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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1 MadFrog
    작성일
    10.03.23 15:17
    No. 1

    김용 작가님의 소설에서는 몽고나 여진에 비교적 호의적인 내용도 있었지만... 저도 무협보면서 가끔 느끼는 부분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한배달쥬신
    작성일
    10.04.18 21:21
    No. 2

    티베트 동부 캄(Kham)지방의 제군도(Jyegundo)….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다. 모든 언론은 지난 2010년 4월 14일 발생한 이 비극적인 지진을 중국 서부 칭하이(靑海)성 위수(玉樹)현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명명하여 보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진 발생한 곳이 분명한 티베트 지역이며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티베트인이라는 것이다.

    티베트의 잊혀진 역사

    티베트는 1950년 10월 6일 중국의 침략을 받은 이래로 현재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로 남아있다. 티베트는 크게 암도(Amdo 현재 중국의 칭하이성, 간쑤성과 쓰촨성 일부 지방), 캄(Kham 현재 중국의 쓰촨성, 윈난성과 칭하이성 일부 지방), 우창(U-Tsang 현재 티베트 자치구) 세 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1965년 중국은 행정적인 이유로 우창 지역만을 티베트 자치구(TAR)로 지정하였으며, 이는 실제 티베트의 절반도 안 되는 부분이다. 이번에 지진 피해가 발생한 지역은 역사적으로 동티베트 캄지방의 일부였으며, 오래전 티베트 동부의 상업도시로서 티베트인들에게는 제군도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중국의 점령 기간에 티베트 전역에 대규모의 한족 이주가 시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다수의 주민이 티베트인인 이 지역에는 티베트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의 침공에 저항한 추시 강드룩 대원들.
    추시 강드룩은 티베트 무장독립투쟁 군으로 '네 줄기의 강과 여섯 줄기의 산맥'이라는 뜻이다. 이는 동티베트의 지리적인 특징을 의미한다.

    이 험준한 산악 지역의 사람들은 늘 용맹했으며,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캄파(Kham-pas)'와 '암도와(Amdo-wa)'(캄 지방과 암도 지방의 사람을 일컫는 말)는 중국 지배에 정면으로 맞서 저항했다. 티베트인들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라는 대다수 사람의 인식과는 반대로, '추시 강드룩(티베트 무장독립투쟁 군으로 '네 줄기의 강과 여섯 줄기의 산맥'이라는 뜻. 이는 동티베트의 지리적인 특징을 의미한다)' 전사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의 직접적인 권고로 무기를 내려놓기 전까지 중국 정부에 대항해 오랫동안 게릴라 전투를 벌여왔다. 이 전사들 대부분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거나 중국의 점령을 맞닥뜨리기보다 자살을 택했으며, 남은 사람들은 티베트를 탈출했다. 제군도를 둘러싼 역사는 정치인과 기자들에 의해 잊히거나 무시당하고 있다. 어떤 언론도 이 지역에 얽힌 잔인한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희생자 대부분이 티베트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거대한 지진 앞에 힘없이 무너진 사람들은 중국인으로 명명될 뿐이다. 하지만, 제군도에서 사망한 티베트인들은 중국인이 아닌 티베트인으로 죽을 권리가 있다.

    티베트, 중국 그리고 재난의 정치

    물론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어떠한 정치적, 역사적 논쟁도 무너진 건물 더미에 파묻혀 구조만을 기다리는 실종자들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의 고통보다 앞설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골치 아픈 정치적, 역사적 이야기를 꺼내 든 이유는 이 비극적인 재난 속에서 재난의 정치학이 발동되는 것을 경계해서다.

    우리는 종종 국가적인 재난 상황을 국민 화합과 국가 통합의 매개로 사용하는 국가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재난의 정치에 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에 앞서 이러한 정치적 선전이 제군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몇 가지 징후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많은 승려들이 티베트 불교를 '분리주의'로 보는 시각 아래서 사원에서 쫓겨나야만 했고,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군인들의 감시 아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비록 소중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힘을 합치고 있지만, 티베트와 중국 사이의 현실적인 갈등은 한 치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재난이 수습된 이후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 된 우리'라는 선전이 성행할 것이 우려된다. '지진을 계기로 갈등을 봉합하고 화합의 길로 들어섰다'는 중국 당국의 선전은 '중국이 티베트를 해방했으며, 티베트인들은 중국의 통치 아래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라는 익숙한 선전 문구처럼 모든 사람의 눈과 귀를 가려버릴지도 모른다. 티베트인들은 지난 2008년 티베트 전역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민중봉기를 통해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전 세계에 소리쳤다.

    또한 '지진이 발생하고 나서, 중국 군인들이 제군도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티베트인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 이러한 재앙이 제군도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중국에게 단순한 재난이 아닌 정치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다. 제군도를 둘러싼 캄지방은 티베트를 침공한 중국에 맞서 가장 맹렬한 저항이 벌어졌던 지역이다.

