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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v.1 한배달쥬신
작성
10.03.23 00:13
조회
3,082

모든 무협 작가들이 그런건 아니지만 몇몇 무협지를 통해 느꼈던 것은(모든 무협지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공감하던 무협지도 있었으니까요.) 밑도 끝도 없는 한족 찬양과 변방족의 모독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역사에 관심이 조금 있다보니 그런 시각을 가지고 보았을지도 모릅니다만 저에게 가장 거북한 인상을 주던 한 무협지를 살짝 소개하자면 이런 식이었습니다.

"주인공은 한족이다. 그래서 코가 오똑하고 눈이 크며 피부가 눈결처럼 하얗다."...........주인공이 한족이라는 것과 "코가 오똑"하고 "눈이 크"며 "피부가 눈결처럼 하얗"다는 것과는 대체 무슨 상관 점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더군요.

물론 소설 하나를 가지고 모든 무협지를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무협지 중에 상당량이 이런 식의 밑도 끝도 없는 밀어주기 식의 표현이 많았다는 겁니다. "한족이니까"란 하나의 이유로 말이죠.

그에 반해서 가장 흔하게 언급되던 이민족이 거란, 묘족 등이었던 것 같은데 이들에겐 "족" 앞에 뭐가 붙던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더군요. 그저 그들이 한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언가 항상 부족하고 이상한 이들로 묘사되더란 말입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생활했고 심지어 자신들만의 왕조까지 만들었을 그 옛날 시기에 말이죠.

무슨 한족에게 매인 노예 민족들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어느 일정 지역은 거의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악마"에 가깝게 묘사되기도 하던데요. 대체 그 굳어진 편견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제가 듣기론 오히려 그 말이 왜 생겼나 싶을 만큼 그들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었다고 하던데.........그냥 이건 무협지니까 그렇게 알아. 하는 식은.......글쎄요........

"이건 너무 중화사상이 심하다 싶을 만큼 진한데?"하던 느낌을 옛날 고등학생이던 시절 느꼈을 정도라면 없지 않아 있었던게 아닐까요?(일부의 이야기긴 합니다만 그런 분들이 있었더란 거죠^^;)

주변 민족은 오랑케 혹은 야만인.

그리고 파괴와 반인륜적인 범죄만 저지르는 X들.

기타등등.

아무튼 정의는 한족들에게서만 나오고 그외의 것들은 가끔 인간적인 놈이 한두놈 있고 전부 때려 죽여도 시원찮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묘사되는게 한국무협의 현주소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이 문화가 깊고 역사가 오래되었는데도 말이죠.

대륙은 여러 민족들의 왕조가 명멸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아주 일부의 소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무협들은 한족만이 판치는 세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족 자체가 허구의 종족인데도 불구하고...

출처 : Network of Corea history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 글의 전문을 옮겨보겠다.

"552년 9월 고구려 평양에 북제의 황제 고양이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그는 박릉(博陵) 출신 최유(崔柳)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17세였던 양원왕은 그가 고구려에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왕은 북제 사신 최유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최유의 눈에 핏줄이 섰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왕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도 모자라 주먹을 불끈 쥐고 거리낌없이 왕에게 다가갔다. 퍽!하고 소리가 났다. 왕이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 더욱 기이한 장면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왕이 최유의 주먹에 맞아 용상에서 떨어졌는데도 누구 하나 그 불경한 사신을 제재하지 않았다. 대전에 있던 모든 고구려의 신하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감히  꼼짝하지도 못한 채 사죄를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왕을 바라보는 신하들의 심정을 일상적으로 보여준다. 도리어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사과를 했다. 그리고 왕을 폭행한 사신이 요구한대로 과거 북위에서 넘어온 유민 5천 호를 되돌려줬다. "                  

이 글은 『북사』 열전 고구려전의  '천보3년 ( 552 = 양원왕 8년) 북제 문선왕이 박릉 최유를 보내 위나라 말년에 고구려로 흘러 들어간 백성의 송환을 요구토록 하였는데 고구려가 불응하자 주먹으로 양원왕을 쳐서 쓰러졌고 고구려 신하들은 겁을 집어먹고 항의조차 못하였으며 5천호의 인구를 돌려주었다'는 기록을 서영교 선생이 자신의 저서 『고구려 전쟁의 나라』에 상황분석을 한 글이다.

서영교 선생은 이 사건을 사실이라 단정지었고, 북제의 황제 고양, 즉 문선제가 동아시아 최고의 군주이며, 양원 태왕(545~559)은 외가에 의해 옹립된 임금인 만큼 나약한 군주라 폄하하고 있다.

일단 상식적으로 볼 때 과연 타국의 사신이 타국의 임금을 폭행할 수 있었을까?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노태돈 교수님께서는 북제의 최유의 행위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것이라서 그 부분의 과장이나 허세뿐 아니라 사건 전체의 신빙성을 의심스럽게 한다고 하였고, 고구려 연구가인 김용만 선생 역시 자신의 저서 『고구려의 발견』에서 『북사』의 기록은 사건 자체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았다.

『북사』의 위 기록에 대해 사료조작이라 보인다. 일단 『북사』는 당나라 시대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사서다. 일단 북사가 당나라 때 편찬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당이 어떤 나라인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며 고구려에 적대적인 나라였다. 그런 당나라가 편찬한 사서이니 『북사』의 위 기록은 거짓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북제의 국력이나 상황으로 보았을 때도 북제 사신이 고구려 임금을 폭행할 수는 없었다. 당시 북제는 북으로는 돌궐의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고, 서쪽으로는 서위-북주(서위의 뒤를 이은 국가)의 압력을 받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유가 과연 고구려 임금을 폭행할 수 있었을까? 서영교 선생은 『북사』라는 사료의 '텍스트 비판' 없이 『북사』의 기록을 무조건적인 사실로 믿어 사료에 대한 비판 작업 없이 위의 글과 같은 오류를 범한게 아닌가 싶다.

비록 고구려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다고 해도(안장왕의 피살, 안원왕 사후 세군과 녹군의 혈전, 양원왕 시기 환도성주 간주리의 모반) 고구려는 남북조 시대 강국 북위도 어쩌지 못한 강국이었다. 고구려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나면 북위에서 고구려 사신의 배열을 남조 다음 2순위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의 『북사』기사가 거짓인 이유에 대해서는 고구려 - 돌궐 전에서 고구려가 크게 승리한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북주와 북제는 돌궐의 압력을 받는 상황이었다. 당시 돌궐의 칸은 북주와 북제를 가리켜 두 어린이라 표현하였고, 두 어린이가 효순하다고 말 한 바 있었다. 당시 돌궐의 기병대에 눌린 북주와 북제는 많은 비단을 돌궐에 바치며 평화를 구걸하고 있었다. 이런 돌궐을 격파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그런 고구려를 북제 그것도 일개 사신이 와서 행패를 부릴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또 의문이 든다. 고구려와 돌궐은 왜 싸웠고, 싸움의 경과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양원왕) 7년 가을 9월, 돌궐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에 관련된 추가적인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길은 없다.

다만 고구려와 돌궐의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동로마의 역사학자 시모카테스의 저술이 참고가 된다고 본다.

"유연의 잔당들이 북제로 도망을 쳤고, 북제에서 쫓긴 이들은 다시 동쪽의 무크리로 도망쳤다. 무크리는 북제에 인접해있다. 무크리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 매일의 신체 단련으로 투지가 매우 높았다"

유연은 돌궐 이전 고비사막 이북에 거주하던 서쪽은 동로마 제국, 동쪽은 대흥안령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보유한 유목세계의 지배자였다. 유연은 부족한 농산물을 얻고, 남쪽의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다. 하지만 유연의 지배 하에 있던 철을 캐며 살아가던 돌궐 부족이 힘을 키워 유연을 멸망시켰다. 그후 유연의 잔당은 위의 시모카테스가 지적한 대로 무크리로 도망쳤는데, 무크리는 우리 말로 옮기면 맥구려(貊句麗)로 이는 예맥족의 고구려를 가리킨다.

