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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답변

궁금함을 질문하고 답변하는 곳입니다.



Comment ' 21

  • 작성자
    Lv.20 흑저사랑
    작성일
    03.12.02 19:00
    No. 1

    무협은..김용의 녹정기,청향비를 보세요..
    기타 소설은 무우수님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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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2 19:21
    No. 2

    저는 중국통사를 권하고 싶군요

    오히려 그것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삼국지연의처럼
    연의 종류 책들이 있는데
    그것은 백화문(중국말)으로 되어 있고 우리나라 소설종류는 못본것 같군요

    무협소설종류는 청향비, 녹정기, 연성결 등이 있군요

    기타 고사나 일화가 필요하시다면 제가 몇가지 자료는 드릴 수있을 것 같군요..

    분량은 많지 않습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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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1 이령
    작성일
    03.12.02 19:59
    No. 3

    여몽환포영님 부탁드려요

    그런데 여몽환포영이 무슨 뜻인가요? 기왕이면 함께 가르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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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둔저
    작성일
    03.12.03 02:01
    No. 4

    꿈과 환상과 물거품과 그림자인데....
    음, 제 기억으로는 언젠가 불가의 사람이 덧없음같은 것을 말할때 저걸 쓰더군요.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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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1 이령
    작성일
    03.12.03 07:52
    No. 5

    <金剛般若波羅蜜經 終>
    ◀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終

    須菩提若有人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持用布施若有善男子善女人
    수보리약유인이만무량아승지세계칠보지용보시약유선남자선녀인

    發菩薩心者持於此經乃至四句偈等受持讀誦爲人演說其福勝彼
    발보살심자지어차경내지사구게등수지독송위인연설기복승피

    云何爲人演說不取於相如如不動何以故
    운하위인연설불취어상여여부동하이고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역로역여전)
    應作如是觀 (응작여시관)

    佛說是經已長老須菩提及諸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尼
    불설시경이장로수보리급제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一切世間天人阿修羅聞佛所說皆大歡喜信受奉行
    일체세간천인아수라문불소설개대환희신수봉행

    금강반야바라밀경강화(金剛般若波羅蜜經講話) : 應化非與分 第三十二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세계에 가득히 쌓인 칠보를 보시에 썼더라도
    어떤 선남자 선녀인으로서 보살심을 일으킨 이가 이 경을 지니고 혹은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하여 일러주면 그 복이 저 보시한 복보다 더 나을 것이니
    어떻게 남을 위하여 일러 줄 것인가? 모양(相)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여여(如如)하여 동요가 없어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온갖 유위(有爲)의 법은
    꿈 같고 꼭둑각시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 ☜ ☜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응당 이렇게 관(觀) 할 지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說)하심을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여러 비구·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모든 세간의 천상 인간과 아수라들이 부처님이 설하신 법문을 듣고
    모두들 매우 기뻐하면서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나모바가 발제 발라양바라이다예 암 이리저이실리 수로다 비사야 비사야 사바하 ☜ 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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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1 이령
    작성일
    03.12.03 07:53
    No. 6

    훌륭한 호칭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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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25
    No. 7

    1. 이자성 소년의 호기
    이자성, 섬서 연안부 미지현 쌍천보 사람이다.
    부친은 이수충이라 하는데 농사를 생업으로 하였고 집안은 아주 부유하였다.
    아들을 둘 낳았는데 큰아들은 이홍명이라 하고 20년 후 또 둘째아들 이홍기를 낳았다. 곧 이자성이다.
    홍기와 조카 이과는 여덟살에 학숙에 들어갔지만 두 사람은 모두 독서를 좋아하지 않고 격투를 몹시 좋아하여 서로 양보하지 않아
    아버지 수충이 여러 차례 그들을 꾸짖고 벌을 주었으나 끝내 고치지 않았다.
    열 세 살에 홍기의 모친이 죽자 그와 이과는 몰래 밖에 나가 친구를 찾아 술을 마시곤 하였다.
    같은 마을에 유국룡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들과 동갑으로 서로 알게 된 후 매우 좋아하여 마을밖으로 말을 달리곤 하였다.
    마을 주점에서 술을 마실 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들은 마땅히 무예를 배우고 익혀 한번 큰 사업을 벌여보자. 독서가 무슨 쓸데가 있다고!”
    이튿날 제례를 지낼 준비를 하여 관제묘에 가서 도원결의의 옛이야기를 모방하여 의형제를 맺었다.
    홍기는 두사람과 힘을 겨루려고 신좌앞에 있는 쇠향로를 보고 일흔 세근짜리를 그는 한 손으로 들어올려 신전을 한바퀴 돈 후 향로를 원래 있던 곳에 내려 놓았다.
    유국룡은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들으려 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아 양손으로 깍지를 껴서 겨우 들어올려 다섯 걸음을 걷고 멈추었다.
    이과는 한 번 힘을 써 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아 유국룡처러 양손으로 들어올려 열 다섯걸음을 걷고 멈추었다.
    홍기가 또 향로를 들고 신전을 한바퀴 돈 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 놓았다.
    도사가 놀라 탄식하며 말했다. “네 부친은 착한 일을 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래서 너같은 아들이 있다니!”
    이홍기가 강개하여 말했다. “대장부는 당연히 천하를 횡행하면서 스스로 일어서 이루어야지 아버지의 가업이나 지키면서 나날을 보내는 것을 어찌 남아 대장부라 하겠어요.
    삼년전에 나는 꿈속에서 위풍당당한 신장이 나를 이자성이라 불렀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이자성으로 이름을 고치고 자를 홍기라 하겠습니다.”

