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무협 작가들이 그런건 아니지만 몇몇 무협지를 통해 느꼈던 것은(모든 무협지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공감하던 무협지도 있었으니까요.) 밑도 끝도 없는 한족 찬양과 변방족의 모독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역사에 관심이 조금 있다보니 그런 시각을 가지고 보았을지도 모릅니다만 저에게 가장 거북한 인상을 주던 한 무협지를 살짝 소개하자면 이런 식이었습니다.
"주인공은 한족이다. 그래서 코가 오똑하고 눈이 크며 피부가 눈결처럼 하얗다."...........주인공이 한족이라는 것과 "코가 오똑"하고 "눈이 크"며 "피부가 눈결처럼 하얗"다는 것과는 대체 무슨 상관 점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더군요.
물론 소설 하나를 가지고 모든 무협지를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무협지 중에 상당량이 이런 식의 밑도 끝도 없는 밀어주기 식의 표현이 많았다는 겁니다. "한족이니까"란 하나의 이유로 말이죠.
그에 반해서 가장 흔하게 언급되던 이민족이 거란, 묘족 등이었던 것 같은데 이들에겐 "족" 앞에 뭐가 붙던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더군요. 그저 그들이 한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언가 항상 부족하고 이상한 이들로 묘사되더란 말입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생활했고 심지어 자신들만의 왕조까지 만들었을 그 옛날 시기에 말이죠.
무슨 한족에게 매인 노예 민족들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어느 일정 지역은 거의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악마"에 가깝게 묘사되기도 하던데요. 대체 그 굳어진 편견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제가 듣기론 오히려 그 말이 왜 생겼나 싶을 만큼 그들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었다고 하던데.........그냥 이건 무협지니까 그렇게 알아. 하는 식은.......글쎄요........
"이건 너무 중화사상이 심하다 싶을 만큼 진한데?"하던 느낌을 옛날 고등학생이던 시절 느꼈을 정도라면 없지 않아 있었던게 아닐까요?(일부의 이야기긴 합니다만 그런 분들이 있었더란 거죠^^;)
주변 민족은 오랑케 혹은 야만인.
그리고 파괴와 반인륜적인 범죄만 저지르는 X들.
기타등등.
아무튼 정의는 한족들에게서만 나오고 그외의 것들은 가끔 인간적인 놈이 한두놈 있고 전부 때려 죽여도 시원찮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묘사되는게 한국무협의 현주소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이 문화가 깊고 역사가 오래되었는데도 말이죠.
대륙은 여러 민족들의 왕조가 명멸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아주 일부의 소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무협들은 한족만이 판치는 세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족 자체가 허구의 종족인데도 불구하고...
출처 : Network of Corea history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 글의 전문을 옮겨보겠다.
"552년 9월 고구려 평양에 북제의 황제 고양이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그는 박릉(博陵) 출신 최유(崔柳)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17세였던 양원왕은 그가 고구려에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왕은 북제 사신 최유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최유의 눈에 핏줄이 섰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왕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도 모자라 주먹을 불끈 쥐고 거리낌없이 왕에게 다가갔다. 퍽!하고 소리가 났다. 왕이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 더욱 기이한 장면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왕이 최유의 주먹에 맞아 용상에서 떨어졌는데도 누구 하나 그 불경한 사신을 제재하지 않았다. 대전에 있던 모든 고구려의 신하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감히 꼼짝하지도 못한 채 사죄를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왕을 바라보는 신하들의 심정을 일상적으로 보여준다. 도리어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사과를 했다. 그리고 왕을 폭행한 사신이 요구한대로 과거 북위에서 넘어온 유민 5천 호를 되돌려줬다. "
이 글은 『북사』 열전 고구려전의 '천보3년 ( 552 = 양원왕 8년) 북제 문선왕이 박릉 최유를 보내 위나라 말년에 고구려로 흘러 들어간 백성의 송환을 요구토록 하였는데 고구려가 불응하자 주먹으로 양원왕을 쳐서 쓰러졌고 고구려 신하들은 겁을 집어먹고 항의조차 못하였으며 5천호의 인구를 돌려주었다'는 기록을 서영교 선생이 자신의 저서 『고구려 전쟁의 나라』에 상황분석을 한 글이다.