결국 돌궐과 고구려가 싸운 건 고구려가 유연의 잔당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552년 이계찰대가 이끄는 돌궐군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돌궐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그런데 『수서』 「돌궐전」에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581~582년경 돌궐의 이계찰대의 군대가 고구려와 말갈병에 크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581~582년 양국 간에 또 한 차례 큰 전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수서』 「거란전」에 "북위 시절에 거란족은 고구려에게 침략을 당하여 부락의 인구 1만여 명이 중국에 붙기를 원해 백비하까지 나왔다. 그 뒤에는 다시 돌궐에게 침략당해서 또 1만여 가구가 고구려에 붙어버렸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거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돌궐이 충돌한 듯 싶다. 양국 간의 전쟁에 말갈이 참여한 이유는 당시 말갈족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양왕 때 수나라의 요서를 선제 공격할 때 말갈병 1만을 동원한 바 있다)

아무튼 위의 고구려 - 돌궐 전쟁에서 보듯, 고구려가 돌궐을 크게 이겼는데, 돌궐에 어쩌지 못한 북제가 과연 고구려 태왕을 폭행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결국 위 기록은 당나라 측의 고의적인 왜곡 아니면, 고구려로부터 일종의 외교적 수치를 받은 북제 측의 고의적인 왜곡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참고문헌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998

김용만, 『Q&A 한국사 고대』, 청아출판사, 2008

서병국, 『고구려제국사』, 혜안, 2007

서영교, 『고구려, 전쟁의 나라』, 글 항아리, 2007

『토번(吐蕃) 장안성 함락은 약탈전인가?』

7c 초인 643년부터 계속되왔던 토번제국(吐蕃帝國)과 당 제국(唐 帝國)의 전쟁은 8c에도 역시 이어졌고 서로 밀고 밀리는 전투였다. 당 현종의 치세를 맞이한 당나라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그야말로 세계에서 당시 가장 강한 국력을 자랑하였고 이에 따라 토번은 우마이야와 함께 대항해보기도 했으나 서역의 영토를 대부분 잃는등 당나라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755년 안록산의 난을 시작으로 절도사 난이 시작되자 당은 날로 쇠퇴하였고 이에 비해 토번은 제2의 전륜성왕이자 불교의 수호자라 불리우는 치송데첸(赤松德贊,Khri-srong lDe-btsan)의 등장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토번이 당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장악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763년 토번의 장안성(長安城) 함락 사건이다. 당 제국의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을 함락한 이 사건이야 말로 토번이 당의 국력을 압도적으로 능가했다는 증거일것이다. 분명 이 사건은 토당전쟁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일뿐만 아니라 당시 토번이 당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또 토번은 이에 대해 어떤 행동을 보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일단 중국측 기록인『구당서(舊唐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구당서 권196 토번전(舊唐書 卷196 吐蕃傳)』의 763년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것이다.(전투 내용이나 세세한 내용들은 모두 생략한다.)

『구당서 권196 토번전(舊唐書 卷196 吐蕃傳)』

황제가 섬주로 옮겨 경사가 함락되자 항장 고휘가 토번을 이끌고 상도성으로 들어가 토번대장 마중화(馬重華)등과 함께 고빈왕 아들 광무왕 승굉을 황제로 세우며 대사면을 베풀고 관리를 임명하였다...(생략)...토번은 성에서 15일간 머무른뒤 퇴각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그러면 어떻게 나올까?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중요부분만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자치통감(資治通鑑)』

토번이 쳐들어와 노략질 하면서...(생략)... 겨울 10월 토번이 노략질하자 자사 고휘가 성을 들어 가지고 그들에게 항복하고...(생략)...신사일(2일) 에 봉천과 무공을 노략질 하니 경사에서는 떨면서 놀랐다....(생략)...무인일(9일) 토번이 장안에 들어가니 고휘와 토번대장 마중영 등이 옛날 빈왕인 이수례의 손자 이승굉을 세워서 황제로 삼고 연호를 고치고 백관을 두면서...(생략)...토번이 이미 광무왕 이승굉을 세우고 나자 성안에 있는 사인(士人),부녀자 백공(百工)을 악취하여 무리를 정돈하여 귀국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토번의 장안성 함락에 대해 노략질 즉 약탈이라고 표기하였다. 이외에 신당서 등 여러 사서가 있지만 내용은 위것들과 비슷하므로 이하 중국 사서들은 생략하고 이제 토번의 기록을 보도록 하자

『티베트 사료(吐蕃 史料)』

겨울에 하로(下路)의 당주(唐主,당나라 황제를 의미하며 당숙종-唐肅宗-을 말한다.)가 죽고 새 당주(唐主,당 대종-唐代宗-을 말한다.)가 즉위 한뒤 약속을 어기고 공견(貢絹)을 바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땅도 헌납하지 않아 마침내 적국이 되었다. 이에 상걔씨(尙野)와 상동첸(尙東贊)등이...(생략)...여러 성보를 공격하여 이기고 상걔씨는 번(蕃)으로 돌아갔다. 상계씨와 뢴다자루콩(論悉詻),샹동첸,샹첸파(尙贊磨)등이 군사로서 경사(장안성)을 포위하여 경사성(京師城)이 함락되고 당주가 탈출하여 도망치니 따로 새 당주를 세우고 개선하였다.

『뢴다자루콩 비문(論悉詻 碑文)』

첸포 치송데첸은...(생략)...당토의 당나라땅의 성과 보루 여러곳을 공격하여 이기니 당주 효감황제(孝感皇帝) 군신(君臣)이 매년 채증 5만단을 보내게 해달라고 빌어 당실의 조공을 폈다.(당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말) 당주의 부왕 효감황제가 죽고 태자인 당주 광평왕(廣平王)이 즉위하자 토번에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첸포가 진노하여...(생략)... 두 장수에게 명하여 경사로 진격하게 하여...(생략)...싸워 당군을 대패시킨 당주 광평왕은 경사를 버리고 나와 섬주로 도망하여 마침내 경사(장안성)를 함락시켰다.

토번이 당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킨 이 사건을 중국사서만 놓고 본다면 단순한 약탈로 이해 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일단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말하길 당시 토번이 이끌고 온 군대가 20만이라고 한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약탈전이나 벌이려 오는 국가는 없을것이다. 더욱이 티벳,중국사서의 공통된 점은 토번이 당나라 황족 이승굉(李承宏)을 황제로 세웠다는 점이다. 괴뢰정권 이라 할 수 있는 이 이승굉의 당나라는 비록 15일밖에 가지 못하였지만 관료들을 다 정할 정도였다. 이것을 볼 때 이 사건을 단순히 약탈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물론 토번이 장안성을 점거한지 얼마 안되서 장안성의 장인,유생등을 데리고 라싸로 개선한건 사실이다. 또한 이러햇기에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등 중국 역사가들은 이를 약탈전으로 본 듯 하다.

그러나 토번(吐蕃) 사료를 보면 토번은 단순히 약탈전을 벌이기 위해 진군한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첫번째로 토번은 당으로부터 약속받은 조공품을 당이 주지 않자 이를 이유로 당을 침공했음을 볼 수 있다.