    原文
    李自成, 陝西延安府米脂縣雙泉堡人. ······父名守忠, 務農, 頗饒. 生二子, 長名鴻名, 又二十年, 生次子, 名鴻基, 卽自成也. ······
    (鴻基與侄兒過)八歲就塾, 二人不喜讀書, 酷嗜拳勇, 各不相下, 守忠屢責不悛. 年十三, 鴻基母死, 竊與過出外朋飮.
    里有劉國龍, 相遇甚歡, 偕往郊外馳馬. 飮于村肆, 相謂曰 “吾輩須習武藝, 成大事, 讀書何用.” 次日, 具牲醴, 詣關廟,
    仿桃園故事. 鴻基欲較力, 見神前鐵爐一座, 重七十三斤, 只手擧之, 繞殿一匝, 仍置故處. 劉國龍掩衣欲擧, 不能動,
    兩手握之, 方起, 行五步止. 李過奮力一提, 亦不動, 如國龍法, 行十五步止. 鴻基復提繞殿一周, 置于舊處. 道士驚賞曰
    “汝父爲善, 故生汝.” 鴻基大言曰 “大丈夫當橫行天下, 自成自立, 若株守父業, 豈男子乎. 三年前, 曾夢偉將軍呼予李自成,
    今卽改名自成, 字鴻基.”
    (淸·計六奇<<明季北略>>卷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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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29
    No. 8

    이자성은 군에서 파총(영병관, 총병의 아래 지위)으로 승진하여 바로 조정에서 병졸을 징발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아
    순무 매지환과 총병 양조기는 벙사들을 이끌고 황실을 돕기위해 출병하면서 왕참장을 선봉을 삼았다.
    이자성과 유량좌는 매우 불만이 많았다. 유량좌는 자는 명보이고 대동 좌위(지금의 산서성 대동시)사람이다.
    이자성이 말했다.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꼬리는 되지 말아야지.” 양좌가 말했다. “애초에 곽자의는 원래 일개
    병졸이었지만 후에 천하의 병마를 지휘하는 대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 두사람은 이렇게 재능이 있으니
    아직 부귀하지 못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요.”
    이자성이 말했다. “대원수는 무슨 대원수! 한고조 유방, 유지원(오대 후한의 고조), 우리 명의 태조황제는
    무슨 조상이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었나? 모두 평민에서 기업을 개창한 것이야! 양총병이 어떻게 우리들의 재능을 알아주겠어.”
    당시 대군은 북진하여 난주를 지나 금현에 도착하였다. 현이 작고 현령은 겁을 먹고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왕참정은 현성에 들어가 현령을 만나려고 하였다. 몇몇 병졸이 현청에서 시끄럽게 하자 왕참장이 그들을 탄압하여
    여섯 병졸을 심하게 매질을 하였는데 그중 반이 이자성의 부하였다. 이자성이 대로하여 유량좌 등과 함께 현령을
    붙잡아 양조기를 만나러 가려 하였다. 가는 도중에 왕참장과 마주치게 되어 충돌이 일어나자 이자성은 왕참장을 찔러 죽였다.
    양좌의 처자식은 난주에서 십리 거리에 있었다. 자성은 독신이었다. 두사람은 틈왕 고여악이 무리 팔백명을 모았다는
    말을 듣고 곧 부하들을 데리고 고여악에게 투신하였다. 고틈왕 휘하의 용사는 나여재·유국룡·하일룡·마수응·유희요등
    여러사람이 있어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여러차례 관병을 격파하였다. 자성이 온 후 각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위원·하주·그현·감주 등을 공격하고 오래지 않아 기의군은 날로 발전하여 수만명으로 늘어났다.

    原文
    (自成)升把總, 適徵兵檄至, 梅撫楊鎭勤王, 以王參將爲先鋒. 自成與劉良佐不服. 良佐字明輔, 大同左衛人. 自成曰 “寧爲鷄口, 毋爲牛後.” 良佐說 “昔郭子儀本行伍中人, 後爲天下大元帥, 我二人有才如此, 寧憂不富貴.” 自成曰 “大元帥何足道. 漢高祖·劉知遠·我太祖皇帝, 豈祖宗傳下天子, 亦是平空做成事業者. 楊主將安識吾兩人.” 時師北行······過蘭州······抵金縣, 邑小, 令怯, 閉署不出. 王參將入城, 欲見令, 有兵嘩于庭, 笞六人, 半爲自成卒. 自成怒, 與良佐等縛令出, 欲見肇基. 適遇參將, 刺殺之. 良佐妻子在蘭州十里莊, 自成孑身. 聞如岳有衆八百, 率所部往助. 高麾下勇士, 有羅汝才·劉國龍·賀一龍·馬守應·劉希堯等數人, 劫掠郡縣, 官兵屢敗. ······適自成至, ······于是各統所部往渭原·河州·金縣·甘州等處劫掠. ······由是衆至數萬.
    (淸·計六奇<<明季北略>>卷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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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30
    No. 9