    또한, 2008년 티베트 민중봉기 당시에도 말 위에 올라탄 티베트 민중들이 중국 경찰서를 점거한 것을 비롯해 광범위한 독립 투쟁이 일어났던 곳이다. 지금 중국정부가 바라는 것은 재난으로 이성을 잃은 티베트인들에게 어떠한 정치적 언급이나 항의시위를 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 불안한 지역과 티베트를 관련짓는 어떠한 국제적인 관심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티베트인들, 제군도는 인구의 97% 이상이 티베트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징후는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몇몇 국제부 기자들이 피해 지역으로 들어갔고, 중국정부는 구조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취재를 허용했었다. 그러나 피해 지역 접근 제한은 벌써 시작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홍콩 <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 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선전부가 중국 언론들에게 지진이 일어난 제군도 지역을 제외한 주변지역 취재를 금지했다고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여진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에 외부인의 접근을 되도록 차단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미국 < 뉴요커 > 는 중국 당국이 국가가 허가하는 검색 엔진의 결과를 제한하고 지진을 '중국지진'으로, 희생자들을 '중국인'으로 명명하는 방법으로 제군도 지진이 어떻게 보도되는지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중국 당국은 지난 2008년 발생한 쓰촨(四川)성 대진진 당시 3일 만에 외국 지진 구조대를 받아들인 것과는 다르게 대만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구조대 파견 제의를 거절했다. 당국자는 '지진 피해 지역의 공간이 비교적 제한 적이며, 구호활동의 역량이 충분하다'며 외국의 구조 의료 지원과 물적 지원을 거절하고 금전적 지원만을 용인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중국으로서 가장 민감한 티베트 지역에 외국인 구조대가 파견되면 국제적으로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대한 관심을 유발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진으로 말미암은 첫 번째 비극에 이은 두 번째 비극이 시작되고 있다. 바로 진실의 죽음이다. 간단히 말해서 제군도 사람들은 중국인이 아니다. 그들은 티베트인이다. 제군도에서 사망한 티베트인들은 중국인이 아닌 티베트인으로 죽을 권리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실한 목소리를 낼 정당한 권리가 있다. 이것은 점령군에 의해 침공당한, 반세기가 넘게 자유를 박탈당하고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점령의 굴욕과 무게를 견뎌온 유목민과 승려, 농부들의 이야기이다. 제군도 사람들은 그들의 땅에서 존엄성을 지키며 죽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책임은 이 이야기의 진실을 찾아주는 것이다. 지진이 일어난 지역이 중국 칭하이 성이 아닌 점령된 티베트의 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중국발 기사들 속에서 국제 사회가 그 지역의 역사적 배경,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소평이 남긴 말 중 다음의 말이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

    등소평왈 "3000번을 거짓말하면 진실이 될 것이다!"

    고구려 유물 밀반출 조선족 2명 사형
    <a href=http://news.nate.com/view/20040108n01664 target=_blank>http://news.nate.com/view/20040108n01664</a>

    노컷뉴스 기사전송 2004-01-08 11:33

    조선족 주민 ''고구려역사 파괴대신 북에 밀반출이 나아''

    지난해 여름 중국에서 고구려 유물을 북한으로 몰래 가져가려던 조선족 주민이 적발돼 2명이 사형당하고 2명이 25년 징역형을 받았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오늘 보도했습니다.
    문제의 유물은 고구려 유적이 집중돼 있는 지린성 지안의 4호고분과 5호고분에 있던 것으로, 사건에 연루된 조선족 주민들은 "이대로 가면 우리조상인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에 의해 은폐되고 파괴되기 때문에 북한으로 반출하려 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산케이는 중국은 이 사건이 있은 후 고분 등이 있는 현장 일대를 역사적 보존지역으로 지정해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면서 중국 당국의 이런 강경한 조치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고구려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과 관련해 중국이 고구려 문제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CBS문체부 권주만기자

    후진타오가 동북공정 지시·승인”
    <a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3419 target=_blank>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3419</a>

    후진타오는 고구려사 왜곡 및 침탈을 위한 ‘동북공정’을 사실상 지시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는 중국 정부 기관의 홈페이지 및 지방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헤이허(黑河)에서 간행되는 헤이허일보는 지난 2003년 8월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제3차회의가 헤이허시에서 열린 사실을 보도하면서 “동북공정은 후진타오 동지가 2000년 중국사회과학원을 통해 비준한 사회과학 연구항목”이라고 소개했다.

    또 중국 국무원 산하 중앙문사연구관의 랴오닝성 문사연구관은 홈페이지에서 연혁을 소개하며 “쑨진이(孫進已) 연구관의 고구려 관련 연구를 지도자들이 매우 중시하고 지지했으며, 후진타오, 딩관건(丁關根·당시 공산당 선전부장), 리란칭(李嵐淸·당시 부총리), 첸치천(錢其琛·당시 외교담당 부총리), 리톄잉(李鐵映·사회과학원장) 동지 등이 모두 중요한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동북공정은 중앙 정부와 무관하다’는 중국측의 주장은 거짓말로 확인된 바 있다.

