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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의 왕조

작성자
暗影 ▦
작성
02.12.12 11:13
조회
2,846

홍무제   초대 황제(재위 1368∼1398).

(洪武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초명(初名) 흥종(興宗). 재위연호(在位年號)에

         의해 홍무제(洪武帝)라고도 한다.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출신

         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托鉢僧)으로 지내다가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원(元)나라 강남

         (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그뒤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켜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한민족

         (漢民族)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여 육부(六部)를

         독립시키고 도찰원(都察院)·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들

         기관을 황제 직속하에 두었다.

         지방에도 포정사사(布政使司:行政)·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軍事)·

         안찰사사(按察使司:檢察)를 병립(才立)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24인의

         황자(皇子)를 전국의 요지에 분봉(分封)하여 제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里甲制)를

         설치하고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정책의 침투를 꾀하였다. 그러나

         그가 꾀했던 군주독재권의 강화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되었기 때문에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병사하였다.

건문제   제2대 황제(재위 1398∼1402).

(建文帝)

         휘 윤문(允暲). . 시호 혜제(惠帝). 1392년 황태자였던 부친 의문태자

         (懿文太子)가 병사하여 황태손에 책봉되었다. 1398년 태조

         홍무제(洪武帝)가 죽자 16세로 즉위, 건문(建文)이라는 연호를 썼다.

         당시 태조의 여러 아들들은 각 지방의 왕으로 분봉(分封)되어 있었는데

         건문제는 황자징(黃子澄) ·방효유(方孝孺) 등의 획책에 따라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봉령을 삭감하여 그 세력의 약화를 도모하였다.

         그 때문에 1399년 연왕(燕王)이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켜, 1402년

         경사(京師: 南京)를 함락하고 제위를 빼앗아 영락제(永樂帝)에

         즉위하였다. 건문제는 이때 성안에서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영락제   제3대 황제(재위 1402∼1424).

(永樂帝)

         태조 홍무제(洪武帝)의 넷째 아들. 묘호 태종(太宗). 후에 성조(成祖)로

         개칭하였으며, 연호에 따라 영락제라 일컬어졌다. 처음에는 연왕(燕王)으로

         베이징[北京]에 봉해졌으나, 홍무제가 죽은 뒤 적손(嫡孫)인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하여 삭봉책(削封策)을 취하자 1399년에 거병(擧兵)하였다. 3년의 격전

         끝에 수도 난징[南京]을 쳐서 건문제를 패사시키고,

         제위에 올랐다(靖難의 변). 이어 산둥성[山東省]의 지닝[濟寧]과 린칭[臨淸]

         간의 후이퉁허[會通河]를 개준(改浚)하여, 대운하의 양도(糧道)를 열었다.

         1421년 북평으로 서울을 옮겨 베이징이라 고쳐, 수도의 터전을 닦았다.

         영락제의 치정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주변지역에의 대규모 정벌과, 그것에

         의한 명나라 국경의 확보이다. 즉, 동북지방에서는 헤이룽강[黑龍江] 하류에

         누르간도사[奴兒干道司]를, 창바이산[長白山] 북쪽에 건주위(建州衛)를 두었다.

         그 뒤로 많은 위소(衛所)를 두어 여진부족을 통할하고, 타타르해협에서부터

         남만주에 이르는 땅을 지배하였다. 몽골은 원(元)나라가 멸망한 뒤

         분열상태에 있었으나 영락 초년 동부에 타타르, 서북부에 오이라트가

         일어나 북변에 압력을 가하였다. 영락제는 1410년 스스로 고비사막 북쪽에

         원정하였고 이후 1424년 진중에서 병사할 때까지 5차례의 친정(親征)으로

         그 위협을 막았다. 서남지역에서는 티베트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소수민족을

         눌러 구이저우 포정사사[貴州布政使司]를 두었으며, 1406년에는

         안남(安南: 베트남)에 원정하여 교지 포정사사(文趾布政使司)를 두고

         직할지배하에 넣었다.

