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에 관해서 크게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비평이란 문학 작품에 딸린 보너스정도가 아니다.
현대에 있어서 비평은, 비평 그 자체로서 독립된 별개의 문학이론이자 문학평문인 것이다.
나는 이제껏, 생선이라는 비평가가 「냉정한 오리발」이라는 소설 작품을 비평하기 위해서 「냉정한 오리발」을 창작한 작가에게 허락을 구하거나 심사를 받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허락을 구하거나 혹은 ‘비평해 주세요’라는 작가의 요구를 통해서 쓰여진 비평은, 비평이 아니라 ‘감상문’정도가 된다.
비평이 작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비평을 감내한다. 거나
(고무판에서의)비평은 작가에게 도움이 안 된다. 등의 생각은 엄밀하게 말해서 ‘비평’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현재 토론란에 올라오고 있는 ‘비평’쟁론은 기이하게도 ‘비평’ 그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들이다. 다만 요점은 ‘비평’을 하자, 혹은 금하자의 차이인데, 원론적으로 현재 고무판에서 비평은 허가제가 아닌가? 그 허가제의 기준은 금강이라는 개인의 허락이 아니라, ‘비평가(혹은 비평가가 쓴 비평문)’의 자격요건에 대한 일반원리에 입학한 허가인 줄로 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싸울 필요가 없다.
비평의 자격요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비평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비평을 하자 말자 혹은 비평이 필요한 가 불필요한 가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냉정한 오리발」을 쓴 오리발 작가가 비평에 반대한다 하여도 닭발씨는 얼마든지 비평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오리발 작가가 닭발씨에게 돈수백배하며 비평을 해달라고 졸라도 내가 싫으면 그만인 것이다.
다만 비평을 하려면 자격에 맞는, 비평의 자격을 갖춘 비평을 하라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평가의 자격 요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착각이 드러난다.
혹자는 비평의 자격요건을 반박하며, 비평은 독자의 당연한 권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착각도 이정도면 대 착각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비평은 ‘독자’의 권리가 아니다.
책을 읽은 독자의 권리는 감상문이나 독서일기 정도가 다다.
공개적인 마당에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독자’라는 감투만 필요한 게 아니다.
공개적인 자리에 올리는 글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비평뿐만이 아니라 비난조차도 가능하다. 그건 자유다.
하지만 권리의 문제라면 그건 좀 다르다.
비평에는 권리가 없다. 버나드 쇼가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버나드 쇼는 “문학을 평가할 수 있는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누가 감히 문학을 평가할 것인가?”라고 일갈하며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다.
그러나 어쩌랴? 버나드 쇼가 그토록 소리쳤건만 비평은 여전히 쓰여진다.
문학작품을 비평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지만, 이미 비평은 쓰여지고 있다. 대체 비평이 무언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문학작품을 비평할 권리가 없다면, 대체 비평은 무엇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한 작품 혹은 작가의 생사여탈을 쥐락펴락하는 것이 비평이다.
따라서 비평은 권리가 아닌 책임과 엄밀함을 필요로 한다.
순문학을 키치문학(무협/판타지/만화 등)과 비교하며 비평의 타당성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하여 그들은 비평의 타당성만 말하는가?
순문학에서 이루어지는 비평의 엄밀함, 비평가의 엄청난 비평전문소양에 대해서는 어찌해서 말하지 않는가?
순문학의 대가들도 비평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맞다(그러나 겸허히 받아들이는 대가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똑같은 논리로 순문학의 대가들 작품을 비평하기 위해서, 비평가는 순문학의 대가가 들인 공과 비견해도 전연 손색이 없는 정도의 공력을 들여서 비평문을 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현재 고무림 토론란의 쟁점이 된 비평(批評, Criticism)은 문학비평에 한한다. 아브라함은 비평에 관하여,
<문학작품의 定義, 分類, 分析, 評價에 관한 연구>
라는 매우 짤막하면서도 강렬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비평에 관하여 정의, 분류, 분석, 평가를 내릴 수 있을 정도의 공력이 되려면 최소한 수년에 걸친 전문적인 학습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비평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재 고무판을 시끌벅쩍하게 만들고 있는 ‘실제적-비평(Practical criticism)'이다. 실제적 비평이란,
특정한 작가나 작품에 관한 비평을 말한다. 실제적 비평에서 인상비평이나 제단비평이 분류되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또 하나는 ‘이론적 비평(theoretical criticism)’이다.
