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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답변

궁금함을 질문하고 답변하는 곳입니다.



Comment ' 6

  • 작성자
    김남렬
    작성일
    03.03.13 00:04
    No. 1

    정말 어렵네요^^

    다만 단순하게

    무예. 무술. 무도

    이것은 한.중.일에서 무라는 개념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각기 조금씩 다르죠.

    무사도 글쎄요. 어렵네요.

    사무라이라는 개념은 백제의 싸울아비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백제무사들의 모습과 비슷한점이 보입니다.

    의자왕이 죽던날.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백제무사들은 할복으로

    보여줍니다. 군주에 대한 철저한 충성, 군주가 없으면 존재할수가 없는

    것이 사무라이입니다. 막부가 바뀌었도 천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무라이죠.

    화랑도는 삼국중에 가장 약한 군사력을 소유했던 신라에서 강한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타난것입니다.

    절대 물러섬없이 싸울수 있는 존재들. 강인한 존재들의 필요성이 화랑도

    라는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 화랑도라면

    사무라이는 군주, 자신의 군주를 위해 싸웁니다.

    자신의 군주가 새로운 막부의 지도자에 되게 하기 위해서 아니면

    아니면 군주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사무라이의 궁극의 충성의 대상은

    천황입니다. 그것이 사무라이죠.

    삼국의 무사도를 확실하게 구분짓기는 어렵겠지만 일본의 무사도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어서 써봤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내에서 쓸려니까 조금 졸렬한 글이 나와 버렸습니다.

    좀더 정확히 아시는분이 글을 써 주셨슴 좋겠네요.

    엉터리라고 돌멩이 던지셨도 좋습니다~~ 컥 ㅡ_ㅡ;;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1 무존자
    작성일
    03.03.13 02:17
    No. 2

    일본의 무사도가 상당히 낭만적으로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일본의 무사들은 그것이 바로 직업이기 때문에 싸웠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나와바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지요. 밥벌이를 위해서 싸웠다는 말입니다. 할복하는 것에 대단한 의의를 두지만 그것은 할복을 할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그리고 근대에 이르러서야 천황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전에는 오로지 자신의 밥을 먹여주는 영주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그때도 천황이 있었고 장군(막부)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충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1467년 1월28일에 일어난 하타케야마 마나시가 요시나리와 벌린 응인의 난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극히 개인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그러나 우리나라의 무사들은 밥벌이 보다는 의(義)와 충(忠)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집단간의 전투라 오해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서 있습니다. 대규모 전쟁이 아니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답변으로 많이 부족합니다. 개인적으로 [일본사]를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眞空家鄕
    작성일
    03.03.13 12:02
    No. 3

    제가 생각하기에는 위의 님이 말한 무사도와 일본의 무사도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얼마전 일본 영화 기묘한 이야기의 두번째 일화인 충신장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군의 원수를 갚느냐 아니냐의 소재를 희화시킨 것이지요.
    그 사건은 정확하기 이야기 하면 한국인들에게는 별로 친숙한 소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알고보면 일본 무사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충신장 사건을 소개로 한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보다는 백과사전의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의 무사도는 전쟁하고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무사의 전체 행동규범 같은 것이지요. 물론 행동규범에 전쟁시의 행동이 들어가기는 하겠습니다만 그것은 일부일 뿐입니다.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眞空家鄕
    작성일
    03.03.13 12:02
    No. 4

    武士道

    Bushid

    일본 사무라이계급의 행동규범.

    19세기 중반에는 사회 전체의 윤리교육의 기초가 되었고 충성과 희생의 대상이 다이묘[大名:봉건영주]에서 천황(天皇)으로 바뀌었다 (→ 색인 : 사무라이). 무사도는 그 자체로 일본의 민족주의를 일으키는 데 기여했으며 1945년까지의 전쟁기간 동안에는 일본인들의 사기를 강화시켰다.

    이 용어는 16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규범에 대한 개념은 이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에 발전했다. 그 구체적 내용은 사무라이 계급이 선종(禪宗)이나 유교의 영향을 받게 됨에 따라 역사적으로 변천했지만 일관된 것은 상무(尙武) 정신으로서, 이는 무예와 싸움터에서의 용맹성 등을 말한다. 또한 검소한 생활, 친절, 정직성뿐만 아니라 효도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설령 부모에 해가 될지라도 주군(主君)에 대해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했다.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에는 무사도의 개념이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의리나 의무를 강조하는 보다 포괄적인 도덕체계로 변했다. 사무라이는 유교에서 말하는 \'군자\'(君子)와 동일시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층계급에게 덕을 베푸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권위에 대한 복종이 강조되었지만 법을 위반할지라도 의무가 우선시되었다.

