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그 신명 나는 작업
1. 선택 받은 발상에 살붙이기.
실제로 발상이 되었대서 모두 소설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대개의 경우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날 느닷없이 '아, 그걸 쓰면
되겠구나' 하는 끌림을 받은 뒤 살이 붙기 시작하는 그런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떠오른 생각을 그때그때 메모해둔 것이 소설로
발전된달 때 메모의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상이란 생각을 얽어 틀을 만드는 일이다. 생각은 고정된
틀이 없는 것이어서 그대로 두면 산만해서 의미가 없다. 생각을
하나의 통일된 얼개로 묶어놓기 위한 작업을 구상이라 한다.
주제의식 불어넣기, 표현방법 찾기, 얼개 만들기의
구상단계에서 세가지 유념할 원칙이 있다.
(1) 이야기의 중심을 분명히 잡아 산만한 글이 되지 않게 할 것.
(2) 지리한 글이 안되게 꼭 필요한 이야기만 넣되 독자를
긴장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할 것.
(3)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만들 것.
2. 분명한 주제의식으로 시작한다.
살아있는 진실된 이야기를 위해 주제의식을 분명히 해야 된다.
그러나 주제의식의 빈약도 문제지만, 주제의 노출은 더 안 좋다.
주제가 빈약하면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명시적인 주제는 소설의 형상화를 방해하는 가장
분명한 요인이다.
소설의 주제는 수필처럼 이 얘기는 바로 이것을 말하려 쓴
것이라고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단순하고 가시적인 것은
아닌, 보다 암시적이고 함축적이며 복합성을 필요로 하는 성질의
것이다. 분명한 것은 소설의 주제는 작품의 앞에 있는 것도,
뒤에 있는 것도 아닌, 그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중심원리로서의
어떤 힘이다.
3. 의식은 분명히, 그러나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
당신이 조심할 일은 성질 화끈한 독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성급하게 당신의 의도를 노출시키는 일이다. 그네들이 소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나 당신이 말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는
당신보다 여러 면으로 또 더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지 말고, 독자와 섣불리 정면으로
맞서지 말라.
당신은 사상가도 철학자도 정치쟁이도 아니다. 주제에 대한
강박 감이 당신을 철학가로 사상가로 착각 시킬 수도 있으나
당신은 오직 당신이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과 겨뤄야
한다. 당신이 혹은 독자들이 그렇게 신경 쓰는 주제를 당신
자신만이 아는 방법으로 슬쩍( 그러나 의식은 분명하게 ) 당신의
특기인 당신이 만드는 이야기 속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독자들은 섣불리 주제를 꺼내려 들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하면 당신이 이야기 속에 풀어넣은 주제는 보다
음전스러운 모습으로 그 이야기가 주는 감동과 함께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몫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열명의 독자가 당신의
이야기를 읽었으면 이제 당신의 의도가 열 가지 이상으로
확대됐다는 생각을 해도 좋을 것이다.
'뭔가 말하려 하는 건 알겠는데 이야기가 제대로 안됐어.'
'이야기는 그런대로 됐는데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위 두 가지 지적들은 독자가 당신이 만든 소설을 그네들의
몫으로 나눠 갖기를 거부하는 결정적 불만이다. 형상화의 실패가
그 원인이다.
4. 주제의식이 분명해야 이야기의 초점이 모인다.
횡설수설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말 하고자 하는 어떤 무엇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산만하다는 것은 그 이야기
전체를 통어 할 어떤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구상을 할 때 유념할
또 하나는 꼭 필요한 이야기만을 유효 적절하게 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5. 독자를 긴장시켜 사로잡아야 한다.
소설이 독자를 긴장시킬 수 있는 것은 독자가 그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을 때만 가능하다. 추리 소설이 독자를 사로잡는 그
기법을 알아보는 일도 구성공부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 묘미와 그 힘은 독자가 한눈을 팔 수
없도록 하는 긴장감 조성에 있다. 긴장감이란 단순히 호기심을
유발하는 스토리의 흐름이 아니고 작가가 계속 던지는 질문과
몰래몰래 감추어 온 의미 찾기에 독자가 기꺼이 참가하고 싶은
자발적 노력이 생기도록 유도하는 힘이다.
6.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있는 소설이란 읽히는 이야기로서의 요소를 갖춘 것을
말한다. 찾는 이의 지적 수준이나 취향에 따라 상당히
다르겠지만, 당신만이 해보일 수 있는 그런 재미를 당신이 쓰려는
소설의 힘으로 구현 시키는 일, 그것이 구상의 묘미이다.
7. 꼭 필요한 이야기만 적적한 비율로 배분하라.
구상이 잘된 작품이란 주변적인 이야기를 적당히 배분하여
작가가 의도한 바를 살리기 위한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을 말한다.
바로 핵심화의 원리에 따라 모든 사건과 인물과 배경이 서로
끌어당겨 필요로 하는 관계로 이루어져야 한다. 불필요한 삽화를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욕심의 억제, 진정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8. 자신의 장기가 있는 쪽에서 이야기를 풀어라.
한승원은 '언덕씨름을 하면 이긴다'고 했다. 즉 자기가 유리한
지점에서 승부를 해야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호랑이와 악어의
싸움에서 그들은 서로 유리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이려고 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감각, 취향, 개성에 맞는 배경과
분위기와 인물과 사건을 다뤄야 한다. 소설가 지망생이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재능이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 데 적절할
것인가, 자신의 장기를 살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 일까
하는 것을 빠른 시간 안에 파악하여 그 방면으로 넓고 깊게
파고들어가 '자기 언덕 만들기'의 치열성으로 시작할 일이다.
9.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당을 찾아야 한다.
당신이 구상하고 있는 그 이야기를 어떤 색조, 어떤 어조로 할
것인가를 구상단계에서는 분명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림의 바탕색과 같이, 그 이야기의 얼개와 방향성, 등장인물의
운명을 암시, 예언하는 역할을 한다.
필자는 중편 <투석>을 구상할 대 다음과 같은 톤을 의도했다.
- 돌이 날아드는 그 집의 분위기를 되도록 암담하게, 생각의
흐름도 되도록 어둡고 비감스럽게, 현실문제에 대한 인식을 다룰
때는 되도록 의지적인 문체로, 돌의 상징성을 작품 여러 곳에
배분하되 노출시키지 말 것.
발상이 영감처럼 왔다고 해서 그 구상도 빠른 시간에 이뤄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집 짓는 데 설계가 필요하듯 구상은 당신이 쓰려는 소설의 뼈대와 그 살을 붙이기 위한 성찰과 판단의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시간이 길고 신중할수록 좋다.
[출처:베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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