서영교 선생은 이 사건을 사실이라 단정지었고, 북제의 황제 고양, 즉 문선제가 동아시아 최고의 군주이며, 양원 태왕(545~559)은 외가에 의해 옹립된 임금인 만큼 나약한 군주라 폄하하고 있다.
일단 상식적으로 볼 때 과연 타국의 사신이 타국의 임금을 폭행할 수 있었을까?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노태돈 교수님께서는 북제의 최유의 행위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것이라서 그 부분의 과장이나 허세뿐 아니라 사건 전체의 신빙성을 의심스럽게 한다고 하였고, 고구려 연구가인 김용만 선생 역시 자신의 저서 『고구려의 발견』에서 『북사』의 기록은 사건 자체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았다.
『북사』의 위 기록에 대해 사료조작이라 보인다. 일단 『북사』는 당나라 시대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사서다. 일단 북사가 당나라 때 편찬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당이 어떤 나라인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며 고구려에 적대적인 나라였다. 그런 당나라가 편찬한 사서이니 『북사』의 위 기록은 거짓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북제의 국력이나 상황으로 보았을 때도 북제 사신이 고구려 임금을 폭행할 수는 없었다. 당시 북제는 북으로는 돌궐의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고, 서쪽으로는 서위-북주(서위의 뒤를 이은 국가)의 압력을 받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유가 과연 고구려 임금을 폭행할 수 있었을까? 서영교 선생은 『북사』라는 사료의 '텍스트 비판' 없이 『북사』의 기록을 무조건적인 사실로 믿어 사료에 대한 비판 작업 없이 위의 글과 같은 오류를 범한게 아닌가 싶다.
비록 고구려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다고 해도(안장왕의 피살, 안원왕 사후 세군과 녹군의 혈전, 양원왕 시기 환도성주 간주리의 모반) 고구려는 남북조 시대 강국 북위도 어쩌지 못한 강국이었다. 고구려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나면 북위에서 고구려 사신의 배열을 남조 다음 2순위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의 『북사』기사가 거짓인 이유에 대해서는 고구려 - 돌궐 전에서 고구려가 크게 승리한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북주와 북제는 돌궐의 압력을 받는 상황이었다. 당시 돌궐의 칸은 북주와 북제를 가리켜 두 어린이라 표현하였고, 두 어린이가 효순하다고 말 한 바 있었다. 당시 돌궐의 기병대에 눌린 북주와 북제는 많은 비단을 돌궐에 바치며 평화를 구걸하고 있었다. 이런 돌궐을 격파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그런 고구려를 북제 그것도 일개 사신이 와서 행패를 부릴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또 의문이 든다. 고구려와 돌궐은 왜 싸웠고, 싸움의 경과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양원왕) 7년 가을 9월, 돌궐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에 관련된 추가적인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길은 없다.
다만 고구려와 돌궐의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동로마의 역사학자 시모카테스의 저술이 참고가 된다고 본다.
"유연의 잔당들이 북제로 도망을 쳤고, 북제에서 쫓긴 이들은 다시 동쪽의 무크리로 도망쳤다. 무크리는 북제에 인접해있다. 무크리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 매일의 신체 단련으로 투지가 매우 높았다"
유연은 돌궐 이전 고비사막 이북에 거주하던 서쪽은 동로마 제국, 동쪽은 대흥안령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보유한 유목세계의 지배자였다. 유연은 부족한 농산물을 얻고, 남쪽의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다. 하지만 유연의 지배 하에 있던 철을 캐며 살아가던 돌궐 부족이 힘을 키워 유연을 멸망시켰다. 그후 유연의 잔당은 위의 시모카테스가 지적한 대로 무크리로 도망쳤는데, 무크리는 우리 말로 옮기면 맥구려(貊句麗)로 이는 예맥족의 고구려를 가리킨다.
