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년 7월 17일 화요일. 날씨 흐리고 비.
비가 온다. 번개도 몇 번 쳤다.
비오는 날은 감전사고 때문에 전류가 흐르는 물질을 가지고있지 말라는데 내 생각엔 책도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 오늘 소설 광마를 쥐고 있으며 등에 몇 번 전기가 흘렀던 것을 기억하면 그렇다.
그때 쓰는 단어가 전기인지 전율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번개와 같은 번쩍임 속에서 난 그를 보았고 이에 감전당했다.
광마. 그것은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이었다.
오늘 아침.
"내 안에 미친 마귀가 살고 있다!"
선전문구 때문일까? 나는 그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상태에서 환상을 품었고 광마에 대해 서술된 모든 책을 집어왔다.
이윽고 고아였던 그의 어린 시절을 보게되었고 서서히 숨죽였다.
주인공은 어렸다. 그래서 약했다. 하지만 그는 그때에도 잡아먹는 이였지 잡아 먹히는 이가 아니었다. 태생적인 육식동물이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서린 광기를 보았고 죄책감이란 감정 자체가 없는 그에게서 통제하지 않는 살인본능을 보았다. 그의 감정은 분명 다른 '인간'과 달랐으며 생태계에서 인간보다 한 단계 위의 포식자임이 분명했다.
그는 먹이감과 건들 수 없는 이를 분별할 수 있었고 지능적이었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지적 살인마가 될 자질이 그에겐 충분했다.
잔인함을 표현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잔인함에 치밀함을 넣는 것은 어렵다. 그 계획의 깊이와 심미적 효과가 충실해야만 그것에 예술이란 단어가 붙는다. 그제야 그것을 살인의 미학이라 부른다. 그리고 광마는 이를 즐기는 자였다. 이는 대단하다.
이제껏 살인에 무감각해진 이는 많았어도 살인을 즐기던 이는 드물기에 그러한 인물을 표현하려는 작가에 놀랐다. 정말 당신은 그러한 살인자에게서 매력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캐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 답을 알기 위해 소설을 열심히 읽어갔다.
작가 박성진은 스타일리스트였다. 사건의 시작과 끝에 작가의 고단한 칼질이 들어가 있었다. 분위기를 내기 위해 문장이 짧게 짤려나갔고 어떠한 것은 길게 쳐졌다. 벌어지는 사건의 흐름은 감각적으로 굽이쳤고 이 소설의 사건을 좀더 극적으로 보이도록 꾸며냈다. 나는 안도했다. 그는 광기를 가진 마귀를 빚어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그때즈음 주인공은 양부모의 밑에서 지내게 되며 그들의 사랑에 광기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작가가 원하는 주인공은 어쩌면 내 바람과 다를 지 몰랐다.
그는 옳고 그름을 알아갔고 자기 편이 누구인지 누가 적인지를 판단하게 되었다. 같은 편을 위할 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큰일이었다. 번뜩이던 광기가 점차 소멸하고 있었다.
만약 보편적 이성을 가지게 된다면 잔인하다는 것만으로 그가 미친 마귀가 불릴 수 있을까?
나의 의문을 남겨둔 채 그는 성장하고 있었다.
제 나이 또래의 양떼 사이에 들어간 그는 평범한 아이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주인공은 여전히 그의 주변인들을 포식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었으며 공부를 통해 지식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는 만족스러울만한 일이었다. 지식은 살인을 단순한 충동적 행위 이상으로 규정할 기본 요건에 해당한다.
일찍이 한니발 렉터는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이전까지 폭력적이고 비이성적, 충동적인 행위로 여겨졌던 살인에 우아함과 격조를 더했으며 어린아이가 호기심으로 잠자리를 분해하는 것과 같은 투명한 순수와 삐뚫어진 마음으로 살인미학의 대가 자리에 올랐다.
이로인해 그의 살인은 마치 믿을 수 있는 이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처럼 경악스러웠으며 언제 돌발스러운 살인을 벌일지 모를 철렁함을 겸비하게 된다.