         또 남해지역에 6회에 걸친 대원정군을 보내어 멀리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를 일본국왕에 봉하여

         왜구를 누르고, 감합무역(勘合貿易)의 길을 연 것도 그의 시대였다.

         내정면에서는 문화정책에 힘을 기울여 2만여 권에 이르는 일대유서(一大類書)

         《영락대전(永樂大典)》(1408) 외에,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편찬시켜, 주자학의

         국가교학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그의 시기에 환관이 대두하기

         시작하여, 이후 명나라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홍희제   제4대 황제(재위 1424∼1425).

(洪熙帝)

         묘호(廟號) 인종(仁宗).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의 장자이다. 어릴

         때부터 문무(文武)에 빼어났고, 성조가 황위찬탈전 ·만주경략(滿洲經略) ·

         몽골정벌 등으로 외정(外征)을 하였을 때, 궁정을 잘 다스려 영재(英才)의

         풍모를 보였다. 즉위한 후에는 명신(名臣) 양영(揚榮) ·양사기(楊士奇) ·

         양단(楊쓰)을 중용하여, 영락제의 대외적극책(對外積極策)에서 비롯된 흩어진

         내치를 회복하였고, 관기의 숙정, 민생의 복리를 도모하는 한편, 황위를

         빼앗긴 후에 냉대를 당하던 건문제(建文帝) 일파의 사회적 복귀를 실현시켜

         국내 감정의 융화에도 힘썼다.

선덕제   제5대 황제(재위 1425∼1435).

(宣德帝)

         성명 주첨기(朱瞻基), 시호 장황제(章皇帝), 묘호 선종(宣宗), 선덕제는

         그 연호(年號)에 따른 호칭이다. 조부 영락제(永樂帝)의 총애를 받아

         자주 그의 순행(巡幸)·정토(征討)에 수행하였다. 부친 홍희제(洪熙帝)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이듬해 동생인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가

         반란을 일으키자 친정(親征)하여 항복을 받고, 1426년에는 우량하이

         [兀良哈三衛]의 침공을 격파하여 과단성 있는 무위를 보였으나,

         영락제와는 달리 적극적인 대외정책은 쓰지 않았다.

         내정면에서는 양사기(楊士奇) 등 명신들의 보좌를 받아 크게 치적을

         올렸다. 그림에도 뛰어나 휘종(徽宗)과 함께 유명하였으며 선덕요(宣德窯)는

         이 시대 풍조의 일단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정통제   제6대 황제(재위 1435∼1449).

(正統帝)

         제8대 황제에 다시 즉위하였으므로 천순제라고도 한다.

         성명 주기진(朱祁鎭). 묘호 영종(英宗). 시호 예황제(睿皇帝).

         선덕제(宣德帝)의 맏아들로, 9세에 즉위하였으므로 태황태후가

         섭정하였고, 전대부터의 어진 신하 양사기(楊士奇) ·양부(楊溥) ·

         양영(楊榮) 등 이른바 삼양(三楊)이 보필하여 선정이 기대되었으나,

         그들이 죽자 환관 왕진(王振)이 전횡(專橫)하였으므로 치적이 오르지

         않았다. 윈난[雲南]의 사인발(思仁發) ·사기발(思機發)의 난리 때에는

         소모전을 강요당하여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고, 게다가 저장[浙江] ·

         푸젠[福建] 광부들의 난과 등무칠(鄧茂七)의 반란에도 애를 먹었다.

         때마침 동서 몽골통일에 성공한 오이라트의 에센[也先]이 쳐들어왔으므로,

         왕진의 권고에 따라 친히 이를 맞아 싸웠으나 토목보(土木堡) 싸움에서

         대패하여 포로가 되었다(土木의 變). 이듬해에 석방되었으나 이미 동생

         경태제(景泰帝)가 즉위하여 있었으므로, 태상황제로서 남궁(南宮)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1457년 경태제가 중병에 걸린 틈에 석형(石亨)

         등의 노력으로 다시 황제로 복위하는 일에 성공하였다(奪門의 變).