결국 돌궐과 고구려가 싸운 건 고구려가 유연의 잔당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552년 이계찰대가 이끄는 돌궐군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돌궐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그런데 『수서』 「돌궐전」에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581~582년경 돌궐의 이계찰대의 군대가 고구려와 말갈병에 크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581~582년 양국 간에 또 한 차례 큰 전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수서』 「거란전」에 "북위 시절에 거란족은 고구려에게 침략을 당하여 부락의 인구 1만여 명이 중국에 붙기를 원해 백비하까지 나왔다. 그 뒤에는 다시 돌궐에게 침략당해서 또 1만여 가구가 고구려에 붙어버렸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거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돌궐이 충돌한 듯 싶다. 양국 간의 전쟁에 말갈이 참여한 이유는 당시 말갈족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양왕 때 수나라의 요서를 선제 공격할 때 말갈병 1만을 동원한 바 있다)
아무튼 위의 고구려 - 돌궐 전쟁에서 보듯, 고구려가 돌궐을 크게 이겼는데, 돌궐에 어쩌지 못한 북제가 과연 고구려 태왕을 폭행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결국 위 기록은 당나라 측의 고의적인 왜곡 아니면, 고구려로부터 일종의 외교적 수치를 받은 북제 측의 고의적인 왜곡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참고문헌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998
김용만, 『Q&A 한국사 고대』, 청아출판사, 2008
서병국, 『고구려제국사』, 혜안, 2007
서영교, 『고구려, 전쟁의 나라』, 글 항아리, 2007
『토번(吐蕃) 장안성 함락은 약탈전인가?』
7c 초인 643년부터 계속되왔던 토번제국(吐蕃帝國)과 당 제국(唐 帝國)의 전쟁은 8c에도 역시 이어졌고 서로 밀고 밀리는 전투였다. 당 현종의 치세를 맞이한 당나라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그야말로 세계에서 당시 가장 강한 국력을 자랑하였고 이에 따라 토번은 우마이야와 함께 대항해보기도 했으나 서역의 영토를 대부분 잃는등 당나라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755년 안록산의 난을 시작으로 절도사 난이 시작되자 당은 날로 쇠퇴하였고 이에 비해 토번은 제2의 전륜성왕이자 불교의 수호자라 불리우는 치송데첸(赤松德贊,Khri-srong lDe-btsan)의 등장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토번이 당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장악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763년 토번의 장안성(長安城) 함락 사건이다. 당 제국의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을 함락한 이 사건이야 말로 토번이 당의 국력을 압도적으로 능가했다는 증거일것이다. 분명 이 사건은 토당전쟁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일뿐만 아니라 당시 토번이 당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또 토번은 이에 대해 어떤 행동을 보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일단 중국측 기록인『구당서(舊唐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구당서 권196 토번전(舊唐書 卷196 吐蕃傳)』의 763년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것이다.(전투 내용이나 세세한 내용들은 모두 생략한다.)