광마 적무한, 그도 지적 치밀함을 바탕으로 양떼 무리 안에서 고요히 숨쉬며 살인의 절대 타이밍을 기다리는 포식자가 될 것인가?
그 의문은 2권을 넘어서며 답을 받았다.
그는 처절할 정도로 상대를 몰아 감정의 밑바닥까지 긁어낼 수 있는 지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미 균열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실제 살인을 하지 않고 말로 상상케 하여 상대를 압도했다. 살인을 벌이지 않은 것이다. 어떤 면에서 관용이었다.
이것은 그가 뭔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잔인함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사회화 되었다.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던 그는 길들여졌다. 사랑에 길들여졌다.
그는 성장기 때 양부모의 사랑에 너무나 많이 물들어 버렸으며, 그는 그의 아버지의 성정에 영향을 받았고 이들의 은원에 얽매이길 스스로 원하게 되었다.
나는 슬펐다. 그는 악인을 표방하고 있지만 더이상 악인이 아니게 되었다. 그가 택한 악의는 호의의 뒷면과 같아서 보는 방향에 따라 그 앞뒤가 뒤집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복수라는 대의가 생겼고 그의 적은 항상 인륜을 저버릴 정도의 악당이었다.
그의 복수는 평범한 이를 건들지 않고 오로지 악을 향했다. 복수의 대상에만 집중하는 주인공에게선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만한 광기가 표출되지 않았다. 이로인해 그는 잔인한 행동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정의가 되었다.
때문에 광마는 더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적에게라면 몰라도 같은 편에게는 그렇다. 두렵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아야 한다.
누구나 살해당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심은 주인공의 존재를 특별하게 만든다.
파악할 수도 종잡을 수도 없는 기이한 마귀는 별 것 아닌 사소한 것으로도 다른 이를 집어 삼키며 그것은 착한 이나 악한 이나 구별하지 않기에 긴장감을 낳는다. 착하다는 것은 방패가 되지 않는다. 그게 마귀다. 같은 편이든 적이든 함께 집어삼키는 마귀.
하지만 그에게서 잔인함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 이유나 목적 없는 이에게 표출되지 않는다. 이로인해 그가 저지르는 모든 살인은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 그와 그의 편에 서는 이들에겐 그것은 정의를 세우는 일이었으니까. 독자는 이제 그를 지지할 뿐 그의 행동에 불안해하고 긴장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잔인함은 대상을 벌벌 떨게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좀더 빠르게 얻는 수단. 그리고 타인을 지배하는 방법.
그는 정말 미친 마귀일까? 그는 악인가?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사실 의문과 동시에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는 그 잔인함을 제외하면 이미 보편적인 무협소설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으니까. 독자의 이성적 판단 수준에서 공감할 수 있는 살인자는 더이상 광기에 빠진 마귀가 아니다.
사실 그가 동료를 만든 순간부터, 그리고 그의 살인이 동료와 함께하는 곳에서 벌어지지만 그들의 눈에 정당화되어 보인 순간부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하나의 집단을 이루었고 더이상 인간사회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생태계의 포식자가 더이상 아니었고 무리 속의 지배자가 되었다. 같은 편의 믿음을 배신으로 되돌려주지 않는 지배자다. 보아하니 방관으로 인한 피해만 조심한다면 그의 곁은 안전하다.
수하들이 그에게 신뢰를 보내는가 두려움을 보내는가? 광기는 두려움을 낳고 이성은 신뢰를 낳는다. 그는 정말 미쳤는가?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난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광마 그는 한니발 렉터가 아니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도 아니었다. 옳게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이였고 잔인함은 그가 가진 무기일 뿐이다.
다음의 재미를 위해서 광마의 캐릭터는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 한계 그 이상의 노력으로 어떤 것이든 이겨나가고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강해지는 주인공의 모습에선 재미를, 죽을 각오로 노력하면 안될 것이 없다는 메시지로 감동을 전한다.