문학작품의 고찰과 해석에 적용이 될 일련의 제반 용어와 구분과 범주, 그리고 이들 작품과 그 작가들을 평가할 ‘판단기준(criteria)’을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바로 이론적 비평의 최초 대작으로 통함).
즉 쉽게 이야기하면 이론적 비평이란, 비평을 위한 비평, 비평의 근간을 마련하기 위한 이론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적인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이론적 비평을 배워야 한다.
이론이 빠진 실제적 비평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런 비평은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문이나 독서일기, 메모라고 하는 것이다.
순문학의 경우 이미 비평은 문학 장르 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지만 대중문학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비평에서 논외의 대상이다.
대중문학, 그 중에서도 무협소설은 비평이 전무하다. 생선은 한국 최고의 키치-문학을 무협소설이라고 본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무협소설에 대한 비평은 하나도 없다. 서울대 전형준교수가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를 출간하기는 했으나, 이는 문학-비평적 의미에서의 비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동대학원 중문학과의 유경철씨가 <김용 무협소설의 중국 상상 연구>라는 박사논문을 발표했다고 하는데(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이 또한 비평은 비평이되 한국의 무협과는 별개인 논문일 뿐이다. 이 외로 두 편의 석사 논문이 더 있다고 하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현재 한국에서 무협소설에 관한 비평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무협소설의 비평은 미미하다)
무협 소설에 관한 비평이 전무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한국의 경우 이론적 비평을 습득한 비평가일 지라도, 실제적 비평에 필요한 한국의 무협소설(혹은 무협소설 작가)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비평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둘째,
문학이 권력화 되어 버린 마당에서, 키치소설(무협/환타지/포르노 소설 등)은 문학의 주류에 합류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버렸다. 요즘의 비평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주례사비평이라고 말한다. 요즘의 비평가는 이미 비평의 정신을 상실한 지 오래다. 밥을 굶지 않으려고 그들은 열심히 주류에 편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론과 실제를 모두 갖춘 비평가에게)무협소설이 제대로 된 비평을 얻는다? 심히 억울하지만 한 마디로 꿈도 못 꿀 일이다.
셋째,
장 클로드 바레유, 볼테르, 자크 뒤부아, 죠르쥬 바타이유, 레지 메사크, 프랑수아 포스카, 알베르, 오스틴 프리먼 등등 수 없이 많은 비평가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서구의 대중소설(심지어는 포르노소설 조차도 에로시티즘으로 승격되지 않았는가?)은 커다란 비평의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무협소설의 경우 비평의 틀은 고사하고, 아직까지도 무협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미미한 수준이다. 이는 비단 독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비평은 단순히 ‘평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생선은 비평을 통해서 문학작품은 정의, 분류, 분석, 평가되어진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서 무협소설을 읽으며 정의, 분류, 분석을 내릴 수 있는 이론적 틀이 있는가? 그러한 틀을 갖춘 지식인이 있는가?
무협소설을 비평할 만한 이론-비평이 전무한 마당에, 비평을 하겠다는 건 비평이 아니라 감상문을 쓰겠다는 소리다.
생선은 아직까지도
노트에다 감상문(비평이 아니라 감상문일 뿐이다)을 적어가며 무협소설을 읽고 있다.
감상문으로만 끝나는 이유는, 생선 스스로가 평론에 관하여 무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나의 노트제목은 ‘독서일기’일 뿐이다.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평론은 있을 수 없다.
고무판에 이는 비평에 관한 쟁점은 정작 비평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비평에는 비평의 자격요건이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
비평은 작가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평은 ‘평론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양’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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