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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의 왕조

작성자
暗影 ▦
작성
02.12.12 13:13
조회
1,391

누르하치 奴兒哈赤(노아합적) (Nurhachi) [1559~1626.9.30]

  성 아이신줴뤄[愛新覺羅]. 시호 처음에는 무황제(武皇帝), 나중에는 고황제(高皇帝).

  묘호 태조(太祖). 만주의 푸순[撫順] 동쪽 훈허강[渾河], 싱징[興京] 분지의 한 곳에

  위치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의 한 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1583년 처음으로 독립을

  위한 군사를 일으켜 수 년 사이에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1587년 쑤쯔허[蘇子河] 상류에

  최초의 성(城)인 싱징라오청(興京老城)을 구축하였다.

  명에 대해서는 공손한 태도를 취하여 1589년 명으로부터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임명되

  었으며, 1595년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1599년에 해서여진(海西女眞)

  의 하다[哈達]를 멸망시키고, 이어 1607년에는 후이파[輝發], 1613년에는 우라[烏拉]

  등을 병합하여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고, 1616년 한(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였다.

  그 동안 여진문자를 발명하고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였으며,

  도성을 혁도아랍(赫圖阿拉)으로 옮겼다.

  후금의 성립은 명에 커다란 위협이 되어 마침내 명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1618년에 명의

  푸순[撫順]을 급습하여 취하고, 이어 칭허[淸河]를 공략하여 빼앗았다. 1619년에는 명과

  일대 결전을 각오하여 진격, 푸순 관외의 사르프전투에서 명군 10만을 격멸하여 대승하

  였고, 1621년에는 랴오둥[遠東]을 공략하여 랴오허강[遼河] 이동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랴오양[遼陽]에 천도하였다가, 1625년에 다시 선양[瀋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1626년에

  명의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였으나 명장 원숭환(袁崇煥)의 고수로 실패, 부상만 입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 해 4월 몽고의 파림(巴林)부를 직접 공략하다가,

  도중 9월에 병사하였다. 그가 확립한 청조(淸朝)의 기초 위에 그의 아들들이 그 대업을

  완수하였다.

태종 太宗 [1592~1643]

  제2대 황제(재위 1626∼1643).

  이름 홍타이지[皇太極]. 시호 문황제(文皇帝). 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여덟째 아들.

  4대왕(四大王)의 한 사람인 두이치 베이레[四貝勒]라 불렸다. 너그럽고 어질며 도량이

  커서 중망(衆望)을 얻고 있었으므로, 1626년 태조가 죽자 후금국(後金國)의 칸[汗]으로

  즉위하고 이듬해 천총(天聰)이라 개원(改元)하였다. 즉위 당시에는 명(明)나라와 교전

  상태에 있었으므로 국사다난하였으나, 만주인과 한인(漢人) 관계 등 국내의 융화를 꾀한

  뒤 외정에 나섰다.

  1635년 내몽골을 평정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옥새를 얻은 것을 계기로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치고, 숭덕(崇德)이라 개원하였다. 1637년에는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에 복종하지 않는 조선을 침공하였으며, 중국 본토에도 종종 침입하였으나, 중국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그는 문관(文館) ·육부(六部)의 설치 등 조직정비에

  힘썼고, 청나라의 기초확립에 공적이 컸다. 선양[瀋陽] 북릉에 묻혔다.

순치제 順治帝 [1638~1661]

  제3대 황제(재위 1643∼1661).