    이자성은 신체가 그리 크지 않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머리가 크고 이야기할 때는 아주 느리게 말했다.
    생활은 매우 검박하여 간소하게 밥을 먹었고 부인 하나와 첩하나를 두었으며 자식이 없어 이쌍희를 양자로 삼았다.
    그가 군중에 있을 때는 아침일찍 밥을 먹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연습을 하였다. 고산절벽을 마주치게 되면 말에서
    솟구쳐 나는 듯이 뛰어올랐고 하천을 만나면 양다리를 날개처럼 말등에 올리고 강을 건넜다. 적을 대할 때마다
    기병 삼만을 벌려 세우고 삼도장이라 부르는 각자 다른 색깔의 기를 가지고 있는데 홍기일대, 흑기일대, 백기일대로
    멀리서 보면 마치 색색구름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기병이 한바탕 교전을 치르고 나면 보병을 앞에 배치하여
    손에는 장창을 들고 돌격하여 적을 찔렀다. 빠르기가 나는 듯 했다. 그 뒤에 다시 기병과 보병이 함께 싸웠다.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때마다 보병은 성아래 둥글게 벌려 서고 기병이 바닷물을 뒤집을 듯이 공격해 들어가서
    한명의 적도 도망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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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33
    No. 10

    5. 낙양을 빼앗고 복왕을 살해하다.
    숭정 14년(1641) 정월 이자성의 대군이 낙양을 포위하였다. 낙양 총병 왕소우 부하들 중 몇몇 병졸이 성위에서
    큰 소리로 기의군을 부르자 기의군도 성아래에서 큰 소리로 호응하였다. 그래서 성위의 배반한 병졸들이 부사
    왕윤창을 포박하였다. 왕소우가 듣고 급히 가서 왕윤창을 구하자 배반한 병졸이 말했다. “의군들이 여전히 성아래에
    있는데 당신이 총병이지만 나를 어떻게 하겠소?” 하고는 칼을 휘둘러 성을 지키는 병사 몇사람을 죽이자 성을
    지키는 병졸들이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 의군들은 이때를 틈타 성에 올라 가자 배반한 병졸이 그들을 영접하였다.
    의군이 마침내 성에 들어가 복왕부를 불지르자 복왕(신종의 아들, 이름은 주상순)모자는 긴 밧줄을 걸어
    성밖으로 도망쳤다. 부사 왕윤창 등의 관원들은 붙잡혀 모두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자성은 왕부와 횡포한
    지방 유력자의 집에 있는 쌀 수천석과 돈 수천만냥을 꺼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후에 이자성은
    복왕이 숨은 곳을 추적하여 그를 잡있다. 복왕은 이자성을 보고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며 목숨을 구걸하자
    이자성은 그의 죄악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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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37
    No. 11

    숭정 14년(1641) 4월 하남 노씨현 공생 우금성이 지를 지어 변방의 군졸로 충당되어 배치되었다.
    이암은 틈왕에게 그가 계략이 있음을 추천하자 우금성은 틈왕에게 귀순하였다. 틈왕은 딸을 그의 처로 주고
    그를 우승상으로 임명하였다. 다른 설에 의하면 우금성은 거인으로 이암과 같은 해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이암이 그를 추천하였다 한다. 우금성은 옛 친구 유종민을 추천하여 장군으로 삼았고 또 술사 송헌책을 추천하였다.
    헌책은 하남 영성사람으로 점성술에 정통하여 처음 틈왕을 알현하고 점괘를 하나 바쳤다. “18살 어린아이가
    신기의 주인이 된다.”(“18살 어린아이”는 합하면 “이”자가 되고, 신기의 주인은 바로 제왕이 된다는 뜻)
    틈왕이 매우 기뻐하며 그를 군사로 임명하였다. 헌책은 나면서부터 얼굴이 좁고 길며 키는 삼척이 되지 않았고
    오른 발을 절어 지팡이를 짚고 다녔기 때문에 군중에서는 모두 그를 송꼬마라 불렀다. 틈왕과 그가 옛날부터
    알던 것처럼 만나 좌우를 물리고 그에게 공격할 방법과 계획을 물었다. 헌책이 말했다. “‘유랑자는 강가를
    따라 18탄을 함락시키고 만약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려면 안문관에서 일어나라.’ 장군께서 처음 말위에서
    왕이 되셨기 때문에 ‘틈왕’이라 불리며 점괘에 부응하셨습니다. 만약 해석한다면 ‘안문관에서부터 일어나라.’
    라는 말은 장군께서 기의하심은 마땅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틈왕이 몹시 기뻐하며
    그를 “송군사”라부르며 곧바로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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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40
    No. 12

