상태를 진검真劔, 더욱 단전과, 정신을 수련해서 이 진검에 몸이 수렴되는 느낌을 갖는 것을 진묘검真妙劔이라고 칭합니다. 일종의 신검합일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보통 도가의 내단수련에서 기를 조절하는 것을 화후를 조절한다고 한 것이 진기가 양의 속성을 지녀서 이를 조절하는게 불의 강도를 다스린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검끝에서 불꽃이 나온다고 표현한 시라이 토오루는 상당히 정확한 표현을 한것 같습니다.
한병철 씨는 독행도에서 살법을 쓸때에 기를 압축하듯이 하여 검을 통해 폭발하듯이 뿜어낸다고 하며 이를 검기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역시 이것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한병철씨는 이렇게 폭발적으로 뿜어져 내는 기를 강기(强氣)라고 부르면서 기혈을 들뜨게 해서 상기(上氣)시킨 상태에서 나오는 기라고 합니다. 실제에서는 검기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검강 보다는 검기가 뭉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기의 운용을 강기라고 한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운용이 좀더 고수가 된 상태에서 나올수는 있지만 지금의 소설처럼 검강>검기인것 같지는 않네요. 오히려 운용의 차이지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도 이렇게 운용상의 차이로 검강과 검기를 설정한다면 지금의 지긋지긋한 계단식 소드마스터를 타파할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화염도, 육맥신검
시라이는 그런데 이러한 검기, 혁기를 도구와 상관없이 쓸수 있도록 자유자재가 되는 수행을 했다고 하더군요. 또한 시라이는 침형수리검의 명수이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 혁기가 진검이나 목도, 젓가락, 무도(無刀)에 이르러서도 자유자재로 뿜어지기 때문에 검이라도 상관없고 젓가락이나 무도(無刀)라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손에서 경력을 뿜어내는 천룡팔부의 두 무공이 어느정도 생각나는 군요.
어검술
독행도에서 한병철씨는 어검술을 보았는데 소설에서 말하는 판넬이라기 보다는 검을 교묘하게 던지는 술법이었고, 여기서 단전의 내기를 순간적으로 폭사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앞에서 시라이 토오루가 내기를 운용하는 침형수리검의 명수라고도 했는데 이와 통하는게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어검술은 내력을 담아 큰 검을 던지는 기술, 검에 힘을 싣는 요령이라고 보는게 좋을 것 같네요. 그자체로 큰 실전력이 있다고 보기보다 힘의 수발을 수행하는 수련의 방법으로 설정을 두는게 더 현실적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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