  묘호 세조(世祖). 휘 복림(福臨). 시호 장황제(章皇帝). 태종(太宗)의 제9자. 연호를

  순치로 정하였으므로 순치제라 한다. 태종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자 제왕회의(諸王會議)

  에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는 겨우 6세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최대 실력자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누르하치의 제14자]과 정친왕(鄭親王) 지르하란[濟爾哈朗:

  누르하치의 동생인 슈르가치의 제6자]이 보정왕(輔政王)이 되었다. 1644년 북경에 입성하여

  중국 지배의 막을 열었는데 이는 거의 도르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653년 도르곤이  

  사망하자 친정을 펴고 도르곤을 추벌(追罰)하였다. 그와 동시에 제왕(諸王)의 6부 관리를

  금지시키는 등 제왕의 세력억제를 꾀하였다. 1659년 영명왕(永明王)을 윈난[雲南]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明)나라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였다. 다만 한인공신(漢人功臣)

  오삼계(吳三桂) 등 이른바 3번(三藩) 세력이 문제가 되었으나 이의 해결은 다음 강희제(康熙帝)의

  대(代)로 넘어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정치체제를 계승하고 한인을 등용하였으며, 명나라

  말기의 폐정(弊政)을 바로잡아 인심의 안정에 힘을 기울여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강희제 康熙帝 [1654.5.4~1722.12.20]

  제4대 황제(재위 1661∼1722).

  이름 현엽(玄燁/玄曄). 시호 인황제(仁皇帝). 묘호 성조(聖祖). 연호 강희.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로,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다. 순치제의 유명(遺命)으로 8세 때 즉위하고,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청나라의

  지배는 그의 재위기간에 완성되었으며, 다음의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로 계승되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의 유조(遺詔)로 4명의 만주 기인(旗人)이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되어 집정(執政)의 임무를 맡았으나, 1669년부터 실질적인 친정이 되었다.

  당시 명(明)나라의 마지막 세력이었던 계왕(桂王)은 이미 멸망하고, 반청세력이었던 정성공(鄭成功)도

  사망하여 중국의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정(平定)을 맡았던 윈난〔雲南〕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광둥〔廣東〕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푸젠〔福建〕의

  정남왕(靖南王) 경계무(耿繼茂)와 그 아들 정충(情忠)의 삼번왕(三藩王)은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독립정권을 유지하며 청나라를 위협하였다.  

  1673년 평남왕의 철번(撤藩)을 계기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단호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1681년

  평정에 성공하였으며, 대만의 정씨(鄭氏)도 내분으로 1683년에 멸망함으로써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지배가 완성되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이에 소비되던 방대한 비용이 필요없게

  되어 국가재정은 여유가 생겨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50년간의 면세 총액이 1억 냥(兩)을

  넘었으며, 1712년에는 인두세(人頭稅)를 정액화하고, 조운(漕運)을 정비하며, 황허강[黃河江]의

  치수(治水)에 힘쓰는 등 내정상으로도 안정된 시대를 이루었다.  

  외정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위하기 위하여 아이훈성[愛琿城]을 구축하고 1689년 유리한

  조건으로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었다. 1690년에는 외몽골[外蒙古] 준가르부[準恩爾部]의 갈단[恩爾丹]을

  토벌하고, 1691년에는 칼카부를 평정하였으며, 1696년에는 차오모드[昭莫多]에서 갈단군[恩爾丹軍]을

  괴멸시키고, 1697년에 갈단을 자살하게 만듦으로써 외몽골을 판도 안에 집어넣었다. 그 후 갈단을

  계승한 체왕아라푸탄[策妄阿拉布坦]이 티베트에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되자 1718년부터 티베트에

  원정하여 그 지배권을 빼앗고,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대하였다.

  국내외 정치에서의 성공은 문화에도 반영되어 중국 최대의 유서(類書)인 《고금도서집성》의

  편찬과 《강희자전》의 출판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도입하게 하였으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위도(緯度)를

  적은 정밀한 지도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작성시키는 등 문화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겪고, 황태자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1722년 11월 14일 병사하였다.

옹정제 雍正帝 [1678.12.13~1735.10.8]

  제5대 황제(재위 1722∼1735).