    틈왕이 경사에 진입하다.
    숭정 17년 3월 19일 어두운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성밖에는 뜨거운 불과 연기가 자욱하게 하늘과 해를 가렸다.
    선무문 수문태감 왕상요는 금위군 천명을 이끌고 문을 활짝 열고 기의군을 맞아들였다. 기의군의 통수 유종민은
    군대를 정돈하여 입성하였는데 군용이 매우 엄숙하였다. 병사들은 흰 두건에 푸른 옷을 입고 몸에는 갑옷을 두르고
    등에는 화살통을 메고 하무를 입에 물고 줄지어 들어갔다. 성안의 백성들은 모두 문을 굳게 닫고 거리에 행진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기의군도 묻지 않고 매우 안정되어 다만 대군이 행진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정오가 되자
    이자성이 머리에는 전립을 쓰고 몸에는 푸른 옷을 입고 검은 얼룩말을 타고 정예기마병 백인을 데리고
    득승문으로 들어와 대명문을 끼고 돌아서 자금성에 들어갔다. 승천문을 지날 때 매우 득의양양하여 문위의
    편액을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만약 천하의 군주가 된다면 화살 한 개로 네글자의 가운데를 명중시킬 것이다.”
    하고는 활을 가득 당겨 쏘았는데 천자의 아래를 맞추자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우금성이 앞에 나와 말했다.
    “천자의 아래를 맞춘 것은 천하를 나눈다는 예시입니다.” 이자성이 활을 던져버리고 껄껄거리며 크게 웃었다.
    이자성과 유종민등 수십기가 궁안으로 들어가자 태감 두지질·조화순 등이 환관무리를 이끌고 향도가 되었다.
    이자성이 그들을 꾸짖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군주를 배반하고 성을 들어 투항하니 모두 마땅히 처형되어야 한다.”
    두지질등은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희들은 천명이 이미 대순황제께 돌아갔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자성이 노갈을 터뜨렸다. “네놈들의 목숨은 살려주마 가라!”
    이자성이 궁에 들어가자 태자가 궁문 왼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영접하였다. 이자성이 사람을 시켜 그를
    부축해 일으키도록 하고 또 숭정의 다른 두아들을 찾게 하여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지금 너희들은
    내 아들처럼 생각하니 부귀를 일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또 숭정에게 베어서 상처를 입은 원비와 공주를
    발견하고 탄식하였다. “선조 황제도 너무 잔혹하구나.”하고는 사람을 시켜 그들을 각자의 궁으로 돌아가 치료하게 했다.
    그날 이자성은 영을 내려 명의 문무백관은 다음날 스스로 와서 이름과 관직을 보고하게 하고 21일 조회에서
    관리가 될 사람은 재능을 헤아려 관직을 주고 원하지 않는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였다.
    만약 숨는 사람은 숨겨준 사람과 이웃까지도 모두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21일 명의 백관이 이름을 보고한 사람이 매우 많아 궁문에서 앞을 다투며 서로 및치고 끌어당기다가
    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몽둥이로 한바탕 얻어맞았다. 조용해지자 문을 닫아 걸었다. 백관은 땡볕에 앉아 그곳에서 기다렸다.
    의군들은 모두 그들이 후안무치함을 욕하고 비웃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못했지만 누군가가 말했다.
    “뱃속은 비록 고프지만 마음은 아주 편안하구나.” 한낮에 태감 왕덕화가 시종 십여명을 데리고 궁에서 나오다가
    병부상서 장진언을 보고 꾸짖었다. “명의 강산은 모두 너같은 놈들이 망가뜨린 것이다.” 장진언과 말다툼을 하다가
    왕덕화가 시종들에게 명하여 그의 얼굴을 후려패게 하였다. 이날 백관들은 하늘이 어두워져서야 겨우 궁에서 나왔다.
    23일 전령이 각영을 돌며 명의 백관을 압송하여 입조하여 선용을 듣도록 했다. 백관들은 모두 오봉루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종민·우금성이 명부를 가지고 와서 이름을 불렀다. 유종민은 남의를 입고 방건을 썼다.
    우금성도 방건을 쓰고 오품(흰 꿩을 도안하여 기웠음)의 관복을 입었다. 96명을 선용하였다. 선용된 사람들은
    모두 동화문을 나가 이부 등에서 임명을 기다리며 그들이 시종을 데리고 있는 것을 허락하고 압송하지 않았다.
    선용받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각영으로 돌려보냈다.
    이자성이 경사에 들어온 날 성을 지키는 위병을 더하여 배치하고 성 안팎에 말을 풀어놓는 것을 금지하였다.
    기의군이 성에 들어와 거리 시장 골목 등 가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약탈하는 현상은 없었다.
    기의군이 막 경성에 들어왔을 때 두 병사가 문앞의 주단포에서 물건을 빼앗자 바로 처형당해 손발을 잘라 문앞의 방책상에 효시하였다.
    27일 각영의 압송된 명의 관원들에게 군량을 징발하였다. 내각대신 10만냥, 육부·도찰원·통정사등의 장관·금의위장관·은
    어떤 이는 7만·어떤 이는 5만·3만이었고 과도·병부·이부·한림원은 3만·2만, 각부에 속한 관원들도 천량이상을 내야했다.
    조정의 훈신 외척들은 재산을 모두 내놓아야 했다. 그날 이부상서·무영전대학사 진연이 숨겨둔 은 4만냥을 내놓았고 금의위 도독 낙양성은 3만양을 내놓았다.
    유종민은 수보 위조덕에게 몽둥이를 쓰려고 위조덕은 은 일만냥을 내놓았다. 유종민은 재상의 신분으로 탐욕을 부려
    나라를 그르쳤다고 그를 힐책하였다. 위조덕이 해명하였다. “나는 원래 일개 서생으로 국정을 잘 알지 못한데다가
    더욱 선제가 무도하여 이지경에 떨어졌소이다.” 유종민이 듣고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억누르지 못하고 말했다.
    “너는 서생신분으로 장원이 되고 삼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재상이 되어 숭정이 너에게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너는 그를 무도하다고 매도하는 구나.” 좌우에 명하여 위조덕의 입을 수십대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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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44
    No. 13

