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욱의 농풍답정록을 읽은 소감은, 금년 들어 읽은 가장 좋은 무
협중 충분히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였다.
좌백의 대도오를 시발로 하여 시작된 제2세대 무협에는 몇가지 특징
이 있다. 그리고 그 좌백을 필두로 하여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무협 2
세대 작가들은 모두가 신기할 정도로 나름대로의 충분한 능력을 가지
고 있었다.
뫼 절정기에 내용을 훑어보면, 당시 몇 달간 뫼의 감수를 봤던 내
눈에도 최소한 좌백을 제외한 7,8 명 정도가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이런 재목들이 어디 숨어 있었던거야? 할 정도로.
그러나 지금까지 그 가능성을 증명해보이고 있는 신인들을 별로 없
다. 그 이유를 굳이 여기에다 풀어놓을 이유는 없을 듯 하다.
그러나 좌백의 대도오를 보면서 "햐, 이 놈 봐라. 물건이 나타났
네?"(어차피 혼잣말이니.. 개의치말게나 좌백^^)라고 했던 그 감탄을
다시금 토해내게 만든 후배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런 감탄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좌백 이후에도 몇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아직 글을 제대로 써내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이 무협을 떠나지는 않았으되, 너무 느리다는 점. 그래서 책이 나갈
때마다 무림동에서는 아우성이 나지만, 실제로 판매에서는 전혀 신통
치 않다는 점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무협은 특
성상 다작이 아니면 계속해서 신인으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
이다.
2세대 작가중 본인의 첫 번째 제자였던 풍종호 또한 나름대로의 재
질을 가지고 있고, 근래에는 무림동에서 많은 팬을 확보한걸로 안다.
그러나 그도 판매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과
작(寡作)이라는 한계로 인해 판매가 부진해서다.
김민수님이 일반 작가들과의 대화에서 무협작가 다작.. 좌백의 과작
이 일반작가로서는 속필, 다작이라고 하여 부끄러웠다는.. 글을 썼지
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유는 일반 문학작품들이 과연 완성도가 얼마나 높은가를 차지하고
서라도 무협에는 나름대로의 틀이 있다. 그리고 그 틀을 가공하여 최
상의 재미를 일구어 내는 것이 바로 무협이다.
한가지 화두에 천착하여 보고 또 보는 것과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만, 일반 문학을 하다가 무협을 하겠다는 사람
들을 몇 만났고, 가르친 적도 있다.
결론은 그들 누구도 무협을 쓰지 못했다.
문학쪽으로 재질이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무협의 그 특별한 맛은 그
냥 글을 쓸 줄 안다고 만들어낼 수 없다.
무협을 쓰던 사람은 시를 쓰라면 그 나름대로 또 고민을 해야할테지
만 그렇지 않고 소설이나 기타 문학을 쓰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이
건 이미 증명이 된 사안이니 논외로 하고자 한다.
결론은 무협쓰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백야가 뚜렷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
럼 임준욱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글로서 충분
히 보여주었다.
무림동에서 몇 번 논의된 전작에 비해서, 내지는 달라진게 있다 없
다. 혹은 어떤 무술을 어떻게 라는 것에 대해서는 작가는 신경을 쓰지
않음이 좋다.
소설은 허구이고, 다큐가 아닌 까닭이다.
있을법한 것을 가장 그럴 듯 하게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소설
이다. 누구도 그 자체에서 완벽할 수도 자유로울 수도 없다. 그 방면
으로 전문가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전문가도 트집을 잡을
수 없도록 완벽하다면 최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과연 픽션
일 수가 있고, 재미를 끌어낼 수가 있을 것인가?
인체구조는 팔이 안으로만 굽게 되어 있다.
그러나 화골신권이란 무공은 팔이 바깥으로도 휜다. 통비공은 이쪽
팔의 길이를 더해서 저쪽 팔을 길게 만들어 상대를 치기도 한다. 사실
에만 기초를 둔다면(여기서의 사실은 일반에 알려진 것만을 의미한다.
우리가 신비하게 느끼고 있는 비인부전의 어떤 것은 제외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그럴 듯 하게 들리고, 또한 재미가
있는가 이다.
한문의 쓰임도 거의 완벽했다.
다만 초식의 명칭은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워서 이 점은 조금 더 연
구했으면 한다.
장문(掌門)이 군데군데 장문(長門)으로 오기되어 옥의 티였고, 나무
에다 개미(ant)를 얹어둔 것은 무림동에서 회자되었듯이 압권이었다.
농풍답정록은 어떻게 보면 위기가 없다.
그래서 자칫 잘못 읽으면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글에서 처음과 끝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정(情)이
라는 한 글자로 압축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부와 제자, 남자와
여자…… 친구와 친구. 그렇게 사람들이 사는 정을 천착한 글이 바로
이번 농풍답정록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이 글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모든 정이 세속 일변도로 흘러 누구나 다 그런 정으로 묘사
된 것은 삶의 다양함을 견주어 볼 때, 조금 모자란 바가 있는 듯 하
다. 사부는 사부대로, 제자는 제자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는 부모
대로 그런 정이 흘러갔으면 조금 더 좋아보이지만 4권이란 분량 안에
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을 갈무리 할 수 있었음은 임준욱의 능력이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흠을 잡자면 화산의 검성이 우인복을 키우면서 금룡과 손을 잡
는 것에는 당위성이 부족하고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런 작은 무리수
들은 조금만 더 신경쓰면 좋았을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흘려볼 수도 있지만 임준욱은 이 글을 쓰면서 대단히 많은 자료를
참고했음이 눈에 들어온다.
노력했다는 의미다.
자질에 노력이 덧붙여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조언을 덧붙인다면, 그렇듯 잔잔함 속에 한번쯤은 구름 속에서 용이
꿈틀거리듯이 큰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라는 점이다. 거대한 용의 비늘
이 구름 속에서 빛난다면 사람들은 긴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용의 실
체가 쩍 벌린 입으로 3D 안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독자의 눈앞으로
뛰쳐 나올 때, 독자들은 숨을 멈추게 된다.
이런 점에서 농풍의 마무리는 아쉽다.
이렇게 되어 이렇게 끝나리라……
하였을 때, 그렇게 끝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반전.
그것은 독자의 무릎을 치게 만드는 필수 요소인 까닭이다.
식스센스라는 영화가 바로 그런 점에서 절묘하지 않았던가?
임준욱은 이번 글로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특이하게 다른 사람들은 잘 쓰지 않는 패턴인 성장소설을 계
속해서 구사해냈고, 나름대로의 성과를 충분히 거두었다.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점으로 보
인다. 그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면 10년 뒤에도 이 자리에서
이름이 거론될 작가로서 충분히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서
이 글을 마감한다.
10월 마지막날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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