  성명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胤彿). 묘호 세종(世宗). 시호 헌제(憲帝). 재위 연호에 따라 옹정제라

  부른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다. 강희제 말기에 이르러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하였으므로, 즉위 후 동생인 윤사(允祀) ·윤당(允卄) 등을 물리쳐 서민으로 삼고, 권신인

  연갱요(年羹堯) ·융과다(隆科多) 등을 숙청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중앙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혀 잘 처리되지 못하였으므로,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마음을 써서,

  지방대관에게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주필(朱筆)로 주비(褓批: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 ·

  훈계를 내렸다. 뒤에 이것을 편찬한 것이 《옹정주비유지(雍正褓批諭旨)》이다.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하였다. 또 학교에

  《성유광훈(聖諭廣訓)》이라는 교육칙어를 배포하여 시험 때에 베끼도록 하고, 지방에 남은 천민의

  호적을 제거하여 양민으로 만들었다.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광시[廣西]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苗族]이 토사(土司) 밑에서 반독립의 상태에 있는 것을 철폐하였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內地化)를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칭하이[淸海] ·티베트의 동란을 평정,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건륭제 乾隆帝 [1711.9.25~1799.2.7]

  제6대 황제(재위 1735∼95) 와! 60년...

  이름 홍력(弘曆). 시호 순황제(純皇帝). 묘호 고종(高宗).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로, 모후는

  유호록(쐤祜祿: 弘毅公額亦都의 曾孫女)이고 황후는 부찰(富察: 察哈爾總管李榮保의 딸)이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었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다. 조부 강희제(康熙帝)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

  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조부 때부터의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난숙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민중을 계도하고, 만인(滿人) ·한인(漢人) 간의 반목을

  막고, 붕당의 싸움과 황족의 결당을 금하는 등 내치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중가르 평정 2회

  (1754 ·1757), 위구르 평정(1759), 대금천(大金川) 평정(1749), 대 ·소금천(大小金川) 평정(1776),

  타이완(1788) ·미얀마(1778) ·베트남(1789) ·네팔(1790 ·1792) 등의 원정과 평정 등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또 조부 강희제를 본떠 남순(南巡) 6회,

  동순(東巡) 5회, 서순(西巡) 4회의 내지 순회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외정(外征)과 내순(內巡),

  천수연(千戒宴) 등의 사치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만년에는 쇠운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도 그가

  총애하던 화신(和筌)의 전횡과 관리의 독직(瀆職), 만주인 ·무관들의 타락 등이

  1796년 백련교(白蓮敎)의 난 때 표면화되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1795년 가경제(嘉慶帝)에게 양위했다.

  문화적으로는 그의 개인적 자질이 풍부하여 절정에 달했으며, 예수교 전도사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 ·기술이 전래되고, 중국이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제적 교통이 열렸다. 한편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편집되고 《명사(明史)》가 완성되는 등 수사사업(修史事業)도

  활발하였다.

가경제 嘉慶帝 [1760~1820]

  제7대 황제(재위 1796~1820).

  이름은 영염(永琰)이었으나 후에 옹염(勒琰)으로 고쳤다. 묘호(廟號)는 인종(仁宗). 건륭제(乾隆帝)의

  열다섯째 아들이다. 건륭제 생존 중인 1796년 선양(禪讓)을 받아 즉위하였으나 태상황제(太上皇帝)가

  된 건륭제가 실질적으로 통치하였고, 1799년 태상황제의 사망으로 친정(親政)을 폈다. 친정 즉시

  권세를 부리던 건륭제의 총신(寵臣) 화신(和筌)을 자살하게 하고 후베이[湖北] ·쓰촨[四川] ·

  산시[陝西] 지방을 소란하게 하던 백련교(白蓮敎)의 난에 직접 대처하였다. 1802년경 난이 평정되었으나,

  광둥[廣東] ·푸젠[福建] ·저장[浙江] 등 남동해안에서 채견(蔡牽)을 중심으로 한 난이 일어났고,

  1713년 천리교(天理敎)의 난이 일어났으며, 그 중 1부대가 북경의 궁성에 난입하였다. 또 회족(回族) ·

  먀오족[苗族] 등의 반란이 일어났고, 한편 외국세력도 아편을 들여오는 등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경제의 치세는 청나라가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전환의 시대였다.