    숭정의 죽음.
    숭정 17년(1641) 3월 17일 해가 질 무렵 틈왕은 경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가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해졌지만
    황실을 구원할 근왕군은 한명도 오지 않았다. 당시 태자의 나이 겨우 열 여섯살이고 정왕과 영왕의 나이 이제 열 다섯이었다.
    황제(숭정황제 주유검)는 태자와 두 왕을 불러 옷을 백포 버선·청포혜·백포바지·남포 속옷·청포목화저고리·
    자화포배심·흑포두건으로 바꿔 입혀 주었다. 황제는 태자의 손을 꼭 잡고 통곡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은 아직까지 태자이지만 경성이 함락되면 일반 백성이 될 것이다. 각자 도피하되 나를 연연해해서는 안된다.
    나는 꼭 국가와 함께 죽음을 같이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지하의 조종들을 대하겠느냐?
    너희들은 꼭 근신하고 조심하여야 한다. 관원을 만났을 때 나이가 많은 사람이면 노야, 나이가 적은 사람이면 상공이라 불러라.
    또 일반 백성들을 만나게 되면 나이가 많은 사람은 노다, 젊은 사람은 노형 또는 장형이라 부르거라.
    독서인을 만나면 선생이라 부르고 군인을 만나면 호장이나 장관이라 부르도록 하여라.”
    모두 일러주고 또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 세사람은 불행하게도 우리 집안에 태어났구나.”
    하고는 통곡을 하며 다시 말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세 아들을 믿고 있던 태감 왕지심과 율종주 등에게 부탁하였다.
    성이 함락된 후 율종주는 태자와 두 왕자를 틈왕에게 바쳤다.
    18일 황제는 외성이 이미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대전 안을 배회하였다. 아무 생각없이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일경쯤 한 소환관이 달려와서 내성도 함락되었음을 보고하였다. 황제는 술자리를 벌리라 명하고 주황후와 애비를 불러
    함께 앉아 통쾌하게 몇 잔을 마시고 비통하게 결별하였다. 궁인들이 그들을 둘러 싸고 울음을 터뜨리자
    황제는 손을 저어 궁인들을 물러가게 하면서 각자 살 궁리를 하도록 했다. 그후 황후는 곤녕궁으로 돌아가 목을 매어 죽었다.
    황제가 듣고 달려가 보고 오열하면서 단지 두마디만 말을 하였다. “좋소, 좋아.” 대공주를 불러와서--
    공주는 그때 나이 이제 열다섯이었다.-- 방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황제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너는 왜 우리 집안에 태어났느냐!” 하며 왼손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른손으로 칼을 휘둘러 공주를 베어 죽이려 하자
    공주는 손으로 막아 왼팔이 잘리고 혼절하여 바닥에 쓰러져 아직은 죽지 않았다.
    황제의 손이 떨려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칼을 집어 들지 못하였다. 또 서궁에 가서 자신이 총애하는 원귀비에게
    목을 매라고 명령하였다. 끈이 끊어지며 원비는 바닥에 떨어져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황제는 검을 빼어 그녀의 어깨를
    세 번을 베자 손에 힘이 빠졌다. 황제는 궁안의 총애하는 비빈들을 모두 불러 친히 그녀들을 베어죽였다.
    또 궁인을 보내어 장태후(천계황제 황후)를 자살하도록 하였다. 일을 다 마친 후 태감 왕승은을 불러 오랫동안
    상의하며 함께 술을 마셨다. 왕승은에게 내관들을 불러 모아 도주할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잠깐동안 황제는 미복을 하고 왕승은의 신발을 바꾸어 신고 중남문을 나갔다. 이때가 이미 삼경이었다.
    황제는 손에 삼안창을 들고 태감 수십명과 함께 모두 말을 타고 손에는 대부를 꺼내어 들고서 동화문을 나가 제화문에 다다랐다.
    문을 지키는 태감이 궁안에 내란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그들에게 활을 쏘아댔다. 그들은 남쪽으로 달아날 수 없어 작은 골목을 따라 황성위에 이르러 정양문을 바라보니
    이미 흰색 등롱이 세 개가 걸려 있었다. 원래 흰 등롱으로 하나에서 세 개까지 약정하여 상황의 완급을
    표시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미 일이 틀어졌음을 알았다. 당시 성국공 주순신이 제화문을 지키는 책임을 지고 있어
    그의 집에 가서 방법을 생각하려 했으나 주순신은 바깥의 연회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문지기가
    황제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하자 황제는 단지 길게 탄식하며 크게 꾸짖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안정문에 이르렀지만 성문이 열리지 않았고 날은 이미 밝아오고 있어 다시 궁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9일 오경 황제는 대전에 가서 자신이 직접 종을 울려 백관을 소집했지만 끝내 한사라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감들을 보내고 왕승은의 손에 이끌려 내원으로 들어갔지만 사람들이 아무도 몰랐다. 황제는 만세산의 수성정에 올라갔다.
    바로 모산의 홍각이다. 이것은 새로 지은 정자로 천계황제가 금위병의 훈련을 검열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때 황제는 정자안은 이리저리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조정관원들에게 박하게 하지 않았는데
    오늘처럼 긴급할 때 왜 한사람도 따라오지 않는 것이지?” 잠시후 길게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 해석하여 말했다.
    “아마 그들이 알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바로 달려오지 않는 것이지.” 말을 마치고 정자옆의 해당수아래에 목을 매었다.
    태감 왕승은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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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47
    No. 14