    지난 2002년부터 5년간 진행된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뿐 아니라 고조선에서 간도 문제까지 한국사 전반에 대한 문제를 다뤘고, 2004년 한국의 반발에 부딪쳐 일단 축소되는 듯 했으나 은밀히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를 침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어도가 한국 영토라는 것을 인정못한다’고 밝히며 전선을 동북아 전역으로 확대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07년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백두산이 자신들의 영토임을 강조하는 동영상을 홍보하기도 했다.

    한편, 후진타오는 지난 1989년 티베트 학살 현장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중국은 몽골이 중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몽골제국을 일으킨 칭기즈칸마저도 중국 사람이라고 교과서에 기술하는 등 몽골 역사를 크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몽골국립대학 잠미얀 바트투르(39) 교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결코 한국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면서 “중국은 역사학자들을 동원해 공공연히 ‘몽골을 되찾자.’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지난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에서 열린 국내 전문가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중국 역사학자들의 역사인식’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몽골의 중국화’를 중요한 과제로 다루고 있다. 몽골 학계에서 몽골사를 3권으로 정리해 출간하자 중국측은 곧이어 8권짜리 몽골사로 정리했고, 다시 몽골측이 5권을 발간하자 지난해 중국측은 15권을 펴내 물량공세도 서슴지 않고 있다.

    바트투르 교수는 “당시 중국 학계 및 언론은 몽골 역사의 연구중심이 중국이 됐다고 선전했다.”고 전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중국의 초·중·고 역사교과서에 ‘원나라=중국 국가’라고 기술돼...

    그러나 바트투르 교수는 “원나라를 세워 중국을 정복한 쿠빌라이칸 이후 명나라 설립 전까지 중국을 통치했다.”면서 중국의 교과서 왜곡을 비판했다.

    그는 “한 사람만으로는 가족을 이룰 수 없다.”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티베트, 카자흐스탄 등 역사왜곡 피해당사국간의 공동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9 騶漁
    작성일
    10.05.05 02:11
    No. 3

    저도 그런 면은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무협의 주 시대는 명나라가 배경으로 많으며, 중국 특유의 중화사상이 있기 때문에 여러 무협 소설에서 한족위주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족들이 자기들이 특별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거라고 봅니다.
    또한 중국은 예로부터 많은 부족들의 침입을 받았었고, 그로인해 굴욕적인 일들도 많이 가졌기에 자기들의 자존심을 위해서 '우리는 특별하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한족은 어떤 특정한 종족이 아니라 중화사상에 물들은 중국 중심의 사상을 가진 모든 민족을 한 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예로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지만, 결국 중화사상과 한족 특유의 융화력으로 여진족이 한족으로 포함되어 청나라 말기에는 따로 여진족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한족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지요.
    그렇기에 여러 소설에서 주인공이 한족이라면, 한족특유의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이 쓰는 무협에서도 한족위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을 한다면 별로인 것은 당연하겠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한배달쥬신
    작성일
    10.05.05 17:57
    No. 4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孫文, 1866~1925)이 제창한 쥐나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입니다. 그것이 공표된 것은 1905년 일본에서 쥐나혁명동맹회(中國革沒盟會)를 결성했을 때입니다. 동맹회는 창립 선언에서 ‘만주족 축출(?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 곧 만주족의 청(淸)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민권주의는 유럽식의 공화정의 확립, 민생주의는 지주의 불로 소득을 억제하는 것을 과제로 했습니다.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어떨까... 쥐나공산국이 탄생할때 모택동이 약속한게 바로 소수민족독립이었습니다.
    국민당과 전쟁중에는 쥐나가 한개성 단위로 쪼개져도 좋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모택동입니다. 그래서 쥐나공의 성립후 자치구가 등장하죠.
    쥐나에 55개 이상의 민족들이 있습니다. 쥐나정부가 크게 나눈 민족이 55개이고, 자잘한 민족은 훨씬 많습니다.
    쥐나인민공화국 탄생시 짱골라 한족 비율은 50% 미만이었습니다. 50년만에 나머지 소수민족들 4~50%가 우주로 이민갔습니까? 아니죠. 무늬만 한족입니다.
    짱골라 한족은 어떨까? 후진타오가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죠.
    " 현재 삼민주의가 대세니 뭐니하고, 자치권을 요구하는 무리가 많다. 이런 분열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
    삼민주의, 자치권을 소수민족만이 부르짖을까? 아니죠. 저기 상해, 절강성같은 잘 사는 연해 동네에서도 부르짖는 겁니다.
    자신들을 상해인이니 홍콩인이니 하면서 타지역과 다르다고 주장하죠~
    순수 짱골라들도 이러는 판국입니다. 쥐나가 제일 처음 분열하는 곳은 소수민족자치구가 아니라 홍콩, 상해, 심천, 광주 같은 잘사는 지역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하죠.

