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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란

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Comment ' 11

  • 작성자
    Lv.1 무봉(武奉)
    작성일
    09.03.24 09:00
    No. 1

    양탕님의 글을 읽어봤는데 내용은 문제 될게 없더군요.
    단지 내용을 전달하는 문체나 어투가 극단적이고 현학적일 뿐.
    서로 한 발짝씩만 물러서서 동의는 아니더라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는게 어떨까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급식우
    작성일
    09.03.24 09:37
    No. 2

    비평란에 올라온 글을 비평하는 글이군요 -_-;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강호정담에 올리시던지, 아니면 deapair님께서 읽으신 글의 덧글로 쓰는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박상준1
    작성일
    09.03.24 12:44
    No. 3

    저는 일련의 논쟁을 재미있게 지켜보았으며, 참여도 했습니다. 제가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일련의 작업에 대한 (이상하리만치) 적대적인 선입견입니다. 간단히 말해 디페어님 글에 대한 반대 의견입니다.
    1
    역사는 이미 있었던 일에 대한 가치판단입니다. 역사를 어떻게 읽은 것인가는 매개 담론주체의 몫입니다. 역사를 우연적인 사건의 일련의 과정이나 덩어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법칙성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합법칙성을 증명하려고도 합니다. ‘클레오파크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하는 말은 역사를 클레오파트라의 미모라는 우연과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상호작용으로 어떤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던 말던 그 역사는 내재적 발전과정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반론을 가져옵니다. 세계관의 문제이지요. 역사를 현상으로 읽을 것인가, 현상 아래 숨어있는 법칙성으로 읽을 것인가는 역사에 대한 가치를 결정하는 하나의 태도입니다. 거기에서 양탐님은 하나의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역사가 우연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아니라, 법칙성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 법칙을 토대와 의식이라는 정치경제학적 세계관으로 꺼낸 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간과’가 아니라, 태도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글쓴이께서는 ‘간과’한 갭을 증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을요.
    2
    어떤 저작을 비평하는데 비평가는 당연히 자신의 태도를 들이대게 되어있습니다. 양탕님은 아로스건국사라는 저작에 대해 본건제와 관료제라는 비평의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여기에서 당신이 들이댄 잣대가 굽어있다는 반론에 부딪힙니다. 첫 번째는 관료제와 봉건제라는 해석의 오류입니다. 당연히 의미있는 반론이고 논쟁입니다. 저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책을 읽지도 않았고, 관료제와 봉건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 재미있었습니다.
    두 번째 반론이 나왔습니다.(시간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가 창조해낸 세계는 관료제나 봉건제로만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이 ‘초인’입니다. 작가가 구상한 세계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법칙을 무시하게 할 만한 존재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것을 우리가 아는 역사법칙의 눈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입니다.
    3
    이렇게 되면 두 번째 논의는 더는 무의미해집니다. 무한루핑이 될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관료제나 봉건제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저작을 비판했는데, 그런 것을 뛰어넘는 초인이 있다고 하니 그 이상 얘기를 진행 할 수가 없지요.
    여기에서 논거는 결국 ‘초인’의 문학적 의미로 넘어갑니다. 제가 볼 때는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만두든지, 진행하든지의 기 로에서 진행하기로 양탐님이 자신이 들이댄 잣대의 귀납적 논증을 시작합니다. 제가 참여한 것이 여기서 입니다. 다른 것은 아니고 ‘왜 제기한 문제에 답을 안 하고 어물쩍 넘어가느냐’는 것에 대한, 제가 읽은 논법을 얘기했습니다. 이 부분이 제가 거론하려는 적대적 선입견의 하나입니다.