두번째로 군대의 규모가 20만 대군으로서 단순히 약탈 행위가 아닌 한 국가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번째로 괴뢰정권을 세웠다는 점이다. 이 3가지 경우를 볼 때 이것은 결코 약탈전으로 보기가 어렵다. 또한 토번군은 완벽히 철수한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었다. 당시 당나라 총사령관 곽자의가 이끈 군대가 5만 이하라는 점을 볼때 토번 입장에서 20만이라는 대군을 주둔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약탈전으로 보기가 어려우며 토번이 당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일단 또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당과 토번의 입장 차이다. 당은 토번에게 난을 진압해주거나 하는 것을 조건으로 비단을 주었다고 말하는 반면 토번은 이를 조공으로 간주하였다. 『뢴다자루콩 비문(論悉詻 碑文)』내용이 대표적이다.  즉 중국측에서 숨기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을 수도 있겠다. 토번에 장암성 함락 사태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 흐름에서 토번이 당을 능가함을 증명하는 사태였으며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상황은 재편성 되었다.

http://historykr.com/bbs/view.php?id=free&no=760#760

돈으로 평화를 산 중국 ((있지도 않은 허구의 종족 한족의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 뿐이다. 하물며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왕조, 그리고 수와 당은 흉노계 선비족 왕조 기타등등))

우리는 중국하면 강대국,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국이라 생각한다. 중국은 넓은 영토, 무한한 자원, 그리고 13억이 넘는 인구를 지닌 대국이다. 하지만 중국이 과연 대단한 나라인가? 사실 중국은 넓은 땅 덩이에 비해 그리 대단한 나라는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만큼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은 나라는 없다.

한나라 유방이 중원을 통일하고 그 솟아오르는 힘으로 북방의 위협인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유방은 초한대전이전부터 각 군벌들간의 전쟁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군사적으로 북방 기마민족과는 근본적으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유방은 오만하게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흉노족은 모돈선우라는 영걸이 나타나 흉노족의 힘이 막강할 때였다.

유방의 30만 대군은 기세좋게 북방으로 진격했으나 흉노족의 포위에 걸려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포위된 유방은 온갖 뇌물을 다 바치고 앞으로 매년 엄청난 조공을 할 것이며 모돈선우를 황제나라 어버이로 모시고 유방은 신칭을 하기로 했다. 흉노족 일대의 영걸 모돈선우는 이 정전조건에 매우 만족하고 유방을 풀어 주었다.

중국 사서는 유방이 모돈선우의 신하가 된 사실을 극구 숨긴다.

그리고 바친 조공도 오랑캐에 대한 하사품이라 왜곡을 하였다.

당나라 시대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북방에서 위세를 떨친 위구르족들에 대해 중국은 갖은 선물을 다 바치고 구걸외교를 했다. 황소의 난과 같은 일대 국가위기도 위구르족의 전사들이 아니면 평정할 엄두도 못냈다.

하지만 사서는 당나라 황제가 위구르족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역사왜곡을 한다.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약체로 평가받는 송이긴 하지만...

송나라는 거란족의 요, 탕쿠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요나라에는 매년 금 20만냥과 비단 50만필을 서하에게는 금 10만냥과 차 2만근을 보내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명나라 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를 지배하다가 몰락한 몽고족의 기마대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북방에 남아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개국시조 주원장의 아들이자 명나라 최고의 영걸인 영락제가 즉위하고서는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초원에까지 명나라 군대를 진주시켰지만 바람같이 사라지는 몽고기병대를 토벌하지는 못했다.

중기에 들어오면 몽고족이 아니라 투르크계통의 오이라트족 에센 타이지가 몽고초원을 통일했다. 그들은 명나라를 위협하자 이미 나약해빠진 명나라는 이 몽고족에 대해 마시장을 열고 울며겨자먹기로 수십만 마리의 몽고말을 비싼 값에 사주었고 몽고의 사신이 오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선물을 안겼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천명까지 정원으로 하여 오라는 사신이 무려 삼천명씩이나 왔다. 명나라는 이 삼천명에게 모두 값비싼 선물을 안겼다.

말하자면 돈으로 북방의 평화와 국가안보를 산 셈이다.

그래도 명나라 입장에서 북방에 수십만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비보다 이게 훨씬 싸게 먹혔다.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몽고족 입장에서 중국을 집어삼키지 못할 바에야 목숨걸고 군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명나라를 위협하여 평화적으로 삥을 뜯는게 그 또한 구미에 맞았다.

명나라는 돈으로 명분도 얻고 북방의 국가안보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역사기록은 어떻게 되는가?

몽고의 오이하트 4부의 패자 에센이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러 오자 황제께서 사은품을 하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물자가 부족한 몽고족 입장에서야 하사품이라 하든 뭐라고 치든 재물만 두둑히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는 결국 명나라의 방대한 사서만 남았다.

몽고가 보잘 것 없으나마 조공품을 들고 황제에게 조공하러 왔을 때 천하의 주인인 황제께서 은혜로운 마음으로 변방의 오랑캐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게 실제와는 정반대인 그 날들의 황당한 중국역사이지만 글자로 남겨진 사서만이 진실이 된다.

에이 그럴 리가 있느냐고?......

이것이 진실된 역사이고 이조차 사서는 전부 엉터리로 기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명나라가 몽고족에게 한번 선물을 제대로 안주다가 서로 충돌이 일어나서 마치 코미디처럼 군사지식이 전혀 없는 조정의 실력자 왕진이라는 환관의 고집으로 몽고족에게 도전할려고 50만대군을 일으키고 그도 왕진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황제가 직접 친정을 하였다가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야전에서 생포를 당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이 것이 유명한 토목의 변이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우여곡절 끝에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는 다시는 몽고족에게 변변한 저항을 한번 하지 못하고 망할 때까지 비싼 경비를 들여 북방의 평화를 구걸하였다.

하지만 사서는 그래도 명분은 황제가 몽고족에 물품을 하사한 것으로 뻔뻔스럽게 기록을 하였다.

허풍이 심하기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중국인들의 행태가 결국은 역사상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남아있는 것은 대개 중국의 사서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고구려와의 관계도 이런 식이라 보면 된다.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은 것은 통일왕조가 들어선 수, 당 시대 때이다.

그런데 수양제나 당태종이나 왜 책봉국을 그렇게 수백만의 군사를 동원해 정벌하고자 했을까?

책봉은 외교적인 일종의 형식일 뿐 수 당을 진정으로 황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자 오만한 양제나 당태종이 분노했던 셈이다.

그러나 허풍이 세고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중국의 사서는 고구려가 마치 중국의 책봉을 받은 변방국가로 조작한 것이다. 이를보면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이 얼마나 형편없고 잘못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중국이 자랑하는 한나라 역시 우리민족에게 돈으로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예를들면 한나라는 고구려와의 경계선에 책구루를 설치하여 그 곳에 한나라의 물품을 갖다놓고, 고구려로 하여금 그 물품을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이는 한나라가 고구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린 나머지 물품을 주며 고구려의 침략을 막은 것을 마치 하사했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 6대 임금인 태조는 자주 한나라를 공격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는데 일생을 바친 임금이었다. 태조 때 하도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의 영토와 주민들을 잡아가자 한나라에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 주민을 돌려주면 어른은 비단 48필, 아이는 그 반의 값을 주겠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당나라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안시성에서 양만춘에게, 요택에서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한 후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궁과 궁복을 하사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중국측 기록도 당나라가 고구려에 크게 패해 전쟁배상금을 문 것을 거꾸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보면 중국은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갖은 침탈을 당한 나라였다.  군사력이 약해서, 그들은 돈과 물품으로 평화를 살 정도였다. 돈으로 평화를 구걸한 나라,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의 흐름이고 그들의 실체이다.

우리는 중국이라는 환상에 잡혀있지 않은가?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 던지고 역사를 다시 보자.