    짱골라들이 원나라, 청나라 때부터 티벳을 차지했다고 새빨간 저짓말을 하는데 정말 어이 없습니다.
    원나라는 흉노계 몽골족의 역사이고,
    금나라와 청나라(후금)은 고구려발해 후예 예맥-부여계 말갈(=여진=만주)족의 역사입니다.

    하나로 통제된 쥐나의 신화가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쥐나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사회의 저류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심각한 민족 갈등이 내재하고 있죠.
    최근 신장 위구르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소요 사태가 쥐나의 위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류를 형성하는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쥐나는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현재 명목적으로, 한족으로 분류되는 남부의 광둥(廣東)과 푸젠(福建)성, 하카(客家)족을 위시해 쥐나는 최근 들어 소수계들의 인종과 문화가 부각되고 있으며 정치적 환경과 경기침체로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2009년 6월 광둥의 장난감 공장에서 두 명의 위구르 노동자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조성된 신장 위구르의 불안은 7월 5일 156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최악의 소요 사태로 확대됐죠.
    쥐나 당국은 무슬림계를 비롯, 소수 민족이 외부의 지원을 받아 분리되는 소위 ‘코소보 효과’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쥐나의 민족갈등은 ‘공식적인’ 소수민족들만이 아닌 문제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죠. 쓰촨(四川)성과 광둥성, 상하이, 후난(湖南)성 사람들이 문화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중앙정부의 통제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요즘 쥐나의 분열 양상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2009년 7월 뉴욕타임스는 1면에 신장 위구르 소요 사태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한족 부부의 사진을 싣고 쥐나 정부가 정책적으로 이 지역에 이주시킨 한족의 비율이 지난 수십 년간 40%대가 됐다며 토박이 위구르인들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월 스트리트 저널(WSJ)은 ‘쥐나의 인종 분열’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구소련이 인종적 민족적 차이로 인해 분리됐듯이 쥐나도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G8정상회의 도중 급거 귀국한데서 드러났듯 이번 충돌로 인해 쥐나 공산당은 오는 2009년 10월 야심차게 준비한 60년의 ‘조화로운 리더십’ 행사가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향후 민족 분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죠.
    200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쥐나의 55개 소수민족은 총 1억400만 명으로 전체의 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92%의 점유율을 보이는 한(漢)족은 베이징 북쪽 일대부터 남쪽의 광둥성에 이르는 지역에 대부분 거주합니다. 사실 92% 한족이란 것도 실제로는 허구라는 것이 유전분석으로 밝혀졌죠.
    쥐나는 그동안 중앙정부 차원에서 겉으로는 소수계의 문화와 경제 개발을 지원해 왔습니다. 청나라 말기인 1911년 국민당 지도자 쑨원(孫文)은 쥐나가 국가적 민족으로 통합되지 않아 강성대국이 되지 않았다면서 ‘삼민주의’를 주창했죠. 그는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족, 그리고 위구르와 카자흐가 포함된 후이족 등 이른바 ‘중국의 다섯 사람들’을 내세웠습니다.
    쥐나는 역사적으로 남북으로 나뉘어 통치됐고 5개의 왕국으로 분리됐습니다. 몽골과 돌궐, 티베트는 쥐나 한족의 마지막 왕조인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만 해도 지금보다 영토가 3배나 넓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소수계들의 언어적,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같은 민족인 허구의 한족만 해도 만다린과 우, 웨, 시앙, 하카, 간, 남부 민, 북부 민 등 8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웨(越)족 사람들의 대화를 광둥 사람들은 극히 일부만 이해할 수 있고 광저우와 창저우, 샤먼 방언끼리는 대화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쥐나 언어학자인 Y.R. 차오 씨는 “광둥어와 만다린어는 영어와 화란어 혹은 불어와 이탈리아어만큼 다르다”고 비유했습니다.

