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일보의 성밖에서에 실린 글들을 모은 것들입니다.
짧은 지면에 실렸던 것이라 하나씩 올리기 보다는 묶어서 올립니다.>
2001년에 다시 만나는 낭만주의자, 초류향.
- 신 초류향, 고룡, 시공사, 2001년
10여 년 전, 무협소설은 만화가게의 누르스름한 조명 아래에 있었다. 그 후예들은 오늘날, 대여점에서 보다 젊은 독자들을 상대하고 있다.
10여 년 전에 비해 무협은 ‘사회적으로’ 좀 더 발전한 것일까?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좀 더 오래된 옛날로 돌아가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30년 전, 두툼한 하드 커버에 고풍스러운 한자어 표제를 달고 삼국지며 초한지와 같은 동양 고전들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며 이따금 머리 식힐 시간이 필요하던 문사들의 서가를 장식하던, 무협소설 국내 유입의 초창기를.
소설보다는 비디오 시리즈 물로 더욱 유명한 대만 작가 고룡의 <초류향>은 1969년에 그 1편인 <혈해표향>이 쓰여지기 시작했고 1979년 마지막 에피소드인 <오야난화>가 출판되었다. 국내에서는 5화인 <편복전기>까지만 번역이 되었는데, 이번에 6.7.8화가 최초로 번역되면서 <신 초류향>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나왔다.
초류향은 출발부터 르블랑의 <괴도 뤼팽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지극히 가볍고 낭만적인 도협(盜俠)의 모험담이다. ‘초류향’이라는 이름은 중국인들에게 ‘제갈공명’이, 영어권 독자들에게 ‘간달프’라는 이름이 표상하듯이 만사여의한 초인의 상징이다. 초류향이 제갈공명이나 간달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도 그가 보다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낭만주의자라는 점일 것이다. 2001년이라는 시대에 다시 보게 되는 낭만주의자의 얼굴은 그 시절과는 사뭇 다르다.
<신 초류향>에 수록된 초류향의 후반부 에피소드들은 앞부분에 비해 다소 혼란스럽고 암울한 느낌을 주는데, 굳이 냉정하게 평하자면 다작과 영화계에서의 성공으로 글에 찰기가 없어진 작가의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거칠 것 없던 청년 초류향 역시 나이가 들면서 세상의 부조리와 불가항력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하는, 다소 너그럽고도 씁쓸한 감상도 지울 수 없다. 초류향 시리즈의 올드 팬이라면 그 씁쓸한 뒷맛을 즐겨볼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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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기린외전, 좌백, 시공사
무협(武俠)소설은 무엇인가. 가장 짧고 일반적인 대답은 ‘무와 협에 대한 이야기’다. 무는 수단이며 협은 목적이다. 한 사람이 누구도 풀어줄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무엇으로 그 원한을 갚을 것인가? 지독하게 고루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이자, 누구나 한 번쯤 작든 크든 겪어보았을 불의에 대한 분노를 대리 해소시켜주는 것이 무협이라는 장르의 고전적인 미덕이었다.
정의와 불의의 대립이 보다 명명백백하던 지나간 시대에는, 단순하고 분명한 무협적 선악의 구도가 세계를 바라보는 독자의 시선과 일치했다. 그러나 시대는 갔고, 독자는 변했다. 그리고 무협도 변했다. 눈에 드러나는 ‘수단’인 ‘무’는 보다 화려해지고 정교해졌다. 하지만 ‘협’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좌백의 혈기린외전은 1, 2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협객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 <협객은 신의를 잃지 않는다>는 부제를 가졌다. 한 평범한 농촌 총각이 천하제일고수 혈기린의 가면을 뒤집어쓰기까지의 과정이 그 내용이다. 제목이 혈기린외전인 이유는, 혈기린으로 살지만 혈기린이 아닌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강호와 무림인들,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는 모럴인 협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부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바로 그 ‘협’에 대한 끈질긴 집착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무수한 무협들이 멋지게 한 칼 날리고 표표히 떠나는 검객들의 입을 통해 얼마나 자주 ‘협’을 언급했던가. 무의식적인 반복 속에서 ‘협’은 단순한 겉멋, 아니면 그저 낡아빠진 의무감 이상의 대접을 받기가 어려웠다.
주인공 왕일과 그가 만나는 강호의 인물들이 고민하고 토로하는 ‘협’은, 케케묵은 당위가 아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모순까지도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그들이 가장 협과 일치하는 순간은 스스로를 졸장부라고 선언하는 바로 그때다.
‘무’가 진화하고 있는 동안 팽개쳐져 있던 ‘협’. 혈기린외전은 <무협>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현판에서 먼지가 덮여 보이지 않던 글자인 ‘협’을 정성껏 닦아내 햇빛 아래 드러내게 만든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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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곤불이기 , 임준욱, 마술램프 (전5권)
건곤불이기는 무협 판타지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크로스오버는 아니고 오롯한 무협이다. 차라리 신무협에 가까운 작품인데, 여기서 신무협이란 신간이라는 의미로 ‘신’을 머리에 붙인 용어가 아니라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무협의 특정한 경향을 이른다.
황당무계함을 경계하고 인간의 성장이나 사실적인 풍속 묘사에 천착하는 것이 신무협적 사조의 경향인데, 덕분에 대체로 글에 무게가 있지만 부드럽게 읽히지 않는 일장일단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임준욱의 글은 신무협적인 무게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글이 빡빡하지 않다. 그의 글맛은 아주 순하다. 복수와 음모와 패권다툼과 구도자적인 결투까지도 있지만 그것들을 아우르는 정조는 범부의 눈높이에 맞춰진 온후함이다. 작가의 세 번째 소설인 건곤불이기는 그런 의미에서 작가 본연의 세계와 궁합이 잘 맞는 이야기 얼개를 가지고 있다.