그러면 중국을 호령한 북방민족들의 기상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 던져야 한다.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Comment ' 7

  • 작성자
    Lv.1 MadFrog
    작성일
    10.03.23 15:17
    No. 1

    김용 작가님의 소설에서는 몽고나 여진에 비교적 호의적인 내용도 있었지만... 저도 무협보면서 가끔 느끼는 부분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한배달쥬신
    작성일
    10.04.18 21:21
    No. 2

    티베트 동부 캄(Kham)지방의 제군도(Jyegundo)….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다. 모든 언론은 지난 2010년 4월 14일 발생한 이 비극적인 지진을 중국 서부 칭하이(靑海)성 위수(玉樹)현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명명하여 보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진 발생한 곳이 분명한 티베트 지역이며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티베트인이라는 것이다.

    티베트의 잊혀진 역사

    티베트는 1950년 10월 6일 중국의 침략을 받은 이래로 현재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로 남아있다. 티베트는 크게 암도(Amdo 현재 중국의 칭하이성, 간쑤성과 쓰촨성 일부 지방), 캄(Kham 현재 중국의 쓰촨성, 윈난성과 칭하이성 일부 지방), 우창(U-Tsang 현재 티베트 자치구) 세 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1965년 중국은 행정적인 이유로 우창 지역만을 티베트 자치구(TAR)로 지정하였으며, 이는 실제 티베트의 절반도 안 되는 부분이다. 이번에 지진 피해가 발생한 지역은 역사적으로 동티베트 캄지방의 일부였으며, 오래전 티베트 동부의 상업도시로서 티베트인들에게는 제군도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중국의 점령 기간에 티베트 전역에 대규모의 한족 이주가 시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다수의 주민이 티베트인인 이 지역에는 티베트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의 침공에 저항한 추시 강드룩 대원들.
    추시 강드룩은 티베트 무장독립투쟁 군으로 '네 줄기의 강과 여섯 줄기의 산맥'이라는 뜻이다. 이는 동티베트의 지리적인 특징을 의미한다.

    이 험준한 산악 지역의 사람들은 늘 용맹했으며,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캄파(Kham-pas)'와 '암도와(Amdo-wa)'(캄 지방과 암도 지방의 사람을 일컫는 말)는 중국 지배에 정면으로 맞서 저항했다. 티베트인들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라는 대다수 사람의 인식과는 반대로, '추시 강드룩(티베트 무장독립투쟁 군으로 '네 줄기의 강과 여섯 줄기의 산맥'이라는 뜻. 이는 동티베트의 지리적인 특징을 의미한다)' 전사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의 직접적인 권고로 무기를 내려놓기 전까지 중국 정부에 대항해 오랫동안 게릴라 전투를 벌여왔다. 이 전사들 대부분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거나 중국의 점령을 맞닥뜨리기보다 자살을 택했으며, 남은 사람들은 티베트를 탈출했다. 제군도를 둘러싼 역사는 정치인과 기자들에 의해 잊히거나 무시당하고 있다. 어떤 언론도 이 지역에 얽힌 잔인한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희생자 대부분이 티베트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거대한 지진 앞에 힘없이 무너진 사람들은 중국인으로 명명될 뿐이다. 하지만, 제군도에서 사망한 티베트인들은 중국인이 아닌 티베트인으로 죽을 권리가 있다.

    티베트, 중국 그리고 재난의 정치

    물론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어떠한 정치적, 역사적 논쟁도 무너진 건물 더미에 파묻혀 구조만을 기다리는 실종자들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의 고통보다 앞설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골치 아픈 정치적, 역사적 이야기를 꺼내 든 이유는 이 비극적인 재난 속에서 재난의 정치학이 발동되는 것을 경계해서다.

    우리는 종종 국가적인 재난 상황을 국민 화합과 국가 통합의 매개로 사용하는 국가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재난의 정치에 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에 앞서 이러한 정치적 선전이 제군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몇 가지 징후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많은 승려들이 티베트 불교를 '분리주의'로 보는 시각 아래서 사원에서 쫓겨나야만 했고,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군인들의 감시 아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비록 소중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힘을 합치고 있지만, 티베트와 중국 사이의 현실적인 갈등은 한 치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재난이 수습된 이후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 된 우리'라는 선전이 성행할 것이 우려된다. '지진을 계기로 갈등을 봉합하고 화합의 길로 들어섰다'는 중국 당국의 선전은 '중국이 티베트를 해방했으며, 티베트인들은 중국의 통치 아래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라는 익숙한 선전 문구처럼 모든 사람의 눈과 귀를 가려버릴지도 모른다. 티베트인들은 지난 2008년 티베트 전역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민중봉기를 통해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전 세계에 소리쳤다.

    또한 '지진이 발생하고 나서, 중국 군인들이 제군도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티베트인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 이러한 재앙이 제군도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중국에게 단순한 재난이 아닌 정치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다. 제군도를 둘러싼 캄지방은 티베트를 침공한 중국에 맞서 가장 맹렬한 저항이 벌어졌던 지역이다.

    또한, 2008년 티베트 민중봉기 당시에도 말 위에 올라탄 티베트 민중들이 중국 경찰서를 점거한 것을 비롯해 광범위한 독립 투쟁이 일어났던 곳이다. 지금 중국정부가 바라는 것은 재난으로 이성을 잃은 티베트인들에게 어떠한 정치적 언급이나 항의시위를 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 불안한 지역과 티베트를 관련짓는 어떠한 국제적인 관심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티베트인들, 제군도는 인구의 97% 이상이 티베트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징후는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몇몇 국제부 기자들이 피해 지역으로 들어갔고, 중국정부는 구조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취재를 허용했었다. 그러나 피해 지역 접근 제한은 벌써 시작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홍콩 <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 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선전부가 중국 언론들에게 지진이 일어난 제군도 지역을 제외한 주변지역 취재를 금지했다고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여진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에 외부인의 접근을 되도록 차단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미국 < 뉴요커 > 는 중국 당국이 국가가 허가하는 검색 엔진의 결과를 제한하고 지진을 '중국지진'으로, 희생자들을 '중국인'으로 명명하는 방법으로 제군도 지진이 어떻게 보도되는지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중국 당국은 지난 2008년 발생한 쓰촨(四川)성 대진진 당시 3일 만에 외국 지진 구조대를 받아들인 것과는 다르게 대만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구조대 파견 제의를 거절했다. 당국자는 '지진 피해 지역의 공간이 비교적 제한 적이며, 구호활동의 역량이 충분하다'며 외국의 구조 의료 지원과 물적 지원을 거절하고 금전적 지원만을 용인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중국으로서 가장 민감한 티베트 지역에 외국인 구조대가 파견되면 국제적으로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대한 관심을 유발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진으로 말미암은 첫 번째 비극에 이은 두 번째 비극이 시작되고 있다. 바로 진실의 죽음이다. 간단히 말해서 제군도 사람들은 중국인이 아니다. 그들은 티베트인이다. 제군도에서 사망한 티베트인들은 중국인이 아닌 티베트인으로 죽을 권리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실한 목소리를 낼 정당한 권리가 있다. 이것은 점령군에 의해 침공당한, 반세기가 넘게 자유를 박탈당하고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점령의 굴욕과 무게를 견뎌온 유목민과 승려, 농부들의 이야기이다. 제군도 사람들은 그들의 땅에서 존엄성을 지키며 죽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책임은 이 이야기의 진실을 찾아주는 것이다. 지진이 일어난 지역이 중국 칭하이 성이 아닌 점령된 티베트의 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중국발 기사들 속에서 국제 사회가 그 지역의 역사적 배경,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소평이 남긴 말 중 다음의 말이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

    등소평왈 "3000번을 거짓말하면 진실이 될 것이다!"