    이자성 사후의 수수께끼
    이틈왕의 죽음은 야사에는 통성 나공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명사>>에는 통성 구궁산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모두 마을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지금 고증해보면 나공산은 실제로 黔陽(지금의 호남성에 속함)에 있고
    구궁산은 실제 통산현(지금의 호북성에 속함)에 있기 때문에 통성이라 한 것은 모두 착오이다.
    손교수(부학의 교관)라는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자성은 사실 풍주(지금의 호남성 풍주현)로 도망가서
    청화역에 이르러 다만 십수명 기병이 따라서 고우패를 향하여 도주하였고 지금의 안복현(지금의 강서성에 속함)경내에서
    또 말을 타고 달아나 홀로 은밀히 석문현(지금의 호남성에 속함)의 협산으로 도주하여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지금도 그의 무덤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말을 듣고 몹시 놀라서 특별히 협산에 가보니 절옆에 석탑이 하나 있는데
    옥개석으로 덮여 있었다. 탑의 정면에는 큰 글씨로 “봉천옥화상”이라 새겨져 있었다. 탑앞에는 비석이 있고
    비문은 그의 사제 야불이 지은 것이었다. 비문에는 봉천옥화상의 성과 이름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절에는 연로한 스님이 있어 나이가 70여세라 하였고 아직 협산의 고사들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길 “봉천옥화상은 순치초년에 절에 와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율종문을 신봉하고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말하지 않았으며 말에는 서쪽의 사투리가 있는 듯한 사람이었소.
    후에 또 한 스님이 이곳에 왔는데 그의 사제라 하였소. 선종문에 속하며 법호는 야불이라 하였소.
    강남사람으로 봉천옥화상을 대할 때 몹시 공경하였다오. 봉천옥화상은 강희 13년 갑인(1674) 2월에 열반에 들었는데
    향년 70세였다오. 임종할 때 야불화상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그때 노승의 나이가 너무 어려 그 유언을 가서
    듣지는 못했소.” 라 하였다. 절안에는 아직 화상의 유상이 있어 내가 그를 불러 박으로 내다 살펴보니
    다만 그상의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턱이 크며 코는 올빼미같아 용모가 매우 위맹하여 명사에 기록된 이자성의 용모와 같았다.
    이자성은 스스로 봉천창의대원수라 하고 후에 또 신순왕이라 하고 그리고 봉천옥화상이라 자칭하였으니
    바로 봉천왕을 암시하여 왕자에 점을 하나 더하여 이름을 숨긴 것이다. 그리고 야불은 선종파로서 율종파의 제자가 되었고
    그에 대하여 매우 공경하였으니 바로 이자성의 옛 부하로서 좌우에서 모시던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명사>>는 구궁산에서 죽임을 당한 이자성에 대해서 또 기록하기를 “우리 병사(청병)가 이자성의 얼굴을 아는
    사람을 보내 시체의 머리를 살펴보게 하였으나 너무 부패하여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고 하였다.
    이 노스님은 직접 봉천옥화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또 화상이 섬서사투리가 있었다고 하니 충분히 사람이 기괴하게
    느끼게 하고도 남는다.