         황제는 이현(李賢) ·여원(呂原) ·팽시(彭時) 등의 재상을 신임하여

         그들에게 정무를 맡겼다. 그러나 오이라트에 대신하여 타타르[알씸]의

         침입에 괴로움을 받는 등 다난한 일생을 마쳤다.

경태제   제7대 황제(재위 1449∼1457).

(景泰帝)

         제6대 영종(英宗)의 동생으로서 1449년 오이라트 부족을 친정(親征)하던

         영종이 토목보(土木堡)에서 대패하여 포로가 되자 대신 즉위하였다. 이듬해

         풀려나서 귀환한 영종과 암투를 벌여 그를 남궁(南宮)에 유폐시켰으나 1456년

         큰 병을 얻어 영종에게 황제자리를 빼앗겼다.

천순제   제8대 황제(재위 1457∼1464)

(天順帝)

         정통제가 경태제를 탈문의 난을 거쳐 황권을 수복함.

??????   제9대 황제(재위 1464∼1487)

         자료가 없네요...ㅡㅡ;

홍치제   제10대 황제(재위 1487∼1505).

(弘治帝)

         묘호(廟號) 효종(孝宗). 이름 주우당(朱祐侁).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어린시절은 어려움이 많았으나, 영명(英明)하여 18세에 즉위하였다.

         전대의 폐정(弊政)을 숙정하고 명신현량(名臣賢良)을 선용하였다.

         《대명률(大明律)》을 개정하여 《문형조례(問刑條例)》를 반포하였고,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개편하는 등 법규를 정비하여 내정에 치적을

         쌓았다. 한편 동북의 건주여진(建州女眞), 서북의 하미[哈密] ·달단[알씸]을

         초무(招撫)하여 외정에도 성공을 거둠으로써 명왕조 중흥의 영주라 불렸다.

정덕제   제11대 황제(재위 1505∼1521).

(正德帝)

         성명 주후조(朱厚照). 묘호 무종(武宗).

         그의 연호를 따서 정덕제라 부른다. 홍치제(弘治帝)의 맏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불교와 산스크리트에도 능통했으나,

         황제가 된 뒤로는 미녀를 후궁으로 삼아 쾌락을 즐기는 음탕한 생활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환관을 사랑하고, 라마교(敎)를 광신하였으며,

         유희를 좋아하여 국비를 낭비하였다. 그 때문에 산둥[山東] ·쓰촨[四川] ·

         장시[江西] 등지에서 굶주린 백성들의 난이 자주 일어났고, 황족인

         안화왕(安化王) 치번(瘦페)이나 영왕(寧王) 신호(宸濠)의 난이 일어나는 등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한편 이 무렵부터 포르투갈의 내항(來航)이 시작되어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였다. 영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친정(親征)을 명목으로

         난징[南京]에 가서도 음락(淫樂)을 거듭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물에 빠진 것이

         원인이 되어 죽었다.

가정제   제12대 황제(재위 1521~1566).

(嘉靖帝)

         휘 후총(厚拯). 묘호 세종(世宗). 덕안부(德安府) 안륙현(安陸縣)에서

         흥헌왕(興獻王) 유원(裕突  )의 장자로 태어났다. 무종(武宗) 정덕제

         (正德帝)가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1521년 무종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즉위 때의 입경의례(入京儀禮)와 생부모에 대한 존호(尊號) ·제사(祭祀)

         등의 대례(大禮)문제로 4년간이나 조신(朝臣)들과 다투었다. 이 과정에서

         자의적인 경향이 강해지면서 정치의 이완(弛緩)과 부패를 초래하게 되었다.

         북방에서는 원(元)나라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이 이끄는 몽골족이 위협

         하였으며, 남쪽에서는 왜구(倭寇)가 장쑤[江蘇] ·저장[浙江] 두 성의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와 같은 국내외의 상황에서 그는 도교(道敎)에 심취하여 엄숭(嚴嵩)

         등의 난정(亂政)을 초래하게 하였는데, 이 시기는 농촌으로의 화폐경제

         침투, 일조편법(一條鞭法) 등의 세제개혁, 향신(鄕紳)의 대두 등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일련의 변화가 한꺼번에 나타난 시기이고, 동시에

         변동에의 대응 능력을 잃어가는 시기였다. 그런 반면, 이 가정제대부터

         만력대(萬曆代)에 걸친 상층계급의 난숙한 생활 속에서 문학 ·미술

         부문에 많은 명품(名品)이 나왔다.