『구당서 권196 토번전(舊唐書 卷196 吐蕃傳)』
황제가 섬주로 옮겨 경사가 함락되자 항장 고휘가 토번을 이끌고 상도성으로 들어가 토번대장 마중화(馬重華)등과 함께 고빈왕 아들 광무왕 승굉을 황제로 세우며 대사면을 베풀고 관리를 임명하였다...(생략)...토번은 성에서 15일간 머무른뒤 퇴각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그러면 어떻게 나올까?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중요부분만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자치통감(資治通鑑)』
토번이 쳐들어와 노략질 하면서...(생략)... 겨울 10월 토번이 노략질하자 자사 고휘가 성을 들어 가지고 그들에게 항복하고...(생략)...신사일(2일) 에 봉천과 무공을 노략질 하니 경사에서는 떨면서 놀랐다....(생략)...무인일(9일) 토번이 장안에 들어가니 고휘와 토번대장 마중영 등이 옛날 빈왕인 이수례의 손자 이승굉을 세워서 황제로 삼고 연호를 고치고 백관을 두면서...(생략)...토번이 이미 광무왕 이승굉을 세우고 나자 성안에 있는 사인(士人),부녀자 백공(百工)을 악취하여 무리를 정돈하여 귀국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토번의 장안성 함락에 대해 노략질 즉 약탈이라고 표기하였다. 이외에 신당서 등 여러 사서가 있지만 내용은 위것들과 비슷하므로 이하 중국 사서들은 생략하고 이제 토번의 기록을 보도록 하자
『티베트 사료(吐蕃 史料)』
겨울에 하로(下路)의 당주(唐主,당나라 황제를 의미하며 당숙종-唐肅宗-을 말한다.)가 죽고 새 당주(唐主,당 대종-唐代宗-을 말한다.)가 즉위 한뒤 약속을 어기고 공견(貢絹)을 바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땅도 헌납하지 않아 마침내 적국이 되었다. 이에 상걔씨(尙野)와 상동첸(尙東贊)등이...(생략)...여러 성보를 공격하여 이기고 상걔씨는 번(蕃)으로 돌아갔다. 상계씨와 뢴다자루콩(論悉詻),샹동첸,샹첸파(尙贊磨)등이 군사로서 경사(장안성)을 포위하여 경사성(京師城)이 함락되고 당주가 탈출하여 도망치니 따로 새 당주를 세우고 개선하였다.
『뢴다자루콩 비문(論悉詻 碑文)』
첸포 치송데첸은...(생략)...당토의 당나라땅의 성과 보루 여러곳을 공격하여 이기니 당주 효감황제(孝感皇帝) 군신(君臣)이 매년 채증 5만단을 보내게 해달라고 빌어 당실의 조공을 폈다.(당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말) 당주의 부왕 효감황제가 죽고 태자인 당주 광평왕(廣平王)이 즉위하자 토번에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첸포가 진노하여...(생략)... 두 장수에게 명하여 경사로 진격하게 하여...(생략)...싸워 당군을 대패시킨 당주 광평왕은 경사를 버리고 나와 섬주로 도망하여 마침내 경사(장안성)를 함락시켰다.
토번이 당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킨 이 사건을 중국사서만 놓고 본다면 단순한 약탈로 이해 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일단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말하길 당시 토번이 이끌고 온 군대가 20만이라고 한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약탈전이나 벌이려 오는 국가는 없을것이다. 더욱이 티벳,중국사서의 공통된 점은 토번이 당나라 황족 이승굉(李承宏)을 황제로 세웠다는 점이다. 괴뢰정권 이라 할 수 있는 이 이승굉의 당나라는 비록 15일밖에 가지 못하였지만 관료들을 다 정할 정도였다. 이것을 볼 때 이 사건을 단순히 약탈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물론 토번이 장안성을 점거한지 얼마 안되서 장안성의 장인,유생등을 데리고 라싸로 개선한건 사실이다. 또한 이러햇기에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등 중국 역사가들은 이를 약탈전으로 본 듯 하다.
그러나 토번(吐蕃) 사료를 보면 토번은 단순히 약탈전을 벌이기 위해 진군한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첫번째로 토번은 당으로부터 약속받은 조공품을 당이 주지 않자 이를 이유로 당을 침공했음을 볼 수 있다.