선종 宣宗 [1782~1850]

  제8대 황제(재위 1820~1831).

  휘는 민녕(旻寧). 연호에 의해 도광제(道光帝)라고도 일컬어진다. 인종(仁宗)의 둘째 아들로,

  1820년에 즉위하였다. 그 무렵은 서양 자본주의국의 외압(外壓)이 두드러져 국내가 어지러웠으나,

  그는 치세(治世)에 힘썼다. 이슬람 교도의 반란(1825∼1828)을 진압하고 재정에 힘썼으나,

  1839년에 아편전쟁이 일어나자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이 맺어지고,

  서양의 힘은 청나라의 조정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내정(內政)에 있어 조운(漕運)의 폐해(弊害)와  

  지방관리(地方官吏)의 쇄신, 소금의 사매(私賣)를 금하여 재원(財源)을 지키는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정치체제는 허물어져, 1850년 그가 죽은 뒤 반 년도 안 되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일어났다.

  시문(詩文)에 조예가 깊어, 《양정서옥전집(養正書屋全集)》 40권을 비롯한 많은 시문집을 남겼다.

함풍제 咸豊帝 [1831~1861]

제9대 황제(재위 1850~1861).

  시호 현황제(顯皇帝). 묘호 문종(文宗). 도광제(道光帝)의 제4자. 즉위 직후에 홍수전(洪秀全)이

  광시[廣西]에서 거병하여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선언하였고, 이어 염당(捻黨)의 반란, 나아가 북방에서

  러시아의 진출이 시작되는 등 나라 안팎으로 다사다난하였다. 1853년 태평천국군이 난징[南京]을

  점령하였으나, 만주인 관료는 당파싸움 등 이기적 행위에 몰두하여 무력 또한 약체화되었다. 이에

  대영단으로 만주인을 물리치고 증국번(曾國藩) ·쭤충탕[左宗棠] 등의 젊은 한인관료를 기용하는

  등 치정에 애썼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 중인 1856년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무력진출을

  개시하여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었는데, 다시 1860년에는 동 조약의 비준문제로 분쟁이 일어

  영국 ·프랑스군이 베이징[北京]에 칩입하자 러허[熱河]의 이궁으로 피난, 다음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제(帝)를 대신하여 동생 공친왕(恭親王)이 교섭을 맡아 톈진조약의 비준 ·교환과 베이징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때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史務衙門)이 개설되어 영국 ·프랑스 ·러시아 ·

  미국의 공사가 베이징에 상주하게 되면서, 구미 세력의 중국 진출이 강화되었다.

동치제 同治帝 [1856~1874]

  제10대 황제(1861~1874).

  이름 재순(載淳). 시호 의황제(毅皇帝). 묘호 목종(穆宗). 9대 함풍제(咸豊帝)의 독자로서 어머니는

  서태후(西太后)이다. 유조(遺詔)에 따라 5세에 즉위하였으나 18세 때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다.

  재위기간은 처음에는 동태후(東太后) ·서태후 두 여인에 의해서, 후에는 서태후에게 실권이 장악된

  채 통치되었다. 1873년에 섭정이 시작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서태후에 의해 집정되었으며, 실제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과 이슬람교도의

  반란 등이 평정되고, 서양의 과학문명을 받아들여 자강(自强)의 촉진을 도모하는 등 내치 ·외교

  상의 안정이 회복되고 공친왕(恭親王)이나 한인(漢人) 관료 밑에 국세가 일시적으로 만회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 칭한다.  

동태후 東太后 [1837~1881]

  함풍제(咸豊帝: 文宗)의 황후.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라고도 한다. 제10대 황제인 동치제(同治帝: 穆宗)가 5세의 나이로 제위에

  오르자, 동치제의 생모이며 역시 함풍제의 비인 서태후(西太后)와 함께 섭정이 되어 정치를 돌보았다.