융경제   제13대 황제(재위 1566~1573).

(隆慶帝)

         서계 徐階 [1494~1574]의 자료에서 나옴

만력제   제14대 황제(재위 1573∼1620).

(萬曆帝)

         이름 주익균(朱翊鈞). 묘호 신종(神宗). 시호 현황제(顯皇帝). 만력제라

         함은 재위 연호에 따라 부르는 칭호이며, 융경제(隆慶帝)의 셋째 아들이다.

         10세에 즉위하였으므로 선제(先帝)의 부탁에 따라 대학사(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하여, 제정(諸政)의 개혁을 단행하여 기강을

         숙정하고 전국적으로 토지의 면적을 측정, 일조편법(一條鞭法)의 시행에

         합리적인 기초를 닦았다.

         밖으로는 몽골의 알탄[俺答] 제부족을 회유하고, 계주(모州) ·요동

         방면의 수비를 견고히 하였다. 그러나 1582년 장거정이 죽자 정치는

         방만(放漫)에 빠지고, 셋째 아들 상순(常洵)을 편애하였기 때문에 태자

         책봉 문제가 시끄러웠다. 여기에 편승한 환관들의 농락으로 동림파(東林派)와

         비(非)동림파의 당쟁이 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조선 출병 등 만력의

         3대정(三大征)으로 국력은 날로 쇠진하고, 이에 따른 가혹한 징세(徵稅)로

         민심은 점점 명조(明朝)로부터 떠나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상공업은 번영하고, 학예도 발전하였다.

태창제   제15대 황제 (재위기간 1년 미만)

(泰昌帝)

         자료없음. 천계제의 자료에서 유추함.

천계제   제16대 황제(재위 1620∼1627).

(天啓帝)

         이름은 주유교(朱由校). 묘호(廟號) 희종(熹宗).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정격(樸擊:태자, 즉 후일의 泰昌帝 암살 미수사건, 1615) ·홍환(紅丸:

         태창제가 붉은환약을 먹고 사망한 사건) ·이궁(移宮:천계제를 양육한

         李選侍를 貴妃로 승격시키자, 반대파들이 그녀를 별궁으로 옮긴 사건)의

         세 사건이 일어나고, 동림당(東林黨)을 중심으로 한 권력투쟁이 격화하여

         내정은 혼란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모든 정무를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일임한 채

         일락(逸樂)에 탐닉하였다. 그러자 위충현이 동림파를 몹시 탄압하였으므로

         산둥[山東] ·쓰촨[四川] ·구이저우[貴州]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동북지방에서는 만주족의 세력이 강성해져, 그 방비를 위한 과중한

         경비지출로 재정은 파탄에 직면하여 명나라는 멸망 직전의 상태에 빠졌다.

숭정제   제17대 황제(재위 1628∼1644).

(崇禎帝)

         이름 주유검(朱由檢). 묘호 의종(毅宗). 시호 장렬민제(莊烈愍帝).

         연호를 따서 숭정제라고 한다. 광종(光宗)의 다섯째 아들이자

         천계제(天啓帝)의 아우이다. 성격이 근엄하여 즉위하자 횡포하기

         이를 데 없었던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물리치고 정계를 숙정하여

         만력연간(萬曆年間) 이후 궁정 안에 뿌리박고 있던 동림당(東林黨)을

         둘러싼 정쟁(政爭)을 종식시켰다. 서광계(徐光啓)를 기용하여 재정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파벌당쟁은 날로 심각해지고

         장졸(將卒)도 부패하여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청(淸)나라에 대한

         군비는 점점 증대되고 기근까지 겹쳐 농민반란이 일어나 국운이

         쇠퇴하였다. 그 중에서도 북서쪽의 이자성(李自成) ·장헌충(張獻忠)이

         강하여 숭정제는 이건태(李建泰)를 앞세워 이를 물리치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644년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은 명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베이징[北京]으로 쳐들어왔다. 숭정제는 남천(南遷)의 권유를 물리치고

         베이징을 지켰으나 외성(外城)이 함락, 그 해 3월 만세산(萬歲山)에

         들어가 목매어 죽었다.