    만다린어는 20세기 초에 쥐나의 표준어 지위를 획득했고 국제어 대접을 받지만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처럼 쥐나 내 학교에서 만다린어 교육을 시켜야 하고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다른 언어들이 쓰이고 있죠.
    쥐나의 소수계는 인구 비율은 낮지만 영토 비율은 근 60%에 이르며 소수계 인구의 90% 이상이 신장과 티베트, 내몽고, 윈난(雲南) 성 지역에 몰려 있습니다. 신장은 쥐나의 6분의 1에 달하고 티베트는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한족을 이주시키는 정책에 따라 이들 지역의 한족 비율은 1982년 10%(6700만 명)에서 불과 8년 만에 35%(9100만 명)로 높아졌습니다. 3개의 자치구를 갖고 있지만 한족의 소수계로 편입시킨 만주족은 같은 기간 430만 명에서 128% 증가한 980만 명이 됐습니다.
    구이저우(貴州)성의 거라오족은 8년 만에 714%라는 믿기 힘든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높은 출산율 외에도 출신 민족을 한족에서 바꾼 결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다른 종족 간 결혼을 할 경우 이들 자녀의 등록민족 신고는 만 18세에 결정할 수 있죠.
    이 같은 증가는 형식상일 지라도 소수계에 대한 상대적인 특혜 덕분이라 할 수도 있겠죠(?). 쥐나 당국이 인구 억제를 위해 강력 추진한 한 자녀 정책을 소수계는 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적용받지 않고 세제 혜택과 이중언어 사용을 통한 공직 기회의 확대, 토착 종교, 문화 활동 보장 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식적이라 할 지라도...
    이런 이유로 쥐나에서 몽골족의 양고기 스프와 무슬림의 국수, 조선족의 바비큐가 쥐나 어느 도시에서나 맛볼 수 있을 만큼 퍼져 있죠. 또한 소수계의 의복과 문화 예술이 쥐나 일반 가정에까지 확산되고 있?니다. 현재 베이징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 중의 하나는 티베트식 체인점 ‘마케-아미’죠. 이곳에 가면 부유층이 티베트의 전통 음악과 공연을 감상하면서 미모의 여종업원의 시중을 받으며 양고기 바비큐인 ‘야크 카봅’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이룬 남부 사람들은 문화적 정치적 차별성을 내세우고 있죠. 코미디언들은 상하이 말투와 스타일로 교양과 사업 안목이 부족한 북부 사람들을 조롱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베이징 사람이 상하이에서 물건을 살 때 만다린어로 말하면 값을 깎기도 어려울 뿐더러 바가지를 쓰기 일쑤입니다. 날로 높아지는 광둥성 사람들의 자각은 하카족과 남부 푸젠민, 산터우 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지역의 경제 발전과 북쪽 사람들로부터 당한 오랜 구속에 대한 반감은 공통적인 현상이죠.

    이들 남부 사람들은 자신들을 전통적으로 한족이 아니라 남부를 기반으로 한 당나라(A.D. 618~907)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북미와 유럽, 동남아시아의 차이나타운 대부분은 바로 이들 남부 출신 이민자들이 세운 것들이죠.
    전문가들은 향후 10년 내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남부의 ‘당 민족주의’가 북부의 ‘허구의 한족 민족주의’에 대항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영 미디어들이 신장 자치구의 소요를 일방적인 시각으로 전달하고 티베트의 뉴스들을 은폐하는 것이 ‘허구의 짱골라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의도로 파악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쥐나의 경제적 역동성은 소수민족의 인종적 언어적 분화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부와 항구 등 중부와 북서부보다 경제발전이 앞선 지역들에서는 이 같은 경향이 더욱 확대되고 있죠.
    지속적으로 탈중심화하는 쥐나는 내부 갈등과 인플레이션, 경제 발전의 불평등이 문화적 언어적 분화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그 위협은 과거 중원 왕조를 종식시킨 적도 있는 남부 지방 사람들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우월하고 외국에서 교육받았으며 화교의 지원을 받는 그들이....

    현재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힙니다. 현재 쥐나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이죠. 민족차별에 의한 압력이 사회에 암묵적으로 만연되어 있죠.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쥐나 소장파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쥐나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허구의 한족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습니다.

    <a href=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87337 target=_blank>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87337</a>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한족은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통설이 학술연구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 현재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秦)은 소수민족인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소수민족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a h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72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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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분쟁의 도화선? 티벳과 위구르 사태