    고구려 유물 밀반출 조선족 2명 사형
    <a href=http://news.nate.com/view/20040108n01664 target=_blank>http://news.nate.com/view/20040108n01664</a>

    노컷뉴스 기사전송 2004-01-08 11:33

    조선족 주민 ''고구려역사 파괴대신 북에 밀반출이 나아''

    지난해 여름 중국에서 고구려 유물을 북한으로 몰래 가져가려던 조선족 주민이 적발돼 2명이 사형당하고 2명이 25년 징역형을 받았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오늘 보도했습니다.
    문제의 유물은 고구려 유적이 집중돼 있는 지린성 지안의 4호고분과 5호고분에 있던 것으로, 사건에 연루된 조선족 주민들은 "이대로 가면 우리조상인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에 의해 은폐되고 파괴되기 때문에 북한으로 반출하려 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산케이는 중국은 이 사건이 있은 후 고분 등이 있는 현장 일대를 역사적 보존지역으로 지정해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면서 중국 당국의 이런 강경한 조치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고구려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과 관련해 중국이 고구려 문제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CBS문체부 권주만기자

    후진타오가 동북공정 지시·승인”
    <a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3419 target=_blank>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3419</a>

    후진타오는 고구려사 왜곡 및 침탈을 위한 ‘동북공정’을 사실상 지시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는 중국 정부 기관의 홈페이지 및 지방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헤이허(黑河)에서 간행되는 헤이허일보는 지난 2003년 8월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제3차회의가 헤이허시에서 열린 사실을 보도하면서 “동북공정은 후진타오 동지가 2000년 중국사회과학원을 통해 비준한 사회과학 연구항목”이라고 소개했다.

    또 중국 국무원 산하 중앙문사연구관의 랴오닝성 문사연구관은 홈페이지에서 연혁을 소개하며 “쑨진이(孫進已) 연구관의 고구려 관련 연구를 지도자들이 매우 중시하고 지지했으며, 후진타오, 딩관건(丁關根·당시 공산당 선전부장), 리란칭(李嵐淸·당시 부총리), 첸치천(錢其琛·당시 외교담당 부총리), 리톄잉(李鐵映·사회과학원장) 동지 등이 모두 중요한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동북공정은 중앙 정부와 무관하다’는 중국측의 주장은 거짓말로 확인된 바 있다.

    지난 2002년부터 5년간 진행된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뿐 아니라 고조선에서 간도 문제까지 한국사 전반에 대한 문제를 다뤘고, 2004년 한국의 반발에 부딪쳐 일단 축소되는 듯 했으나 은밀히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를 침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어도가 한국 영토라는 것을 인정못한다’고 밝히며 전선을 동북아 전역으로 확대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07년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백두산이 자신들의 영토임을 강조하는 동영상을 홍보하기도 했다.

    한편, 후진타오는 지난 1989년 티베트 학살 현장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중국은 몽골이 중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몽골제국을 일으킨 칭기즈칸마저도 중국 사람이라고 교과서에 기술하는 등 몽골 역사를 크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몽골국립대학 잠미얀 바트투르(39) 교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결코 한국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면서 “중국은 역사학자들을 동원해 공공연히 ‘몽골을 되찾자.’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지난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에서 열린 국내 전문가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중국 역사학자들의 역사인식’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몽골의 중국화’를 중요한 과제로 다루고 있다. 몽골 학계에서 몽골사를 3권으로 정리해 출간하자 중국측은 곧이어 8권짜리 몽골사로 정리했고, 다시 몽골측이 5권을 발간하자 지난해 중국측은 15권을 펴내 물량공세도 서슴지 않고 있다.

    바트투르 교수는 “당시 중국 학계 및 언론은 몽골 역사의 연구중심이 중국이 됐다고 선전했다.”고 전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중국의 초·중·고 역사교과서에 ‘원나라=중국 국가’라고 기술돼...

    그러나 바트투르 교수는 “원나라를 세워 중국을 정복한 쿠빌라이칸 이후 명나라 설립 전까지 중국을 통치했다.”면서 중국의 교과서 왜곡을 비판했다.

    그는 “한 사람만으로는 가족을 이룰 수 없다.”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티베트, 카자흐스탄 등 역사왜곡 피해당사국간의 공동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79 騶漁
    작성일
    10.05.05 02:11
    No. 3

    저도 그런 면은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무협의 주 시대는 명나라가 배경으로 많으며, 중국 특유의 중화사상이 있기 때문에 여러 무협 소설에서 한족위주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족들이 자기들이 특별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거라고 봅니다.
    또한 중국은 예로부터 많은 부족들의 침입을 받았었고, 그로인해 굴욕적인 일들도 많이 가졌기에 자기들의 자존심을 위해서 '우리는 특별하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한족은 어떤 특정한 종족이 아니라 중화사상에 물들은 중국 중심의 사상을 가진 모든 민족을 한 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예로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지만, 결국 중화사상과 한족 특유의 융화력으로 여진족이 한족으로 포함되어 청나라 말기에는 따로 여진족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한족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지요.
    그렇기에 여러 소설에서 주인공이 한족이라면, 한족특유의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이 쓰는 무협에서도 한족위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을 한다면 별로인 것은 당연하겠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한배달쥬신
    작성일
    10.05.05 17:57
    No. 4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孫文, 1866~1925)이 제창한 쥐나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입니다. 그것이 공표된 것은 1905년 일본에서 쥐나혁명동맹회(中國革沒盟會)를 결성했을 때입니다. 동맹회는 창립 선언에서 ‘만주족 축출(?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 곧 만주족의 청(淸)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민권주의는 유럽식의 공화정의 확립, 민생주의는 지주의 불로 소득을 억제하는 것을 과제로 했습니다.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어떨까... 쥐나공산국이 탄생할때 모택동이 약속한게 바로 소수민족독립이었습니다.
    국민당과 전쟁중에는 쥐나가 한개성 단위로 쪼개져도 좋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모택동입니다. 그래서 쥐나공의 성립후 자치구가 등장하죠.
    쥐나에 55개 이상의 민족들이 있습니다. 쥐나정부가 크게 나눈 민족이 55개이고, 자잘한 민족은 훨씬 많습니다.
    쥐나인민공화국 탄생시 짱골라 한족 비율은 50% 미만이었습니다. 50년만에 나머지 소수민족들 4~50%가 우주로 이민갔습니까? 아니죠. 무늬만 한족입니다.
    짱골라 한족은 어떨까? 후진타오가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죠.
    " 현재 삼민주의가 대세니 뭐니하고, 자치권을 요구하는 무리가 많다. 이런 분열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
    삼민주의, 자치권을 소수민족만이 부르짖을까? 아니죠. 저기 상해, 절강성같은 잘 사는 연해 동네에서도 부르짖는 겁니다.
    자신들을 상해인이니 홍콩인이니 하면서 타지역과 다르다고 주장하죠~
    순수 짱골라들도 이러는 판국입니다. 쥐나가 제일 처음 분열하는 곳은 소수민족자치구가 아니라 홍콩, 상해, 심천, 광주 같은 잘사는 지역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하죠.

    짱골라들이 원나라, 청나라 때부터 티벳을 차지했다고 새빨간 저짓말을 하는데 정말 어이 없습니다.
    원나라는 흉노계 몽골족의 역사이고,
    금나라와 청나라(후금)은 고구려발해 후예 예맥-부여계 말갈(=여진=만주)족의 역사입니다.