영명왕   남명(南明)의 유왕(遺王:재위 1647∼1662).

(永明王)

         계왕(桂王) 또는 영력제(永曆帝)라고도 한다. 명(明)나라 말의 혼란기에

         유적(流賊) 장헌충(張獻忠)이 후난[湖南]의 형주(衡州:지금의 衡陽)를

         공격하였을 때, 아버지인 계왕 주상영(朱常瀛)과 함께 광시[廣西]로

         탈출하였다. 그 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왕이 되었다. 1647년 푸저우

         [福州]의 당왕(唐王)이 죽자, 광시 순무(巡撫)인 구식사(瞿式嫁) 등에

         옹립되어 광둥성[廣東省]의 자오칭[肇慶]에서 즉위하고, 영력이라

         건원하였다.

         그러나 청군(淸軍)의 공격을 받고 광시의 우저우[梧州]로 도망하고,

         그 뒤 핑러[平樂] ·구이린[桂林]을 거쳐 다시 후난의 우강[武岡]으로

         피하였다. 그동안 구식사 등의 분투로 회복운동이 한때 호전되었으나,

         구식사가 피살되자 다시 악화되어 왕은 난닝[南寧]으로 도피하여 손가망

         (孫可望)에게 의지하였다. 그후 구이린 ·청두[成都]를 회복하고 이어

         이정국(李定國)에게 옹립되어 윈난[雲南]으로 갔다. 그러나 손가망이

         청나라에 항복함으로써 다시 도피생활을 시작하여 미얀마로 피신하였다.

         그때 그를 따라간 사람은 650여 명이었다고 한다. 미얀마왕이 영명왕을

         붙잡아 청나라에 넘겨주었고, 이듬해 윈난에서 죽었다.

************************************

9대 황제에 대한 자료를 못찾았읍니다.

13대와 15대 황제에 대한 자료도 없어서 연호만 적었읍니다.


Comment ' 3

  • 작성자
    뭔말인지...
    작성일
    02.12.13 02:17
    No. 1

    9대 황제는 성화제(成化帝 헌종 견심(見深) 1464~1487)입니다.

    자료는 거의 없지요. 하지만 무협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성화제때 무협에 가끔 등장하는 서창이 신설되어 왕직이라는 환관이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물론 성화제 이후 서창을 폐지됐지요.

    결국 서창은 성화제때만 존재했습니다. 서창이 등장하는 무협은 곧 성화제때를 배경으로 한 것이지요.

    물론 무협이 역사에 정확히 입각할 필요는 없지만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74 소닉
    작성일
    03.10.13 09:58
    No. 2

    제9대는 주견심 연호는 성화(成化) 시호는 헌종(憲宗)입니다. 귀빈민씨와 환관내시들에게 빠져서 헤롱거린 나머지 정치를 망쳣다고 합니다.23년동안 한게없어서 그것박에 기록이 없습니다.한심한 놈입니다.

    제15대는 주상락 시호는 광종(光宗) 연호는 태창(泰昌)입니다 황제에 오르고나서 한달만에 죽습니다.

    10대 무종(武宗) 때의 유근(劉瑾)은 내행창(內行廠)이란 것을 새로 설치함으로써 동창 ·서창과 함께 3창이라 불렸다더군요 ^^;;그리고 16세기 말 서창이 내창(內廠)으로 부활되고, 동창은 외창(外廠)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4 소닉
    작성일
    03.10.13 10:03
    No. 3

    아 그리고 13대는 이름은 주재후 시호는 목종(穆宗) 연호는 융경(隆慶)으로 북방 이민족의 지도자인 알단칸과의 화의를맺어 일단 북로즉 북방오랑캐들의 남침을 막는데는 성공했습니다.뭐 그거말고는 별다른 업적은 없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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