    4
    ‘초인’과 ‘세계’. 여기에서 ‘논쟁 상’,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합니다. 주체와 세계에 대한 관점입니다. 역시 세계관입니다. 우선, 공히 두 태도에서 다 인정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만한 ‘개인적’ 능력을 가진 초인이 실재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상력의 산물인 문학적 의미가 남습니다.
    1)판타지 문학이 다른 무엇보다 상상력을 극대화한 장르이니만큼 작가의 상상력을 저해할 만한 요소를 최소화시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고 2)작가의 상상력-창작- 은 세계의 반영이다. 존재 양식을 뛰어넘는 것은 문학적 성취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5
    ‘문학은 세계와 주체의 문제를 해석하고 거기에서 일정한 태도를 담지하는 것‘이라는 것은 가장 일반적이고, (교조적이기까지 한) 모범답안입니다. 그 모더니즘을 해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작가나 독자가 가지는 또 하나의 가치입니다. 역사가 우연의 산물이라면 역사로 회귀하여 압도적인 힘으로 그 우연적 요소를 제거하거나 변형하여 다른 역사를 쓸 수도 있습니다. 세계는 기호로 이루어진 의미 덩어리라고 받아들인다면 가상현실에 접속하여 그 기호를 주물럭거릴 수도 있습니다.
    6
    그런데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문학이란 틀 거리를 가져오는 것에 대한 반감(반론이 아니고)이 왜 이렇게 적대적으로 존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르물과 장르문학.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문학의 개념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문학이라는 카데고리에 들지 못한다고 큰일 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창작의 가치가 ‘문학’이라는 라떼르를 붙여야 한다면 문학이라는 카데고리 안으로 들어오던지(이건 어렵겠지요. 존재가치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문학이라는 카데고리를 넓히거나(이것도 어렵겠지요) 새로운 범주를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문학은 이미 보편적인 범주입니다. 그것을 해체하거나 넓히는 것은 그 만큼의 두터운 벽을 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경질로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7
    제가 생각하기에 이미 그 카데고리는 존재합니다. 아직 이름을 못 붙여서 명명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요. 양탐님은 그것을 장르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문학’이라는 레떼르를 떼어낸 것이지요. 거기에다 굳이 ‘문학’이라는 레떼르를 붙여야 한다면 (현재 명목상으로는 붙어있습니다-신무협, 판타지 등등 입니다.) 자신의 문학성을 증명하던지, 아니면 문학의 외연을 넓혀야 합니다.
    8
    그 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이 이솝이야기는 동물들 이야기인가요, 심청전은 문학 아닌가요 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솝이야기는 우화이고 그 주인공은 여우나 양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심청전 같은 것은 보통 문학이라는 말 앞에 구비라는 말 하나를 더 붙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문학의 보편성이 현대문학이라는 것을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요.
    문학의 원형이 신화이고 현대문학 속에서 신화의 원형을 발견해야 한다면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극복해야 합니다.
    9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장르문학을 즐기고 나가서 글을 쓰고 있는 제 태도는 조금 보수적이고, 상업적입니다. 문학적 보편성을 담지하여 대중성을 획득하여야 합니다. 더 많은 대중들과 소통하여야 합니다. 제 작업이 그렇게 되고 있다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그런 견지에서 작업을 합니다.
    순수문학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 존재 이유를 밝힙니다. 돈 안 되는 문학을 한다는 것을 오히려 자부하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때는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허세일 뿐이라고 보기는 하지만. 장르문학은 장르적 특질을 좀 더 완화하고 상품 미학을 더 충실히 해서 대중과 만나야 합니다. 막말로 헤리포터처럼 써야 합니다. 이외수가 같은 신선을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김홍신이 쓴 협객 이야기는 왜 베스트셀러가 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박상준1
    작성일
    09.03.24 13:58
    No. 4