건곤불이기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세계가 만나는 이야기다.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대구들이 존재한다. 부자들의 거리와 빈민들의 거리, 평범한 요리사 집안의 아들과 흑도를 주름잡는 방파 두목의 말괄량이 딸, 하늘을 나는 강호의 고수들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범부의 인생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요리사의 아들이 무림고수가 되는 성장담인 동시에, 어린 아들이 평범하고 무기력해 보이던 아버지를 이해하면서 어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쉬운 것은 그야말로 초지일관 곧이곧대로 이야기를 순서에 따라 늘어놓아 두 이질적인 세계가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사건은 한참이나 뒤로 가야 일어나고 덕분에 마무리 역시 진둥한둥 맺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토록 정직하고 온후한 방식 때문에 순하게 읽히는 맛이 살아난 셈이기도 하니, 전적으로 틀린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날 듯 만나지 않고 스쳐가는 고수와 범부의 세계를 구경하는 재미도 적지는 않은 편이니까.
자극적인 아이디어나 현란한 기교의 미디어들에 지쳤을 때, 건곤불이기는 온화한 조강지처의 무릎을 베고 누운 듯한 독서를 누리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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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객잔, 한상운, 북앤피플
도살객잔은 희대의 명탐정, 아니 명포교 팀인 ‘만화량과 저승사자들’의 이야기다. 이들이 명포교인 이유는 단 하나. 범인을 못 찾으면 범인을 만들어서라도 실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고문과 협박, 기타 등등의 점잖은 수단을 이용해서.
이렇게 야비한 주인공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주인공보다 더욱 야비한 상층의 권력자가 억지로 떠맡긴 기묘한 사건 덕분이다. 당랑재후의 고사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먹이사슬 속에서 펼쳐지는 블랙 코미디는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음산한 웃음을 자아낸다.
한상운의 강호에는 이렇듯 온통 나쁜 놈들만 산다. 악역만 나쁜 게 아니다. 아예 좋은 놈 나쁜 놈을 따로 구분할 수조차 없다. 강한 놈도 약한 놈도 한결같이 제 살 궁리에 바쁘다. 한상운식 강호의 인물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는 생존이며, 물욕과 성욕과 식욕이 근소한 차이로 그 뒤를 따라붙는다.
명예나 의리는 멸종한 지 오래다. 혹시 근엄한 체 하는 인물이 나온다면 뒤로 호박씨를 까는 악당이던가, 곧 죽을 위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무협의 구성 요건 중 하나인 ‘협’의 코빼기조차 찾아보기 힘든 한상운식 강호. 이것은 엽기의 시류에 맞춰 튀어나온 뿌리 없는 강호일까?
사마천은 호협의 무리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사람을 죽여 시체를 유기하고 간음하며 약탈행위를 하였다. 남의 무덤을 도굴하고 사사로이 화폐를 위조하며 의협에 거짓 기탁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낭만과 정의가 살아 숨쉬는 무협의 세계와는 다른 강호, 이상을 위해 필요악처럼 저질렀을 어두운 범죄가 들끓는 강호다.
한상운의 강호는 말하자면 이쪽에 가깝다. 차이가 있다면, 한상운식 강호의 인물들에게는 최소한의 이상도, 모럴도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너무나 솔직하게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에 차라리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이다. 그들에게 권선징악이라든가, 협의도를 기대하는 것은 반칙이다. 그들의 관심은 진지한 강호의 재구성이 아니라 풍자를 향해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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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생, 군협지, 생각의 나무
군협지의 원제는 옥차맹으로, 와룡생이 1959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와룡생 세 글자는 무협소설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와룡생의 이름으로 발표된 책이 워낙 많아서만은 아니다. ‘강호’를 만든 것이 와룡생이기 때문이다.
구대문파의 존재, 정파와 사파의 대립구도, 강호의 일에는 개입 하지 않는 관부. 실재하는 중국이 아니라 ‘중원’이라는 가상의 공간 위에 만들어진 이 ‘강호’는 오늘날까지도 무협이라는 장르의 표준 무대로 통한다.
물론 이 모든 요소의 창조자가 와룡생은 아니며, 와룡생이 조합한 모든 것이 여전히 유효한 것만도 아니다. 와룡생 앞에는 <촉산객>의 이수민과 <와호장룡>의 왕도려 등이 있었다. 그들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했던 와룡생은 전대의 유물에서 역사성과 종교적 색채를 제거하여 오락과 도피 효과를 극대화하는 장르적 손질을 가했던 것이다. 역사무협으로 명성을 얻은 홍콩의 김용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셈이다.
군협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당대 최고수에게 도전하는 소년 서원평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서원평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햄릿의 고뇌를 방불케 하는 갈등을 드러내는데, 부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협객의 자존심이 그를 양쪽에서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서원평의 협은 타인을 위한 것도, 공동체의 이상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협으로, 어떤 순간에든 떳떳하고 싶어 하는 소년의 순수한 치기에 가깝다. 서원평이 당대의 독자들을 감동시켰다면, 그 힘은 바로 그의 사적인 순수함에서 나온다. 공동체를 위해 보복을 자제하는 인간적 성숙이 아니라, 사사로운 정에 끌린 애틋하고도 장렬한 결말이 군협지의 대미가 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반세기 전에 쓰인 이 긴 이야기는 군데군데 느슨하며, 과거사의 상당 부분은 불완전하다. 하지만 와룡생이 그 안에 녹여 넣은 온갖 무협적 상황과 소재들이 혹시 ‘구태의연’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와룡생의 탓이 아니다. 한국무협이 그에게 진 빚이 너무 많은 탓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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