    이내용을 바탕으로 김용선생이 또 한작품을 남겼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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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52
    No. 15

    노화가 관을 뚫어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냐?
    오삼계는 요동인이다. 아버지 오양은 숭정년간에 금주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오삼계는 무예로 종군하여
    총병으로 승진하였고 영원(지금의 요령성의 흥성)을 수비하는데 공이 있었다. 틈왕의 기의군이 북경에 가까이 진격하자
    조정에서는 오삼계를 평서백으로 봉하고 아울러 오양을 경영제독으로 기용하여 오십만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경사를 지키도록 했다. 애초에 오삼계는 가정백 주규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주가의 가녀
    형원원(다른 책에서는 진원원이라 기록한 것이 많음)을 보고 몹시 좋아하여 천금을 주고 그녀를 사들였다.
    변경의 급보가 전해지자 오삼계는 급히 가느라 형원원을 함께 데리고 가지 못하고 주규가 형원원을 오양이
    사는 곳으로 보냈다. 오래지 않아 기의군이 경사를 점령하자 오양은 투항하고 틈왕은 오양에게 편지를 보내어
    오삼계에게 항복하도록 권유하게 했다. 그때 오삼계는 마침 영원에서 경사로 돌아오고 있어 군대가 난주(지금의 하북성 난현)에
    도착하였고 서신을 가진 하인도 이곳에 도착하였다. 삼계는 즉시 그를 군영으로 불러 물었다.
    “노장군(오양)은 평안하시냐?” 하인이 말했다. “이미 틈왕에게 투항하셨습니다.” 삼계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가 또 물었다.
    “노부인께서는 여전히 잘 계시느냐?” 하인이 말했다. “노장군과 함께 연금되셨습니다.”
    다시 물었다. “부인(오삼계의 정처)은 별일 없으시냐?” 하인의 대답은 그대로 전과 같자 오삼계는 멍하니 그대로 있었다.
    문득 또 물었다. “형부인은 어떠시냐?” 하인이 대답하였다. “형부인은 이미 틈왕의 장수 유종민에게 잡혀가셨습니다.”
    오삼계가 듣고 발연대로하여 검을 뽑아 옷자락에 닦고 일어서서 책상을 치고 이를 갈며 고함을 질렀다.
    “내가 이놈들을 죽이고 나의 원원을 도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사내 대장부가 아니다.”
    머리카락이 꽂꽂이 서고 눈자위가 찢어지도록 성난 눈동자를 부릅떴다. 곧바로 서신을 틈왕에게 보내 왕래를 단절하였다.
    대병을 이끌고 급히 산해관으로 돌아가 부장 양곤과 유격 곽운룡을 보내 산해관에서 나와 청병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때가 마침 청의 순치 원년으로 청인들은 마침 산해관으로 진공하여 중원을 침입하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섭정왕 도르곤에게 군사를 이끌고 영원으로 가게 하고 한군에게는 붉은 옷에 대포를 가지고
    산해관을 향하여 출발하게 하였다. 이에 오삼계는 급히 청병의 뒤를 따라 틈왕의 기의군과 일편석에서
    대전을 벌여 기의군을 패배시키고 40여리를 추적하여 살해하였다. 틈왕은 곧바로 오양을 살해하고
    그의 온 가족을 몰살시켰고 저녁때가 되어 북경을 버리고 서쪽으로 철수하였다. 오삼계와 청의 원수
    아제격친왕은 산서까지 추적하였다가 경사로 돌아왔다. 이때 순치는 이미 북경에 들어와 황제라 하고 있었다.

    오삼계의 배신은 널리 알려진 얘기죠...진원원때문이라는..
    이책에는 형원원으로 되어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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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54
    No. 16

    청인이 경사에 들어오다.
    숭정 17년(1644) 4월 29일 이자성은 부성문으로 밤을 틈타 북경을 떠났다. 오삼계는 군사를 이끌고 경성부근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격문을 경성으로 보내면서 망녕되게 자기가 태자를 호위하고 왔다고 하였다. 틈왕에게 귀순했다가
    미처 경성을 떠나지 못한 명의 관원들은 급히 의장과 수레를 준비하여 성밖으로 나가 태자를 영접하였다.
    기다리던 영접할 사람의 수레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비로소 그사람이 체발을 하고 마괘자를 입은 것이 보였다.
    원래 청의 예친왕 도르곤이었다. 백관들은 모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 떠지고 혀가 굳어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고
    다만 길옆으로 늘어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따름이었다. 이튿날 백관들은 또 궁에 들어가 표를 올려
    태자가 제위에 오르도록 권하자 청의 대학사 범문정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나라 군주께서는 이미 옛날에 등극하셨습니다.
    이분은 황숙이신 섭정왕입니다.” 백관들은 부끄러워 그저 물러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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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09:57
    No. 17