  후에 서태후와 사이가 나빠졌고 그래서 서태후에 의하여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서태후 西太后 [1835~1908]

  함풍제의 후궁이며, 동치제의 생모인 자희황태후.

  함풍제의 사후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공친왕(恭親王)과 공모하여 쿠데타로 반대파를 일소하고

  모후(母后)로서 동태후(東太后: 함풍제의 황후로 安皇太后라고도 한다)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1875년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3세의 아들을 옹립,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켜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국정의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1898년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에 접근, 신정을 실시[戊戌變法]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켰다. 의화단(義和團)의 반(反)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西安: 陝西省]으로 피신하였다.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베이징[北京] 귀환 후에는 입헌 준비, 실업(實業), 교육의

  진흥 등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배외정책에서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청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 ·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 하루 뒤에 죽었다.

공친왕 恭親王 [1832.1.11~1898.5]

  이름 혁흔(奕園). 호 낙도주인(樂道主人). 도광제(道光帝)의 여섯째 아들. 함풍제(咸豊帝)의 동생.

  함풍제 즉위 뒤 공친왕에 봉해졌다.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北京]에 육박하여 함풍제가

  러허[熱河]로 피난하자, 연합군과 절충하여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고 외교전담관서인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하여 열강과의 화친을 꾀하였다.

  1861년 함풍제가 죽고 6세의 동치제(同治帝)가 즉위하자 동태후·서태후와 연합하여 쿠데타를 단행,

  동치제의 측근인 이친왕(怡親王) 등을 제거하고, 동태후·서태후의 섭정 아래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에

  임명되었다. 또 군기처(軍機處)·총리아문의 대신으로 내치·외교의 최고권력을 장악하고, 증국번(曾國藩)

  등을 채용하여 태평천국의 난 등 여러 내란을 진압하고 전통적 체제를 회복하여 ‘동치중흥(同治中興)’

  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외에 평화가 회복되자 서태후로부터 경원되어, 1865년 의정당대신에서 물러나고 1884년에는 일체의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군기처대신이 되어 전쟁을 치르고 전후의 정국(政國)을

  지도하였다. 시(詩)에 능하여 《낙도당시집(樂道堂詩集)》 《화금음(華錦吟)》 등을 남겼다.  

광서제 光緖帝 [1871~1908]

  제11대 황제(재위 1874∼1908).

  휘 재첨(載雋). 묘호 덕종(德宗). 시호 경황제(景皇帝). 도광제(道光帝)의 제7자 순현친왕(醇賢親王)

  혁현(奕辰)의 아들. 청나라 말기의 격동기에 비극적인 운명을 겪은 황제로, 사실상의 정권은

  서태후(西太后)가 장악하여 평생 동안 서태후의 전횡(專橫)에 시달렸다. 치세하는 동안 이리사건(伊犁事件)

  및 청 ·불전쟁, 청 ·일전쟁 등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서구열강과의 관계로 가장 다사다난한 시대였다.

  깊어만 가는 청나라의 고민과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의

  주장대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본받은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받아들여,

  1898년 무술(戊戌)변법을 시작하였다.

  이 개혁은 당시의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 세력의

  쿠데타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변법파의 캉유웨이 등은 해외로 망명하고, 황제는 궁중에 유폐되었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운동이 일어나 열강의 군대가 베이징에 입성하자, 황제는 서태후와 함께

  시안[西安]으로 피하였는데, 그러한 탈출의 혼란을 틈타서 서태후는 황제가 사랑한 진비(珍妃)를 죽였다.

  1901년 화약(和約)이 성립되어 베이징으로 귀환하였다. 그 뒤에도 유폐생활을 하다가 1908년에 죽었고,

  다음 날 서태후도 갑자기 죽었다.

**************************

강희건륭시대를 넘어서면서 급격히 쇠퇴하는 청국을 보면...

남의 얘기같지만은 않군요...

힘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렵게 얻은 것이 세월이 지나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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