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녕 최씨를 명문문가가 될 수 있었던 반석 최 항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조선 초기 훈구파의 대학자로서 세조를 도와 문물제도 정비에 큰 역할을 했다. 집현전 부수찬으로 정인지,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집현전 교리(校理)로 오례(五禮)를 찬진했고, 집현전 응교(應敎)로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했다. 역사, 언어, 문장에 능통하여 당대의 팔문장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썼다. 시문에도 능통하여 궁중종묘제례약의 악장가사까지도 작사하였다. 당시의 임금은 그를 보고 "선생은 도덕이 높고 박학다식하며, 천품이 어질고, 겸손하여 항상 몸가짐은 공손히 하고 말이 적었으며, 언제나 신중하여 삼사일언, 삼사일행을 실천하였다."라고 하였고 효행역시 뛰어나 세조4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중에 있었는데, 그 다음해인 1459년 임금님께서 기복을 명하였으나, 그 명령이 자식된 도리는 물론 조정의 기강에도 벗어나는 일로 옳지 못하므로 응할 수 없다는 진심어린 글을 3회에 걸쳐 왕에게 상서한 내용 '기복불응상서문'이 조선왕족실록에 기록되 있으며 또한 항(恒)은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공을세워 정난일등공신으로 책록되어 도승지에 올랐고, 형조, 공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이조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거쳐 두 차례나 영의정에 올랐다. 근면 성실하고 겸손을 바탕으로 한 그의 성품으로 40년 동안 벼슬길에 있으면서 한 번도 탄핵을 받거나 외직으로 물러난 적이 없었으며, 저서로는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를 남겼다. 광해군때 어우당 류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항(恒)이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 할 무렵 세종이 꿈을 꾸었다. 꿈 속에 한 마리의 큰 용이 성균관 서편 잣나무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깨어나 사람을 시켜 가보게 했더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 아래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윽고 과거를 보고 장원급제한 사람을 찾아보니 다름아닌 바로 그 선비였으며 훗날 명신이며 대학자가 된 태허정(太虛亭) 최 항(崔 恒)이었다.
그로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백(壯元柏)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예조참의를 지낸 영린(永潾)과 좌찬성을 지낸 영호(永灝)는 항의 아들로 가문을 더욱더 빛냈다. 항의 증손이자 전첨을 지낸 수진(秀珍)의 아들인 흥원(興原)은 1555년 진사가 되어 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장령, 정언, 집의, 사간, 동래부사를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찰사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 좌의정에 승진하여 영의정에 기용되었다. 영평부원군에 봉해졌고 죽은뒤 호성공신 2등에 추록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상중(尙重)의 아들인 연은 예조좌랑, 장령, 응교, 집의, 사간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에 올라 한성부 좌윤을 지냈고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연의 동생 온은 1609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다가 1653년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행(荇)의 손자이며 휘지(徽之)의 아들인 계옹(啓翁)과 시옹(是翁) 형제는 삭녕최씨 가문을 문(文)의 가문으로 더욱 빛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로서 실학파의 거두이며 한국 사상사에 중요한 업적을 이룩한 한기(漢綺)는 항의 14세손이다. 1825년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였고,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철학적 기반을 확립했고, 교육사상에 있어서 직업교육을 제창했다. 성리학의 배타적이고 고루한 입장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이론을 전개한 점에 있어서 한국 사상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또한 삭녕 최씨 가문을 빛내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조선을 주제로한다면 꽤 중요할거 같아서요 ㅎ
자랑스러운 가문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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