    출처: 브리데리커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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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眞空家鄕
    작성일
    03.03.13 12:04
    No. 5

    山鹿素行

    Yamaga Sok

    1622. 9. 21 일본 이와시로 구니[岩代國 : 지금의 후쿠시마 현(福島縣) 일부] 아이즈[會津]~1685. 10. 23 에도[江戶 : 지금의 도쿄].

    일본의 군사전략가·유학자.

    본명은 야마가 다카스케[山鹿高祐]. 진고자에몬[甚五左衛門]이라고도 한다. 사무라이(무사) 계급의 사명과 의무에 대한 체계적 해설을 처음으로 제시했고, 일본 군사학에 크게 이바지했다. 야마가의 사상은 나중에 이른바 무사도(武士道)의 핵심이 되었다. 무사도는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 : 1603~1867]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 군대의 지침이 된 정신이었다.

    주인없는 무사, 곧 로닌[浪人]이었던 야마가는 일찍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그는 수도인 에도로 가서 주자학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총애하는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곧 학문에 있어서 스승을 앞질렀고 유학만이 아니라 불교·신도(神道)·군사학도 공부했다. 짧은 시일 안에 그는 당대의 가장 인기있는 스승이 되어 수천 명의 제자를 끌어들였다. 이러한 명성 덕분에 1652년 아코 한[赤査簾]의 영주의 군사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야마가는 전략과 전술, 무기, 군사정보 연구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이룩했다. 그가 군사학 스승으로서 이룬 업적은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야마가의 19세기 제자들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었지만, 일본이 서양과 맞서서 좀더 잘 싸울 수 있으려면 서양의 여러 나라에 대해 더욱 많이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들에 속한다.

    야마가는 사무라이 계급에 적합한 윤리를 개발하는데 힘써서, BC 7(또는 BC 6)세기의 공자의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일본 유학인 \'고가쿠\'[古學]를 일으켰다. 그는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을 지배한 싱거운 주자학보다 공자의 원래 가르침이 사무라이 계급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야마가는 사무라이를 공자가 말하는 \'군자\'(君子)와 동일시했고, 언제 있을지 모르는 군사적 봉사에 대비하여 항상 자신을 단련하는 한편, 하층 계급에 대해 미덕의 본보기가 됨으로써 영주한테 급료를 받는 데 상응한 구실을 다하는 것이 사무라이의 본질적인 역할이라고 가르쳤다. 야마가는 유교의 기본덕목인 인(仁)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2번째 덕목인 \'의\'(義)를 더 강조했으며 이 의를 의무로 해석했다. 야마가의 주자학 비판은 1665년에 나온 〈야마가고루이 山鹿語類〉에 처음 나타났는데, 그 개요는 3권으로 이루어진 〈세이쿄요로쿠 聖敎要錄〉라는 책으로도 간행되었다. 그의 사상은 도쿠가와 바쿠후 당국에 대한 잠재적 도전으로 간주되었고, 이 때문에 그는 에도에서 쫓겨나 아코 한의 영주의 보호와 감시를 받았으며 일본에서 가장 외딴 오지로 유배되었다.

    야마가는 나중에 \' 47명의 로닌\' 사건의 지도자가 된 사무라이의 스승으로서 그들에게 주요한 영감을 주었다. \'47명의 로닌\'은 억울하게 죽은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1702년 야마가의 규범에 따라 도쿠가와 바쿠후의 법을 어기고 목숨을 걸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일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의 하나이며, 이 사건 덕분에 야마가와 그의 사상은 야마가가 죽은 뒤이기는 했지만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또한 일본 문명이 중국 문명보다도 우월하다는 사상을 펼쳤다. 야마가는 〈주초지지쓰 中朝事實〉라는 책에서, 일본은 건국 이후 줄곧 신성한 황실 계보에 충성을 바친 반면, 중국 왕조는 흥망성쇠를 거듭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유학은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타락했지만, 일본은 공자가 말한 의무라는 개념에 충실해왔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19세기에 일본의 호전적 국수주의자들을 부추기는 데 이바지했다. 이들은 1868년에 도쿠가와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회복했다.

    출처: 브리데리커사전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열화옥수
    작성일
    03.03.13 15:51
    No. 6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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