    하나로 통제된 쥐나의 신화가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쥐나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사회의 저류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심각한 민족 갈등이 내재하고 있죠.
    최근 신장 위구르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소요 사태가 쥐나의 위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류를 형성하는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쥐나는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현재 명목적으로, 한족으로 분류되는 남부의 광둥(廣東)과 푸젠(福建)성, 하카(客家)족을 위시해 쥐나는 최근 들어 소수계들의 인종과 문화가 부각되고 있으며 정치적 환경과 경기침체로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2009년 6월 광둥의 장난감 공장에서 두 명의 위구르 노동자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조성된 신장 위구르의 불안은 7월 5일 156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최악의 소요 사태로 확대됐죠.
    쥐나 당국은 무슬림계를 비롯, 소수 민족이 외부의 지원을 받아 분리되는 소위 ‘코소보 효과’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쥐나의 민족갈등은 ‘공식적인’ 소수민족들만이 아닌 문제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죠. 쓰촨(四川)성과 광둥성, 상하이, 후난(湖南)성 사람들이 문화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중앙정부의 통제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요즘 쥐나의 분열 양상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2009년 7월 뉴욕타임스는 1면에 신장 위구르 소요 사태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한족 부부의 사진을 싣고 쥐나 정부가 정책적으로 이 지역에 이주시킨 한족의 비율이 지난 수십 년간 40%대가 됐다며 토박이 위구르인들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월 스트리트 저널(WSJ)은 ‘쥐나의 인종 분열’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구소련이 인종적 민족적 차이로 인해 분리됐듯이 쥐나도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G8정상회의 도중 급거 귀국한데서 드러났듯 이번 충돌로 인해 쥐나 공산당은 오는 2009년 10월 야심차게 준비한 60년의 ‘조화로운 리더십’ 행사가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향후 민족 분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죠.
    200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쥐나의 55개 소수민족은 총 1억400만 명으로 전체의 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92%의 점유율을 보이는 한(漢)족은 베이징 북쪽 일대부터 남쪽의 광둥성에 이르는 지역에 대부분 거주합니다. 사실 92% 한족이란 것도 실제로는 허구라는 것이 유전분석으로 밝혀졌죠.
    쥐나는 그동안 중앙정부 차원에서 겉으로는 소수계의 문화와 경제 개발을 지원해 왔습니다. 청나라 말기인 1911년 국민당 지도자 쑨원(孫文)은 쥐나가 국가적 민족으로 통합되지 않아 강성대국이 되지 않았다면서 ‘삼민주의’를 주창했죠. 그는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족, 그리고 위구르와 카자흐가 포함된 후이족 등 이른바 ‘중국의 다섯 사람들’을 내세웠습니다.
    쥐나는 역사적으로 남북으로 나뉘어 통치됐고 5개의 왕국으로 분리됐습니다. 몽골과 돌궐, 티베트는 쥐나 한족의 마지막 왕조인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만 해도 지금보다 영토가 3배나 넓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소수계들의 언어적,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같은 민족인 허구의 한족만 해도 만다린과 우, 웨, 시앙, 하카, 간, 남부 민, 북부 민 등 8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웨(越)족 사람들의 대화를 광둥 사람들은 극히 일부만 이해할 수 있고 광저우와 창저우, 샤먼 방언끼리는 대화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쥐나 언어학자인 Y.R. 차오 씨는 “광둥어와 만다린어는 영어와 화란어 혹은 불어와 이탈리아어만큼 다르다”고 비유했습니다.

    만다린어는 20세기 초에 쥐나의 표준어 지위를 획득했고 국제어 대접을 받지만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처럼 쥐나 내 학교에서 만다린어 교육을 시켜야 하고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다른 언어들이 쓰이고 있죠.
    쥐나의 소수계는 인구 비율은 낮지만 영토 비율은 근 60%에 이르며 소수계 인구의 90% 이상이 신장과 티베트, 내몽고, 윈난(雲南) 성 지역에 몰려 있습니다. 신장은 쥐나의 6분의 1에 달하고 티베트는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한족을 이주시키는 정책에 따라 이들 지역의 한족 비율은 1982년 10%(6700만 명)에서 불과 8년 만에 35%(9100만 명)로 높아졌습니다. 3개의 자치구를 갖고 있지만 한족의 소수계로 편입시킨 만주족은 같은 기간 430만 명에서 128% 증가한 980만 명이 됐습니다.
    구이저우(貴州)성의 거라오족은 8년 만에 714%라는 믿기 힘든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높은 출산율 외에도 출신 민족을 한족에서 바꾼 결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다른 종족 간 결혼을 할 경우 이들 자녀의 등록민족 신고는 만 18세에 결정할 수 있죠.
    이 같은 증가는 형식상일 지라도 소수계에 대한 상대적인 특혜 덕분이라 할 수도 있겠죠(?). 쥐나 당국이 인구 억제를 위해 강력 추진한 한 자녀 정책을 소수계는 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적용받지 않고 세제 혜택과 이중언어 사용을 통한 공직 기회의 확대, 토착 종교, 문화 활동 보장 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식적이라 할 지라도...
    이런 이유로 쥐나에서 몽골족의 양고기 스프와 무슬림의 국수, 조선족의 바비큐가 쥐나 어느 도시에서나 맛볼 수 있을 만큼 퍼져 있죠. 또한 소수계의 의복과 문화 예술이 쥐나 일반 가정에까지 확산되고 있?니다. 현재 베이징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 중의 하나는 티베트식 체인점 ‘마케-아미’죠. 이곳에 가면 부유층이 티베트의 전통 음악과 공연을 감상하면서 미모의 여종업원의 시중을 받으며 양고기 바비큐인 ‘야크 카봅’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이룬 남부 사람들은 문화적 정치적 차별성을 내세우고 있죠. 코미디언들은 상하이 말투와 스타일로 교양과 사업 안목이 부족한 북부 사람들을 조롱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베이징 사람이 상하이에서 물건을 살 때 만다린어로 말하면 값을 깎기도 어려울 뿐더러 바가지를 쓰기 일쑤입니다. 날로 높아지는 광둥성 사람들의 자각은 하카족과 남부 푸젠민, 산터우 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지역의 경제 발전과 북쪽 사람들로부터 당한 오랜 구속에 대한 반감은 공통적인 현상이죠.

    이들 남부 사람들은 자신들을 전통적으로 한족이 아니라 남부를 기반으로 한 당나라(A.D. 618~907)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북미와 유럽, 동남아시아의 차이나타운 대부분은 바로 이들 남부 출신 이민자들이 세운 것들이죠.
    전문가들은 향후 10년 내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남부의 ‘당 민족주의’가 북부의 ‘허구의 한족 민족주의’에 대항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영 미디어들이 신장 자치구의 소요를 일방적인 시각으로 전달하고 티베트의 뉴스들을 은폐하는 것이 ‘허구의 짱골라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의도로 파악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쥐나의 경제적 역동성은 소수민족의 인종적 언어적 분화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부와 항구 등 중부와 북서부보다 경제발전이 앞선 지역들에서는 이 같은 경향이 더욱 확대되고 있죠.
    지속적으로 탈중심화하는 쥐나는 내부 갈등과 인플레이션, 경제 발전의 불평등이 문화적 언어적 분화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그 위협은 과거 중원 왕조를 종식시킨 적도 있는 남부 지방 사람들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우월하고 외국에서 교육받았으며 화교의 지원을 받는 그들이....

    현재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힙니다. 현재 쥐나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이죠. 민족차별에 의한 압력이 사회에 암묵적으로 만연되어 있죠.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쥐나 소장파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쥐나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허구의 한족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습니다.