둘. 무덤한 듯 하지만 고아인 주인공의 잠재의식엔 사랑받지 못한 아픔이 남아있다. 그의 하나밖에 없던 친구 또한 부모에 대한 사랑에 목말라 있었고 이 둘의 감정을 공조시켜 주인공의 사랑에 대한 갈구를 캐어내 독자가 연민을 느끼게 만든다. 동시에 우연히 얻게 된 양부모의 사랑으로 인한 치유를 통해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셋. 잔인하고 냉혹한 주인공의 복수법은 독자가 가진 울분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털어내 통쾌함과 시원함을 주고, 그 과정의 치밀함으로 지적 만족감을 독자에게 안긴다.
넷. 마치 악한 듯한 겉모습과 달리 그가 정의라는 것이 항시 주지시키고 있기에 복수를 하는 그에게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를 응원하게 된다.
다섯. 무리를 이끄는 지도력과 부하에게서 얻는 신뢰감, 그리고 세력의 급격한 형성을 바탕으로 그의 능력을 보여 독자를 즐겁게 하고 더이상 혼자가 아니라 다양한 기능의 집단을 이용해 무림 전체를 상대하도록하여 날개를 단 주인공의 행보에 감탄하게 된다.
작가가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재미를 주고 싶었던 것은 애초에 위와 같은 것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창 밖의 비는 그쳐있었고 번개도 더이상 치지 않는다.
광마는 더이상 차가운 번갯불 사이에 섬뜩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등이 켜진 밝은 곳에 나와 세상을 호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광마는 그래서 표준화된 매력을 갖추게 되었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수천 수만명을 죽이면 영웅이라 하였다. 광마는 영웅이다. 영웅은 존경받는다. 그는 세상에 큰 이름을 남길 것이다. 그건 경외스런 이름. 강호무림에선 그것은 살인자의 이름이 아니다.
그는 악을 잔인하게 벌하는 심판자이며 파도처럼 목적을 위해 나아간다. 그는 한계를 극복하고 고통을 곰씹으며 노력해왔다. 그래서 그의 강함은 논리적 힘을 가진다. 의지가 강철같으며 이로인해 무력은 점차 끝을 알 수 없게 변해간다. 인텔리한 살인마답게 그의 지략또한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서 그 위의 하늘에서 노닌다.
그는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고 두말할 것 없이 강하다.
독자는 강하고 똑똑하고 잔혹한 주인공이 행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의 복수극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광마는 매력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처음 느꼈던 미친 마귀의 포스, 그 아찔한 존재감과 소름끼치는 광기의 아름다움은 어느새 식은 맥주처럼 거품이 빠져있었다.
이정도의 세련된 사건 서술능력을 가진 작가라면 예측할 수 없는 심리로 불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살인을 벌이는 미친 살인마의 살벌한 아름다움을 표현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살인의 대상이 너무도 확연한 악의 징벌자는 이해하기 쉽기에 기이하고 모호함이 없다.
대상의 불특정성을 부르는 광기는? 통제할 수 없는 살인 충동은?
애초부터 그렇게 설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이 남는다. 똑똑하고 강하고 적에게 잔인한 전형적인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 이상하게 슬프다.
하지만 이제껏 이런 살인마의 성정을 타고난 주인공은 없었기에 그 가치만큼 광마는 엄청난 기대를 불렀고 또 그만한 퀄리티로 나에게 답했다. 정말 미쳐있진 않더라도 쉽게 볼 수 없는 잔인하고 냉혹한 주인공의 모습은 독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인공이 강해지는 만큼 긴장감은 시들지언정 사건의 완성도와 재미는 극찬할만 했기에 이 소설은 대단히 인상깊게 다가왔다.
수비범위를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뒤늦게 광마를 읽게 되었지만 하루 잡아 쭉 완독하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마가 벌였던 살인을 추억하며 그의 흥미진진한 복수극을 앞으로도 기꺼운 마음으로 지켜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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