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이 92년도에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오디세이아 서울'을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하였다.
특이하게도 볼펜을 화자로 삼고 있는 소설이었지, 이게 아마?
언제고 읽기는 읽어야 할 소설이었다. 대출해 왔다.
1,2권으로 나뉘어진 이 소설의 2권을 절반 가까이 읽고 있는 지금, 소설 제목에 '오디세이아'가 들어가 있는 까닭은 아직 파악이 안 된다.
이역만리를 떠돌다가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오디세우스를 제목에서 들먹이는 것은 한국인 해외여행자에게 구매되어 한국땅에 오게 된 독일산 볼펜이 나중에 독일로 다시 돌아가게 됨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한국 사회를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에다 비하고, '나'인 볼펜이 자신의 소유주를 따라 그 속을 이리저리 떠도는 것을 항해로 부르고 있을 뿐일까?
(그렇게 한국 사회를 떠돌게 된 볼펜의 눈에 포착된 중산층 사내들을 거인으로, 여인들을 마녀 내지는 요정으로 부르는 대목이 1권에 나오는데, 이는 단지 그 소유주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을 뿐인 볼펜의 이동에 오디세우스의 모험 이미지를 부여하고자 하는 작가의 고려로 보인다.)
어쨌거나 무생물인 볼펜에 상당한 수준의 사유 능력이 있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설정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점을 놓고 작가가 창작 기법까지 들먹여 가며 꽤 긴 변명을 늘어놓았어도 그 우스꽝스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실험적인 시도와는 대조적으로 이문열이 구사하는 문장은 밋밋하기만 하다.
어떤 이가 이문열을 두고 드물게도 문체에 신경을 쓰는 작가라고 평가한 것을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문열의 문체는 오히려 대단히 건조하고 밍숭밍숭한 편이다.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에 이문열만큼 건조한 마음가짐으로 다가가는 작가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문열이 묘사하는 인물이나 사건은 마치 판화를 연상시킨다.
대상의 대략적인 윤곽선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할 뿐, 섬세한 결도 음영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서정성의 결여를 벌충하는 것은 그 특유의 지적 사변이다.
작가의 개인적 편견에 의해 더러 굴절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고졸 정도의 지력이면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양하고 심오한 주제들에 대한 친절한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이문열 소설이 갖는 커다란 메리트라 하겠다.
이 작품, '오디세이아 서울'에서도 이문열은 그 특유의 도식적인 언어로 90년대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 작업을 수행한다.
1권에서 대한민국의 중산층을 관찰하였던 볼펜은, 2권에서 청소 미화원을 직업으로 가진 새로운 주인을 맞이함에 따라 관찰 영역을 빈민층으로 옮긴다.
빈민들의 암울한 의식 상태며 강제 철거에 대항하는 저항운동 들이 관찰 대상이 된다.
처음에는 단지 소액의 보상금을 기대하였을 뿐인 주민들이 외부 단체들의 이념적 지원을 받고 차츰 자기도취에 빠져 본격적인 투쟁 집단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분석되고, 그렇게 획득한 민중의 저항이란 수식어에 걸맞지 않는 비속한 면모들이 지적을 받는다.
그러한 관찰은 아마도 사실일 터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나라 부동산업자들이며 건축회사들이 기층민들의 삶에 커다란 위해를 끼쳐 가며 이윤을 추구한다는 구조적 비열함의 문제는 여전히 남고, 따라서 그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 역시 여전히 남는다.
반 철거 저항운동을 폄하할 의도는 없노라고 이문열은 소설 속에서 밝히고 있지만 자신들보다 몇 배 더 힘세고 악랄한 적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에게 아직은 응원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에 굳이 어두운 면에 시선을 주고 있는 데서 훗날 그가 보수의 거목으로 지목되게 하는 바탕을 엿볼 수 있다고 할까....
물론, 이문열이 추하게 묘사한 부분들은 실제로 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민중인 것이다.
운동권이 흔히 들먹이는 고귀한 민중의 이미지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실제로 만나는 민중은 모두 그렇게 조금씩 비루하고 천박한 면들을 지니고 있고,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소설 후반은 선거 광풍이 몰아치는 한국 사회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 무생물에 사유 능력이 있다는 부자연스러운 설정을 감수해 가며 굳이 볼펜을 화자로 삼았던 이문열의 의도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지지 정당도 없고 출신지역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운 공정한 객관자로서의 발언의 무게를 얻고 싶었던 거겠지....
아무튼 이 소설이 그리는 선거판 분위기는 오늘날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아니, 이 소설이 다루는 문제들 전체가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년 전의 이문열의 분석이 여전히 유효할 만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이런저런 폐단들이 악순환을 이루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지금 이 글을 써내려 오는 사이에 소설을 다 읽었다.
감상? 별로다.
지금까지 읽었던 이문열 소설 중에서 제일 변변치 못한 것 같다.
ㅡ대한민국이란 사회가 총체적으로 썩어 있더라.
요컨대 이 말을 하기 위해 책 두 권이 굳이 필요했을까?
90년대의 한 시점에 한국인들이 여차여차한 형태로 서로 작당하고 야합하고 분열하고 대치하며 살았다는 상세한 내막을 굳이 속속들이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작업은 르포 작가의 몫이지 소설가의 몫은 아니라고 본다.
아무튼 이 소설만큼 대한민국의 기성층을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힘들 텐데, 그런 이문열이 오늘날 기득권 층의 대변자처럼 되어 버린 것은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바로 이 문제에 관련하여 한 가지 에피소드를 얘기해야겠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골라 대출대에 내밀었을 때, 사서 아줌마가 힐끗 내 얼굴을 보았다.
그 시선이 차가운 시선이었던 듯하다는 내 느낌이 과연 정확하였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문열을 읽는 일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그리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에 속해 있는 듯하다.
한 작가에게 있어 이는 얼마나 끔찍한 상황일까!
나중에 이 문제를 놓고도 글을 좀 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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