    <a href=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87337 target=_blank>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87337</a>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한족은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통설이 학술연구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 현재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秦)은 소수민족인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소수민족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a h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72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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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분쟁의 도화선? 티벳과 위구르 사태

    최근 일련의 티벳과 위구르 사태는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쥐나가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는 한편 일본군과 싸우던 1940년대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존재했습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군이 1949년에 동투르키스탄을 침략해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현재 활동 중인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ETIM은 알카에다와 유대를 맺고 있고, 과격파 이슬람 세력이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실시하며 미래를 약속하죠. 오사마 빈 라덴을 추종할 경우 그가 세계적인 이슬람 국가를 수립할 때 이슬람 위구르인들이 동투르키스탄을 재건하여 통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장 폭동의 여파 속에서 알카에다의 북아프리카 동조세력인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AQIM)는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죠. 위구르족은 멀리 떨어진 동족 사촌들로부터 지원을 받습니다. 터키의 한 고위 관리는 쥐나 정부의 위구르 탄압을 이유로 쥐나 상품 불매운동을 촉구했습니다.
    터키가 또한 나토 회원국이란 사실을 쥐나 외교부는 유의하고 있죠. 이런 터키의 지위가 전략적 문제를 야기하여 후진타오가 G8 정상회의장에서 철수한 것입니다. 쥐나 정부는 여러 변방지역에서 대두되는 위협과 도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1979년 쥐나와 치열한 단기전쟁을 벌였던 베트남은 여전히 잠재적인 적이죠.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쥐나, 대만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지나해 또한 전쟁 발발 위험을 안고 있죠. 쥐나군 장성들은 대만 합병을 세계에 공언하고 있으며 외교적으로 여의치 않을 경우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티벳을 불법침략한 쥐나의 점령군은 티베트의 봉건적인 잔재를 일소하고 학교, 병원, 철도, 그리고 영화 산업 등의 광범위한 현대화를 약속하면서 대중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쥐나공산국 라디오와 신문, 광고, 영화를 통하여 쥐나는 달라이 라마를 공격하였으며 티베트의 불교를 격하시켰고 티베트의 전통 문화가 구태의연하다고 비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티베트인들의 적의를 바라보기만 했던 짱골라들은 차츰 그들이 자신들의 선전에 동조하지 않고 공산주의를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마침내 분노를 터드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선동이 실패하였음을 깨달은 쥐나는 협박과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존경받는 종교·정치가들을 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범죄자로 몰아 폭행하거나 고문하고 마침내는 사형시켰습니다. 수도자, 여성, 무력한 시민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참다 못한 티베트인들은 산발적인 저항을 하였는데 이는 티베트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수천만 티베트 인들이 체포되고 보복을 당했습니다.
    1959년 3월 10일 시위에 참여한 약 1만5천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살되었으며 그들의 시신이 라사 거리에 나뒹굴었습니다. 쥐나가 저지르는 폭력과 살인을 목격한 달라이 라마는 쥐나와의 조약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도로 피신했습니다. 3월 28일 쥐나 수상 주은래(저우언라이)는 티베트 정부의 해체를 발표하였습니다.
    친절을 가장한 그들의 속셈이 드러나자 쥐나 군대는 티베트인들에게 폭력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년이 지나지 않아 중앙 티베트에서 약 8만7천 명의 티베트인이 사살되었습니다. 포탈라 궁과 노르불링카 궁은 모두 공격을 받았고 신성한 간덴 수도원과 라모체(小初寺) 사원은 파괴되었습니다.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티베트를 지배하려는 쥐나의 의중에는 티베트의 불교를 탄압하려는 속셈도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와 불교는 공존할 수 없었죠. 쥐나 점령군은 사원의 체계와 학교, 사원, 성지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순수한 신앙까지도 탄압하였습니다. 1976년까지 6,259개에 달하던 티베트의 사원 중에서 몇 개만이 그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백만명에 이르던 수도승과 여승의 사분의 일이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폭행당하고 살해되었습니다. 성스러운 긴 역사의 교본들이 불에 태워지거나 군대의 뒷간에서 사라져갔습니다. 신성한 사원의 금, 귀한 보석류들은 사원이 폭파되기 정에 강탈되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티베트인의 문화재인 도자기, 불상, 벽화, 세공품들이 쥐나로 실려갔습니다. 이렇게 실려간 것을 녹여서 쥐나는 메달을 만들거나 국제 골동품 시장에 내다 팔아서 외화를 벌여들였습니다.

    수천 명의 억류자를 수용하고 점령 초기의 재건축 사업을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쥐나는 여러 개의 감옥과 노동 수용소를 지었습니다. 감옥에 수감된 이들은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거나 굶어죽었습니다.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은 티베트의 천연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일에 노예처럼 부려졌습니다.
    이런 일련의 모든사태의 심각성은 탄압에 반기를 들던 1959년보다 나아질 바가 없었으며 1966년이 되어서는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죠. 이때 티베트는 가장 급진적인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쥐나 사회를 대규모 재편성시켰던 문화혁명의 회오리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10년 간의 광적인 공포 정치가 실시되었으며 그러는 동안 수천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강탈범들이 전역을 돌며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죠.
    사원에 딸린 대학의 교육 과정에 심각한 규제가 가해졌으며, 쥐나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학생들만 입학이 허가되었습니다. 교본과 지도자 그리고 그 외의 교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죠.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불교 의식만이 허가되었으며 수도승들은 쥐나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조금만 그들의 체제에 위반되어도 체포나 고문을 받았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1984년 티베트 봉기 25주년 기념식에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파괴된 사원을 복구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선전을 하였지만 종교 단체에 가입하거나 불법(佛法)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장애가 뒤따랐다. 인상적인 구호를 사용하여 종교와 국가 자치의 자유를 보장하였다는 것은 단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종교개혁이 환상에 그치고 말았듯이 쥐나의 경제자유화정책도 인권 신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티베트에서의 정치적 자유는 실천되지 않았다."

    1980년 전반에 걸쳐 정치 활동을 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은 체포되거나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쥐나 경찰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향한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티베트의 시위자들은 결속하였고, 쥐나 보안 당국의 탄압에 강하게 맞섰습니다. 1988년 북경 정부는 모든 불평불만자들을 엄단하겠다고 공포하였고 1989년 3월 7일 라사에 게엄령을 발표함으로써 두 민족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수백 명이 살해되었으며 수천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은 그 해 말 북경 정부에 의해 자행된 천안문 광장에서의 대학살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하였습니다.
    1990년 5월 계엄령이 철폐되었으나 티베트의 보안군은 여전히 쥐나 통치에 대항하거나 의심이 가는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992년 쥐나는 체제 전복을 도모한 사람들과 연관된 자료를 찾아내기 위하여 가택 수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불교 관련 책자를 비롯하여 달라이 라마와 연관있는 것, 그의 연설, 녹음 테이프, 기도문, 저서 등이 검열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3년 후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공포되었죠.
    북경 군부에 의해 수행되는 현대화 과정은 전국적으로 환경에 대한 심각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티벳은 이러한 충격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죠. 그러므로 티벳의 생태적 황폐는 舊蘇聯이 비러시아지역에서 자행했던 환경 파괴처럼 쥐나의 티벳환경 파괴는 또다른 민족적 저항을 유발시키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티벳에서 表層土의 잠식을 가중화시키는 짱골라들의 고대 삼림에 대한 벌목 행위 특히 극심한 환경 파괴였습니다. 쥐나의 삼림정책 결과로 한때 티벳의 풍부했던 삼림은 황폐화되고 총 25만km2가 넘는 지역이 철저히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티벳 총면적의 1/6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입니다.