    최근 일련의 티벳과 위구르 사태는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쥐나가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는 한편 일본군과 싸우던 1940년대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존재했습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군이 1949년에 동투르키스탄을 침략해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현재 활동 중인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ETIM은 알카에다와 유대를 맺고 있고, 과격파 이슬람 세력이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실시하며 미래를 약속하죠. 오사마 빈 라덴을 추종할 경우 그가 세계적인 이슬람 국가를 수립할 때 이슬람 위구르인들이 동투르키스탄을 재건하여 통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장 폭동의 여파 속에서 알카에다의 북아프리카 동조세력인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AQIM)는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죠. 위구르족은 멀리 떨어진 동족 사촌들로부터 지원을 받습니다. 터키의 한 고위 관리는 쥐나 정부의 위구르 탄압을 이유로 쥐나 상품 불매운동을 촉구했습니다.
    터키가 또한 나토 회원국이란 사실을 쥐나 외교부는 유의하고 있죠. 이런 터키의 지위가 전략적 문제를 야기하여 후진타오가 G8 정상회의장에서 철수한 것입니다. 쥐나 정부는 여러 변방지역에서 대두되는 위협과 도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1979년 쥐나와 치열한 단기전쟁을 벌였던 베트남은 여전히 잠재적인 적이죠.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쥐나, 대만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지나해 또한 전쟁 발발 위험을 안고 있죠. 쥐나군 장성들은 대만 합병을 세계에 공언하고 있으며 외교적으로 여의치 않을 경우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티벳을 불법침략한 쥐나의 점령군은 티베트의 봉건적인 잔재를 일소하고 학교, 병원, 철도, 그리고 영화 산업 등의 광범위한 현대화를 약속하면서 대중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쥐나공산국 라디오와 신문, 광고, 영화를 통하여 쥐나는 달라이 라마를 공격하였으며 티베트의 불교를 격하시켰고 티베트의 전통 문화가 구태의연하다고 비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티베트인들의 적의를 바라보기만 했던 짱골라들은 차츰 그들이 자신들의 선전에 동조하지 않고 공산주의를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마침내 분노를 터드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선동이 실패하였음을 깨달은 쥐나는 협박과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존경받는 종교·정치가들을 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범죄자로 몰아 폭행하거나 고문하고 마침내는 사형시켰습니다. 수도자, 여성, 무력한 시민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참다 못한 티베트인들은 산발적인 저항을 하였는데 이는 티베트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수천만 티베트 인들이 체포되고 보복을 당했습니다.
    1959년 3월 10일 시위에 참여한 약 1만5천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살되었으며 그들의 시신이 라사 거리에 나뒹굴었습니다. 쥐나가 저지르는 폭력과 살인을 목격한 달라이 라마는 쥐나와의 조약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도로 피신했습니다. 3월 28일 쥐나 수상 주은래(저우언라이)는 티베트 정부의 해체를 발표하였습니다.
    친절을 가장한 그들의 속셈이 드러나자 쥐나 군대는 티베트인들에게 폭력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년이 지나지 않아 중앙 티베트에서 약 8만7천 명의 티베트인이 사살되었습니다. 포탈라 궁과 노르불링카 궁은 모두 공격을 받았고 신성한 간덴 수도원과 라모체(小初寺) 사원은 파괴되었습니다.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티베트를 지배하려는 쥐나의 의중에는 티베트의 불교를 탄압하려는 속셈도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와 불교는 공존할 수 없었죠. 쥐나 점령군은 사원의 체계와 학교, 사원, 성지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순수한 신앙까지도 탄압하였습니다. 1976년까지 6,259개에 달하던 티베트의 사원 중에서 몇 개만이 그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백만명에 이르던 수도승과 여승의 사분의 일이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폭행당하고 살해되었습니다. 성스러운 긴 역사의 교본들이 불에 태워지거나 군대의 뒷간에서 사라져갔습니다. 신성한 사원의 금, 귀한 보석류들은 사원이 폭파되기 정에 강탈되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티베트인의 문화재인 도자기, 불상, 벽화, 세공품들이 쥐나로 실려갔습니다. 이렇게 실려간 것을 녹여서 쥐나는 메달을 만들거나 국제 골동품 시장에 내다 팔아서 외화를 벌여들였습니다.

    수천 명의 억류자를 수용하고 점령 초기의 재건축 사업을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쥐나는 여러 개의 감옥과 노동 수용소를 지었습니다. 감옥에 수감된 이들은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거나 굶어죽었습니다.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은 티베트의 천연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일에 노예처럼 부려졌습니다.
    이런 일련의 모든사태의 심각성은 탄압에 반기를 들던 1959년보다 나아질 바가 없었으며 1966년이 되어서는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죠. 이때 티베트는 가장 급진적인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쥐나 사회를 대규모 재편성시켰던 문화혁명의 회오리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10년 간의 광적인 공포 정치가 실시되었으며 그러는 동안 수천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강탈범들이 전역을 돌며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죠.
    사원에 딸린 대학의 교육 과정에 심각한 규제가 가해졌으며, 쥐나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학생들만 입학이 허가되었습니다. 교본과 지도자 그리고 그 외의 교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죠.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불교 의식만이 허가되었으며 수도승들은 쥐나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조금만 그들의 체제에 위반되어도 체포나 고문을 받았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1984년 티베트 봉기 25주년 기념식에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파괴된 사원을 복구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선전을 하였지만 종교 단체에 가입하거나 불법(佛法)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장애가 뒤따랐다. 인상적인 구호를 사용하여 종교와 국가 자치의 자유를 보장하였다는 것은 단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종교개혁이 환상에 그치고 말았듯이 쥐나의 경제자유화정책도 인권 신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티베트에서의 정치적 자유는 실천되지 않았다."