    양주를 피로 씻다.
    청병이 양주를 함락시킨 후 4월 25일부터 5월 5일에 이르기까지 병사들을 마음대로 하도록 풀어놓아
    죽은 관민이 80여만에 달하였다. 양주의 수재 왕수초가 요행히 목숨을 건져 자기자신이 겪었던 일을
    <<양주십일기>>에 청병의 폭행을 기록하였다.
    ······한 청나라 병졸이 칼을 들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한 병졸이 뒤에서 창을 가로로 들고 몰면 그 가운데
    또 한 병졸이 오른쪽 왼쪽으로 잡힌 백성들이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십명 백성들을 소나 양몰 듯 하여
    조금이라도 걸음이 늦으면 독한 매질을 당하였고 심지어는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
    부녀들은 긴 밧줄로 목을 묶어 길게 구슬을 꿰 듯하여 한걸음이라도 잘못하면 넘어져서 온몸에 진흙탕과 오물이 묻었다.
    곳곳의 아이들은 어떤 애는 말에 짓밟히고, 어떤 애는 사람에 채여 죽으니 간과 뇌가 땅을 뒤덮어 곡성이 들판에 가득하였다.
    지나온 도랑과 연못마다에는 모두 시체로 가득 쌓여 있는데 이리저리 마구 쌓여 손과 발을 서로 베고 있었으며
    피가 물로 흘러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서로 섞여 여러 빛깔을 띠고 지당에는 모두 싸인 시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
    27일 나는 이웃에 사는 홍할머니에게 아내가 숨은 곳을 물으니 그녀가 나를 데리고 이리저리 구불구불한 곳으로 가서
    무덤에 이르니 무덤 뒤에는 곳곳에 기왓조각과 벽돌조각이 널려 있어 일찌감치 인적이 끊기는 곳이었다.
    나는 풀숲에 웅크리고 아들을 관위에 눞히고 돗자리로 덮었다. ······놀란 혼백을 잠시 안정시키고 보니
    사람죽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휘둘러지는 둥근 칼빛이 있는 곳마다 호곡소리가 참혹하게 울려퍼지고
    애절하게 목숨을 살리라는 것으로 어떤 때는 수심명, 어떤 때는 백명이 넘었다. 오후가 되자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청나라 병졸들은 더욱 광분하여 살인과 방화, 그리고 노략질이 심해졌다. 28일 홀연히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이 손에는
    긴 칼을 들고 내가 몸을 숨긴 곳으로 와서 칼을 들어 나를 겨누었다. 나는 급히 은자를 꺼내어 그에게 주자
    그는 또 나의 아내를 끌고 가려고 하였다. 나의 아내는 그때 이미 임신한 지 아홉달이 지나 땅바닥에 엎드려
    죽는다 해도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속여 말했다. “아내는 임신한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제 지붕에서 땅으로 떨어져 유산하였으니 절대로 살아날 수 없소. 어떻게 일어나겠소.”
    그 홍의병졸이 믿지 않아 나는 급히 의복을 풀어헤쳐 그가 보도록 하고 전에 이미 피를 묻혀놓았던 바지를 그가 보게 하니
    비로소 그가 떠나갔다. 그는 어린 부인 하나와 계집아이와 아기를 잡자 아기가 어머니를 부르며 먹을 것을 달라고 우는 것이었다.
    청나라 병졸이 잠시 고민하다가 한칼에 아기를 베어 버리고 어린 부인과 계집아이를 끌고 가버렸다. ······
    초이틀 이날은 청인들이 이미 부도주현에 관리를 배치하고 안민패를 가지고 각처에 다니면서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또 각 사묘의 승인들을 불러내어 거리에 쌓인 시신들을 불태우게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원에 몸을 숨긴 부녀자들이 매우 많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놀라 죽거나 굶어 죽었다.
    불태운 시신을 기록한 장부에 의하면 시체가 모두 80만이었는데 우물에 떨어져 죽은 사람, 강물에 투신하여 죽은 사람,
    문을 걸어 잠그고 불질러 죽은 사람, 목매어 죽은 사람은 그중에 들어있지 않았고 또 잡혀간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다.
    초나흘 날씨가 맑아 뜨거운 햇빛이 쨍쨍 내리 쪼이자 시체썩는 냄새가 사람몸에 배이고 전후좌우 곳곳마다
    모두 시신을 태워 자욱한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하여 몇십리밖에서도 다 시체의 비릿한 내음을 느낄 수 있었다. ······
    내가 처음 재난을 만났을 때 형, 동생, 형수, 조카, 아내, 아들까지 모두 일곱이었는데 지금은 겨우 세사람만 살아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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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桃李不言
    작성일
    03.12.03 10:00
    No. 18

    제가 몇년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놀다가 심심해서
    번역한 책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대충대충(초벌번역)했기 때문에 주석도 달지 못하고 다만 뜻은 통합니다.
    다소 착오와 오타가 있더라도 양해하시고

    원문과 다른 자료들은 틈틈이 자료실에 올리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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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1 이령
    작성일
    03.12.03 10:34
    No. 19

    대단하시네요. 훌륭한 자료입니다.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인위
    작성일
    03.12.03 18:29
    No. 20

    -_-;;;;;; 와 재밌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술취한늑대
    작성일
    03.12.04 10:39
    No. 21

    댓글의 압박...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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