    환경 평가를 완전히 무시한 티벳 지하자원의 채굴은 철저히 생태계를 황폐화시켰습니다. 우라늄 광산들은 특히 티벳에서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1993년 20여년 동안 쥐나는 티벳을 핵폐기물의 저장소로 사용해 왔습니다. 특히 서북지역 핵무기연구소는 1960대부터 많은 핵폐기물을 생산했으며 이곳의 핵폐기물들은 모두 티벳 지역에 저장했습니다. 쥐나가 방사선 물질에 대한 안전 기준을 강화하는데 실패했다는 의심은 핵폐기물 저장 시설 주변 지역에서 암환자가 급증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환경문제의 무관심 때문에 수많은 티벳인들은 방사선 오염 물질에 노출된 육류를 먹은 후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현대화문제와 완전히 상관이 없는 또다른 행동에서 쥐나는 티벳을 핵무기뿐만 아니라 강력한 재래식 무기의 저장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최근 티벳에는 인도를 겨냥한 3개 미사일 기지의 존재가 보고되었습니다.
    1988년과 1989년의 폭동에 뒤이어 쥐나당국은 티벳의 정정 불안에 대한 복잡하고 특별한 반응이 쥐나의 목적이 결핍되는 곳에서 쥐나는 일반적인 독재자들이 사용하는 직접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티벳인들을 억압하기를 결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1994년까지 라사에만 6개 감옥소가 있어서 언제든지 수백명의 정치범을 투옥시킬 수 있죠. 인권운동가들에 의하면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라사의 6개 감옥소에 구속된 정치범의 숫자는 3~40%나 증가했습니다. 수많은 정치범들은 외부와 통신은 단절 상태에 있으며 끝없는 심문과 구타 행위를 당하고 있습니다. 타지역에 있는 감옥소 숫자는 불분명하지만, 엄청난 政治犯들을 수용할 시설일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근 신강성(신강 위구르 자치구)와 청해성에 있는 악명 높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수천 혹은 수만명의 티벳인들이 죽어 간다는 발표도 있었습니다.

    이번 2008년 티벳독립시위대의 불만 표출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짱골라의 경제적 지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짱골라는 티베트 인구에서 겨우 3.3%를 차지할 뿐이지만, 티베트 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구의 96%를 차지하는 티베트인들은 주로 농촌에서 농업이나 목축으로 생계를 꾸립니다.
    한 티베트 문제 전문가는 <에이피>(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문제는 쥐나가 티베트인을 배제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티베트는 쥐나에서도 소득 수준이 낮은 곳에 속합니다. 2005년 티베트 도시의 1인당 가처분소득은 9431위안으로, 쥐나 평균인 1만494위안에 많이 못미친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소득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는 엥겔계수도 44.5로, 쥐나 평균인 36.7보다 높습니다. 농촌에선 격차가 더욱 큽니다. 1인당 순소득은 2077위안으로, 쥐나 평균인 3254위안보다 떨어집니다.
    쥐나의 티베트 자치구 라사와 주변 성에 이어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도 2008년 3월 23일과 24일 대규모 시위가 연이어 발생했다고 홍콩 동방일보(東方日報)가 지난달 31일 보도했습니다. 신문은 신장 자치구 호탄에서 일어난 시위에는 약 1000명이 참가했으며 출동한 진압경찰에 의해 500명 이상이 강제 연행됐다고 전했습니다.
    쥐나에서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소수민족 위구르족의 활동가들로 이뤄진 '세계위구르대표대회' 대변인은 이번 시위 참가자의 80%가 여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위대는 지방 정부가 미혼여성을 저임금을 받고 일하도록 강요하는데 항의하는 한편 수감된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죠.
    쥐나당국은 다른 신장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위 관련 정보가 퍼지지 않게 강력히 단속하고 있는 것으로 신문은 지적했습니다.

    티벳과 위구르 등 여러 지역에서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립운동중입니다.

    동아시아 모든 민족들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한낱 무협일지라도 과연 불공평하게 다루어져도 좋은지 또 그것이 당연한 것일까요?

    허구의 종족 짱골라들이 허구의 역사조작 탐원공정을 벌이고 한국,북한,몽골,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자기들의 잃어버린 영토라 주장하는 교과서마저 만들고 있는 이때에...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면피용
    작성일
    10.05.10 10:24
    No. 5

    글 쓰신 분이 말한 것이 무협지를 잡기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죠
    판타지를 잡기 힘들게 만드는 것중에도
    백인을 우월하게 그려놓는 점이 있죠
    변태가 약자로서 쾌감을 느끼듯
    사대주의는 나름의 쾌감이 있나봐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 허교주
    작성일
    10.05.21 00:37
    No. 6

    한배달 쥬신님의 의견 잘 보았습니다.
    저도 공감하는 내용이라 보는 내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군요.
    고구려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인양 왜곡하는 중국의 동북아공정에대해 관심이 많아서 였을 겁니다.
    과거가 없는 현실과 미래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런것을 알기에 중국이 저렇게 역사를 왜곡하는게 아닐까요?
    우리 정부도 선거철 표심 잡기위해 일본의 역사왜곡만 비판할게 아니라 중국의 역사 왜곡도 똑같은 선상에서 놓고 그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고 사과와 반성을 받아내야 할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쥬신님의 비평글에 좋은 내용이 담겨 있음에도 아쉬운점이 몇개 보이는 군요.
    우선 중국 정부와 그 들이 보이는 행태가 아무리 밉더라도 상대를 폄하하여 눈살을 찌푸리게하는 짱꼴라등의 인종 비하 발언은 보는 내내 찜찜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런 식의 감정적 대응은 당사자들에게 좋은 빌미가 됨은 물론 그들의 행태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의 눈살도 같아 찌푸려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좀 더 주관적이 아닌객관적인 관점에서 의미를 전달 하면 더 많은 분들이 공감하며 중국의 행태에 분노 할거라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아쉬웠던 점은 중국 정부와 그들의 행태에대한 비평만 있었지 우리가 그걸 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젼 제시가 부족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우리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글과 중국 일색의 글에 대한 일침을 놓는 내용의 글을 쓴적이 있었는데 문피아에 글을 올리는 작가님들이 앞장서서 이제부터라도 중국과 한족 우월을 표방하는 글을 자제하고 좀 더 재미 있게 독자들에게 다가가면서도 제대로된 가치관을 형성할수 있는 글을 써야 할 것입니다.

    좀 주제에 벗어나는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은 세종대왕님이 아닌 이정기 장군 입니다.
    고구려 멸망이후 발해를 세운 대조영도 대단하고 존경할만 하지만 고구려 유민으로서 한족들이 득실거리는 중국 한 복판에 그들의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제 나라라고 하는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는 국가를 건설한 이정기 장군이야 말로 진정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다시 아쉬운 점은 중국 본토에 우리 배달민족의 나라를 세웠던 이정기 장군의 업적을 우리민족 우리 대한민국에선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겁니다.
    또한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중국에서 절도사를 하다 반란을 일으킨 인물 정도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건 기록에 잘 남기지 않는 중국 역사서에도 이정기 장군이 세운 제나라가 완전히 다른 생활과 복식의 문화를 유지하며 독립된 국가로 3대 60년을 이어같다 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말입니다.
    물론 이젠 중국내에서도 단지 반란군 수괴정도로 비하하는 분위기 입니다.
    이렇듯 많은 부분이 축소 왜곡되었다는 점이 저의 분노를 자아내게 합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유명 장르소설가이신 조00 씨의 글에 중국 한족은 잘나고 멋지며 착한 존재로 묘사되었고 우리조상이자 중국 본토가운에 나라를 세운 이정기 장군은 정작 흉악한 오랑캐로 묘사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앞으론 우리들이 바꾸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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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1 뱈코
    작성일
    10.08.01 10:08
    No. 7

    여담이지만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라는 책을 보면
    중국 문명은 발해연안문명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 문명을 세운 민족이 우리 민족일 것이라 하네요.
    심지어 황제와 공자가 동이민족이라고 추측된다고 하니까요
    실제로 중국에서도 일원주의에서 다원주의문명으로 은근 말을 바꾸고 있으니까요
    중국에서는 역사를 왜곡하려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천천히 묻어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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