    1980년 전반에 걸쳐 정치 활동을 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은 체포되거나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쥐나 경찰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향한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티베트의 시위자들은 결속하였고, 쥐나 보안 당국의 탄압에 강하게 맞섰습니다. 1988년 북경 정부는 모든 불평불만자들을 엄단하겠다고 공포하였고 1989년 3월 7일 라사에 게엄령을 발표함으로써 두 민족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수백 명이 살해되었으며 수천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은 그 해 말 북경 정부에 의해 자행된 천안문 광장에서의 대학살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하였습니다.
    1990년 5월 계엄령이 철폐되었으나 티베트의 보안군은 여전히 쥐나 통치에 대항하거나 의심이 가는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992년 쥐나는 체제 전복을 도모한 사람들과 연관된 자료를 찾아내기 위하여 가택 수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불교 관련 책자를 비롯하여 달라이 라마와 연관있는 것, 그의 연설, 녹음 테이프, 기도문, 저서 등이 검열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3년 후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공포되었죠.
    북경 군부에 의해 수행되는 현대화 과정은 전국적으로 환경에 대한 심각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티벳은 이러한 충격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죠. 그러므로 티벳의 생태적 황폐는 舊蘇聯이 비러시아지역에서 자행했던 환경 파괴처럼 쥐나의 티벳환경 파괴는 또다른 민족적 저항을 유발시키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티벳에서 表層土의 잠식을 가중화시키는 짱골라들의 고대 삼림에 대한 벌목 행위 특히 극심한 환경 파괴였습니다. 쥐나의 삼림정책 결과로 한때 티벳의 풍부했던 삼림은 황폐화되고 총 25만km2가 넘는 지역이 철저히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티벳 총면적의 1/6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입니다.

    환경 평가를 완전히 무시한 티벳 지하자원의 채굴은 철저히 생태계를 황폐화시켰습니다. 우라늄 광산들은 특히 티벳에서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1993년 20여년 동안 쥐나는 티벳을 핵폐기물의 저장소로 사용해 왔습니다. 특히 서북지역 핵무기연구소는 1960대부터 많은 핵폐기물을 생산했으며 이곳의 핵폐기물들은 모두 티벳 지역에 저장했습니다. 쥐나가 방사선 물질에 대한 안전 기준을 강화하는데 실패했다는 의심은 핵폐기물 저장 시설 주변 지역에서 암환자가 급증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환경문제의 무관심 때문에 수많은 티벳인들은 방사선 오염 물질에 노출된 육류를 먹은 후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현대화문제와 완전히 상관이 없는 또다른 행동에서 쥐나는 티벳을 핵무기뿐만 아니라 강력한 재래식 무기의 저장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최근 티벳에는 인도를 겨냥한 3개 미사일 기지의 존재가 보고되었습니다.
    1988년과 1989년의 폭동에 뒤이어 쥐나당국은 티벳의 정정 불안에 대한 복잡하고 특별한 반응이 쥐나의 목적이 결핍되는 곳에서 쥐나는 일반적인 독재자들이 사용하는 직접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티벳인들을 억압하기를 결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1994년까지 라사에만 6개 감옥소가 있어서 언제든지 수백명의 정치범을 투옥시킬 수 있죠. 인권운동가들에 의하면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라사의 6개 감옥소에 구속된 정치범의 숫자는 3~40%나 증가했습니다. 수많은 정치범들은 외부와 통신은 단절 상태에 있으며 끝없는 심문과 구타 행위를 당하고 있습니다. 타지역에 있는 감옥소 숫자는 불분명하지만, 엄청난 政治犯들을 수용할 시설일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근 신강성(신강 위구르 자치구)와 청해성에 있는 악명 높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수천 혹은 수만명의 티벳인들이 죽어 간다는 발표도 있었습니다.

    이번 2008년 티벳독립시위대의 불만 표출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짱골라의 경제적 지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짱골라는 티베트 인구에서 겨우 3.3%를 차지할 뿐이지만, 티베트 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구의 96%를 차지하는 티베트인들은 주로 농촌에서 농업이나 목축으로 생계를 꾸립니다.
    한 티베트 문제 전문가는 <에이피>(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문제는 쥐나가 티베트인을 배제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티베트는 쥐나에서도 소득 수준이 낮은 곳에 속합니다. 2005년 티베트 도시의 1인당 가처분소득은 9431위안으로, 쥐나 평균인 1만494위안에 많이 못미친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소득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는 엥겔계수도 44.5로, 쥐나 평균인 36.7보다 높습니다. 농촌에선 격차가 더욱 큽니다. 1인당 순소득은 2077위안으로, 쥐나 평균인 3254위안보다 떨어집니다.
    쥐나의 티베트 자치구 라사와 주변 성에 이어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도 2008년 3월 23일과 24일 대규모 시위가 연이어 발생했다고 홍콩 동방일보(東方日報)가 지난달 31일 보도했습니다. 신문은 신장 자치구 호탄에서 일어난 시위에는 약 1000명이 참가했으며 출동한 진압경찰에 의해 500명 이상이 강제 연행됐다고 전했습니다.
    쥐나에서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소수민족 위구르족의 활동가들로 이뤄진 '세계위구르대표대회' 대변인은 이번 시위 참가자의 80%가 여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위대는 지방 정부가 미혼여성을 저임금을 받고 일하도록 강요하는데 항의하는 한편 수감된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죠.
    쥐나당국은 다른 신장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위 관련 정보가 퍼지지 않게 강력히 단속하고 있는 것으로 신문은 지적했습니다.