두번째로 군대의 규모가 20만 대군으로서 단순히 약탈 행위가 아닌 한 국가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번째로 괴뢰정권을 세웠다는 점이다. 이 3가지 경우를 볼 때 이것은 결코 약탈전으로 보기가 어렵다. 또한 토번군은 완벽히 철수한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었다. 당시 당나라 총사령관 곽자의가 이끈 군대가 5만 이하라는 점을 볼때 토번 입장에서 20만이라는 대군을 주둔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약탈전으로 보기가 어려우며 토번이 당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일단 또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당과 토번의 입장 차이다. 당은 토번에게 난을 진압해주거나 하는 것을 조건으로 비단을 주었다고 말하는 반면 토번은 이를 조공으로 간주하였다. 『뢴다자루콩 비문(論悉詻 碑文)』내용이 대표적이다. 즉 중국측에서 숨기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을 수도 있겠다. 토번에 장암성 함락 사태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 흐름에서 토번이 당을 능가함을 증명하는 사태였으며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상황은 재편성 되었다.
http://historykr.com/bbs/view.php?id=free&no=760#760
돈으로 평화를 산 중국 ((있지도 않은 허구의 종족 한족의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 뿐이다. 하물며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왕조, 그리고 수와 당은 흉노계 선비족 왕조 기타등등))
우리는 중국하면 강대국,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국이라 생각한다. 중국은 넓은 영토, 무한한 자원, 그리고 13억이 넘는 인구를 지닌 대국이다. 하지만 중국이 과연 대단한 나라인가? 사실 중국은 넓은 땅 덩이에 비해 그리 대단한 나라는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만큼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은 나라는 없다.
한나라 유방이 중원을 통일하고 그 솟아오르는 힘으로 북방의 위협인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유방은 초한대전이전부터 각 군벌들간의 전쟁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군사적으로 북방 기마민족과는 근본적으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유방은 오만하게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흉노족은 모돈선우라는 영걸이 나타나 흉노족의 힘이 막강할 때였다.
유방의 30만 대군은 기세좋게 북방으로 진격했으나 흉노족의 포위에 걸려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포위된 유방은 온갖 뇌물을 다 바치고 앞으로 매년 엄청난 조공을 할 것이며 모돈선우를 황제나라 어버이로 모시고 유방은 신칭을 하기로 했다. 흉노족 일대의 영걸 모돈선우는 이 정전조건에 매우 만족하고 유방을 풀어 주었다.
중국 사서는 유방이 모돈선우의 신하가 된 사실을 극구 숨긴다.
그리고 바친 조공도 오랑캐에 대한 하사품이라 왜곡을 하였다.
당나라 시대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북방에서 위세를 떨친 위구르족들에 대해 중국은 갖은 선물을 다 바치고 구걸외교를 했다. 황소의 난과 같은 일대 국가위기도 위구르족의 전사들이 아니면 평정할 엄두도 못냈다.
하지만 사서는 당나라 황제가 위구르족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역사왜곡을 한다.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약체로 평가받는 송이긴 하지만...
송나라는 거란족의 요, 탕쿠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요나라에는 매년 금 20만냥과 비단 50만필을 서하에게는 금 10만냥과 차 2만근을 보내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명나라 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를 지배하다가 몰락한 몽고족의 기마대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북방에 남아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개국시조 주원장의 아들이자 명나라 최고의 영걸인 영락제가 즉위하고서는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초원에까지 명나라 군대를 진주시켰지만 바람같이 사라지는 몽고기병대를 토벌하지는 못했다.
중기에 들어오면 몽고족이 아니라 투르크계통의 오이라트족 에센 타이지가 몽고초원을 통일했다. 그들은 명나라를 위협하자 이미 나약해빠진 명나라는 이 몽고족에 대해 마시장을 열고 울며겨자먹기로 수십만 마리의 몽고말을 비싼 값에 사주었고 몽고의 사신이 오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선물을 안겼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천명까지 정원으로 하여 오라는 사신이 무려 삼천명씩이나 왔다. 명나라는 이 삼천명에게 모두 값비싼 선물을 안겼다.
말하자면 돈으로 북방의 평화와 국가안보를 산 셈이다.