    티벳과 위구르 등 여러 지역에서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립운동중입니다.

    동아시아 모든 민족들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한낱 무협일지라도 과연 불공평하게 다루어져도 좋은지 또 그것이 당연한 것일까요?

    허구의 종족 짱골라들이 허구의 역사조작 탐원공정을 벌이고 한국,북한,몽골,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자기들의 잃어버린 영토라 주장하는 교과서마저 만들고 있는 이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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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면피용
    작성일
    10.05.10 10:24
    No. 5

    글 쓰신 분이 말한 것이 무협지를 잡기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죠
    판타지를 잡기 힘들게 만드는 것중에도
    백인을 우월하게 그려놓는 점이 있죠
    변태가 약자로서 쾌감을 느끼듯
    사대주의는 나름의 쾌감이 있나봐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 허교주
    작성일
    10.05.21 00:37
    No. 6

    한배달 쥬신님의 의견 잘 보았습니다.
    저도 공감하는 내용이라 보는 내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군요.
    고구려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인양 왜곡하는 중국의 동북아공정에대해 관심이 많아서 였을 겁니다.
    과거가 없는 현실과 미래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런것을 알기에 중국이 저렇게 역사를 왜곡하는게 아닐까요?
    우리 정부도 선거철 표심 잡기위해 일본의 역사왜곡만 비판할게 아니라 중국의 역사 왜곡도 똑같은 선상에서 놓고 그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고 사과와 반성을 받아내야 할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쥬신님의 비평글에 좋은 내용이 담겨 있음에도 아쉬운점이 몇개 보이는 군요.
    우선 중국 정부와 그 들이 보이는 행태가 아무리 밉더라도 상대를 폄하하여 눈살을 찌푸리게하는 짱꼴라등의 인종 비하 발언은 보는 내내 찜찜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런 식의 감정적 대응은 당사자들에게 좋은 빌미가 됨은 물론 그들의 행태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의 눈살도 같아 찌푸려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좀 더 주관적이 아닌객관적인 관점에서 의미를 전달 하면 더 많은 분들이 공감하며 중국의 행태에 분노 할거라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아쉬웠던 점은 중국 정부와 그들의 행태에대한 비평만 있었지 우리가 그걸 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젼 제시가 부족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우리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글과 중국 일색의 글에 대한 일침을 놓는 내용의 글을 쓴적이 있었는데 문피아에 글을 올리는 작가님들이 앞장서서 이제부터라도 중국과 한족 우월을 표방하는 글을 자제하고 좀 더 재미 있게 독자들에게 다가가면서도 제대로된 가치관을 형성할수 있는 글을 써야 할 것입니다.

    좀 주제에 벗어나는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은 세종대왕님이 아닌 이정기 장군 입니다.
    고구려 멸망이후 발해를 세운 대조영도 대단하고 존경할만 하지만 고구려 유민으로서 한족들이 득실거리는 중국 한 복판에 그들의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제 나라라고 하는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는 국가를 건설한 이정기 장군이야 말로 진정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다시 아쉬운 점은 중국 본토에 우리 배달민족의 나라를 세웠던 이정기 장군의 업적을 우리민족 우리 대한민국에선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겁니다.
    또한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중국에서 절도사를 하다 반란을 일으킨 인물 정도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건 기록에 잘 남기지 않는 중국 역사서에도 이정기 장군이 세운 제나라가 완전히 다른 생활과 복식의 문화를 유지하며 독립된 국가로 3대 60년을 이어같다 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말입니다.
    물론 이젠 중국내에서도 단지 반란군 수괴정도로 비하하는 분위기 입니다.
    이렇듯 많은 부분이 축소 왜곡되었다는 점이 저의 분노를 자아내게 합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유명 장르소설가이신 조00 씨의 글에 중국 한족은 잘나고 멋지며 착한 존재로 묘사되었고 우리조상이자 중국 본토가운에 나라를 세운 이정기 장군은 정작 흉악한 오랑캐로 묘사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앞으론 우리들이 바꾸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2 뱈코
    작성일
    10.08.01 10:08
    No. 7

    여담이지만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라는 책을 보면
    중국 문명은 발해연안문명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 문명을 세운 민족이 우리 민족일 것이라 하네요.
    심지어 황제와 공자가 동이민족이라고 추측된다고 하니까요
    실제로 중국에서도 일원주의에서 다원주의문명으로 은근 말을 바꾸고 있으니까요
    중국에서는 역사를 왜곡하려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천천히 묻어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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