그래도 명나라 입장에서 북방에 수십만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비보다 이게 훨씬 싸게 먹혔다.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몽고족 입장에서 중국을 집어삼키지 못할 바에야 목숨걸고 군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명나라를 위협하여 평화적으로 삥을 뜯는게 그 또한 구미에 맞았다.
명나라는 돈으로 명분도 얻고 북방의 국가안보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역사기록은 어떻게 되는가?
몽고의 오이하트 4부의 패자 에센이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러 오자 황제께서 사은품을 하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물자가 부족한 몽고족 입장에서야 하사품이라 하든 뭐라고 치든 재물만 두둑히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는 결국 명나라의 방대한 사서만 남았다.
몽고가 보잘 것 없으나마 조공품을 들고 황제에게 조공하러 왔을 때 천하의 주인인 황제께서 은혜로운 마음으로 변방의 오랑캐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게 실제와는 정반대인 그 날들의 황당한 중국역사이지만 글자로 남겨진 사서만이 진실이 된다.
에이 그럴 리가 있느냐고?......
이것이 진실된 역사이고 이조차 사서는 전부 엉터리로 기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명나라가 몽고족에게 한번 선물을 제대로 안주다가 서로 충돌이 일어나서 마치 코미디처럼 군사지식이 전혀 없는 조정의 실력자 왕진이라는 환관의 고집으로 몽고족에게 도전할려고 50만대군을 일으키고 그도 왕진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황제가 직접 친정을 하였다가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야전에서 생포를 당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이 것이 유명한 토목의 변이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우여곡절 끝에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는 다시는 몽고족에게 변변한 저항을 한번 하지 못하고 망할 때까지 비싼 경비를 들여 북방의 평화를 구걸하였다.
하지만 사서는 그래도 명분은 황제가 몽고족에 물품을 하사한 것으로 뻔뻔스럽게 기록을 하였다.
허풍이 심하기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중국인들의 행태가 결국은 역사상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남아있는 것은 대개 중국의 사서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고구려와의 관계도 이런 식이라 보면 된다.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은 것은 통일왕조가 들어선 수, 당 시대 때이다.
그런데 수양제나 당태종이나 왜 책봉국을 그렇게 수백만의 군사를 동원해 정벌하고자 했을까?
책봉은 외교적인 일종의 형식일 뿐 수 당을 진정으로 황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자 오만한 양제나 당태종이 분노했던 셈이다.
그러나 허풍이 세고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중국의 사서는 고구려가 마치 중국의 책봉을 받은 변방국가로 조작한 것이다. 이를보면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이 얼마나 형편없고 잘못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중국이 자랑하는 한나라 역시 우리민족에게 돈으로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예를들면 한나라는 고구려와의 경계선에 책구루를 설치하여 그 곳에 한나라의 물품을 갖다놓고, 고구려로 하여금 그 물품을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이는 한나라가 고구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린 나머지 물품을 주며 고구려의 침략을 막은 것을 마치 하사했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 6대 임금인 태조는 자주 한나라를 공격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는데 일생을 바친 임금이었다. 태조 때 하도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의 영토와 주민들을 잡아가자 한나라에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 주민을 돌려주면 어른은 비단 48필, 아이는 그 반의 값을 주겠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당나라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안시성에서 양만춘에게, 요택에서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한 후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궁과 궁복을 하사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중국측 기록도 당나라가 고구려에 크게 패해 전쟁배상금을 문 것을 거꾸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보면 중국은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갖은 침탈을 당한 나라였다. 군사력이 약해서, 그들은 돈과 물품으로 평화를 살 정도였다. 돈으로 평화를 구걸한 나라,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의 흐름이고 그들의 실체이다.
우리는 중국이라는 환상에 잡혀있지 않은가?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 던지고 역사를 다시 보자.
그러면 중국을 호령한 북방민족들의 기상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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