    저는 일련의 논쟁을 재미있게 지켜보았으며, 참여도 했습니다. 제가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일련의 작업에 대한 (이상하리만치) 적대적인 선입견입니다. 간단히 말해 디페어님 글에 대한 반대 의견입니다.
    1
    역사는 이미 있었던 일에 대한 가치판단입니다. 역사를 어떻게 읽은 것인가는 매개 담론주체의 몫입니다. 역사를 우연적인 사건의 일련의 과정이나 덩어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법칙성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합법칙성을 증명하려고도 합니다. ‘클레오파크라의 코가 어쩌고 하는 말은 역사를 클레오파트라의 미모라는 우연과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상호작용으로 어떤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던 말던 그 역사는 내재적 발전과정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반론을 가져옵니다. 세계관의 문제이지요. 역사를 현상으로 읽을 것인가, 현상 아래 숨어있는 법칙성으로 읽을 것인가는 역사에 대한 가치를 결정하는 하나의 태도입니다.
    거기에서 양탐님은 하나의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역사가 우연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아니라, 법칙성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 법칙을 토대와 의식이라는 정치경제학적 세계관으로 꺼낸 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간과’가 아니라, 태도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글쓴이께서는 ‘간과’한 갭을 증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을요.
    2
    어떤 저작을 비평하는데 비평가는 당연히 자신의 태도를 들이대게 되어있습니다. 양탕님은 아로스건국사라는 저작에 대해 본건제와 관료제라는 비평의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여기에서 들이댄 잣대가 굽어있다는 반론에 부딪힙니다. 첫 번째는 관료제와 봉건제라는 해석의 오류입니다. 당연히 의미있는 반론이고 논쟁입니다. 저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책을 읽지도 않았고, 관료제와 봉건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 재미있었습니다.
    두 번째 반론이 나왔습니다.(시간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가 창조해낸 세계는 관료제나 봉건제로만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이 ‘초인’입니다. 작가가 구상한 세계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법칙을 무시하게 할 만한 존재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것을 우리가 아는 역사법칙의 눈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입니다.
    3
    이렇게 되면 두 번째 논의는 더는 무의미해집니다. 무한 루핑이 될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관료제나 봉건제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저작을 비판했는데, 그런 것을 뛰어넘는 초인이 있다고 하니 그 이상 얘기를 진행 할 수가 없지요.
    여기에서 논거는 결국 ‘초인’의 문학적 의미로 넘어갑니다. 제가 볼 때는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만두든지, 진행하든지의 기 로에서 진행하기로 한 양탐님이 자신이 들이댄 잣대의 귀납적 논증을 시작합니다. 제가 참여한 것이 여기서 입니다. 다른 것은 아니고 ‘왜 제기한 문제에 답을 안 하고 어물쩍 넘어가느냐’는 것에 대한, 제가 읽은 논법을 얘기했습니다. 이 부분이 제가 거론하려는 적대적 선입견의 하나입니다.
    4
    ‘초인’과 ‘세계’. 여기에서 ‘논쟁 상’,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합니다. 주체와 세계에 대한 관점입니다. 역시 세계관입니다. 우선, 공히 두 태도에서 다 인정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만한 ‘개인적’ 능력을 가진 초인이 실재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상력의 산물인 문학적 의미가 남습니다.
    1)판타지 문학이 다른 무엇보다 상상력을 극대화한 장르이니만큼 작가의 상상력을 저해할 만한 요소를 최소화시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고 2)작가의 상상력-창작- 은 세계의 반영이다. 존재 양식을 뛰어넘는 것은 문학적 성취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5
    ‘문학은 세계와 주체의 문제를 해석하고 거기에서 일정한 태도를 담지하는 것‘이라는 것은 가장 일반적이고, (교조적이기까지 한) 모범답안입니다. 그 모더니즘을 해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작가나 독자가 가지는 또 하나의 가치입니다.
    역사가 우연의 산물이라면 역사로 회귀하여 압도적인 힘으로 그 우연적 요소를 제거하거나 변형하여 다른 역사를 쓸 수도 있습니다. 세계는 기호로 이루어진 의미 덩어리라고 받아들인다면 가상현실에 접속하여 그 기호를 주물럭거릴 수도 있습니다.
    6
    그런데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문학이란 틀 거리를 가져오는 것에 대한 반감(반론이 아니고)이 왜 이렇게 적대적으로 존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르물과 장르문학.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문학의 개념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문학이라는 카데고리에 들지 못한다고 큰일 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창작의 가치가 ‘문학’이라는 라떼르를 붙여야 한다면 문학이라는 카데고리 안으로 들어오던지(이건 어렵겠지요. 존재가치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문학이라는 카데고리를 넓히거나(이것도 어렵겠지요), 새로운 범주를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문학은 이미 보편적인 범주입니다. 그것을 해체하거나 넓히는 것은 그 만큼의 두터운 벽을 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경질로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7
    제가 생각하기에 이미 그 카데고리는 존재합니다. 아직 이름을 못 붙여서 명명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요. 양탐님은 그것을 장르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문학’이라는 레떼르를 떼어낸 것이지요. 거기에다 굳이 ‘문학’이라는 레떼르를 붙여야 한다면 (현재 명목상으로는 붙어있습니다-신무협, 판타지 등등 입니다.) 자신의 문학성을 증명하던지, 아니면 문학의 외연을 넓혀야 합니다.
    8
    그 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이 이솝이야기는 동물들 이야기인가요, 심청전은 문학 아닌가요 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솝이야기는 우화이고 그 주인공은 여우나 양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심청전 같은 것은 보통 문학이라는 말 앞에 구비라는 말 하나를 더 붙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문학의 보편성이 현대문학이라는 것을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요.
    문학의 원형이 신화이고 현대문학 속에서 신화의 원형을 발견해야 한다면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극복해야 합니다.
    9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장르문학을 즐기고 나가서 글을 쓰고 있는 제 태도는 조금 보수적이고, 상업적입니다. 문학적 보편성을 담지하여 대중성을 획득하여야 합니다. 더 많은 대중들과 소통하여야 합니다. 제 작업이 그렇게 되고 있다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그런 견지에서 작업을 합니다.
    순수문학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 존재 이유를 밝힙니다. 돈 안 되는 문학을 한다는 것을 오히려 자부하기도 합니다. 저는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허세일 뿐이라고 보기는 하지만. 장르문학은 장르적 특질을 좀 더 완화하고 상품 미학을 더 충실히 해서 대중과 만나야 합니다.
    막말로 헤리포터처럼 써야 합니다. 이외수가 같은 신선을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김진명의 역사물이나 김홍신이 쓴 협객 이야기는 왜 베스트셀러가 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박상준1
    작성일
    09.03.24 13:59
    No. 5

    죄송합니다. 실수로 같은 글이 두개 올라갔습니다. 삭제가 안되는 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금원
    작성일
    09.03.24 16:42
    No. 6

    글쎄 문학이 어떠고를 떠나서 판타지 소설에서 판타지적인 요소는 증명할수 없으닌 제외하고 논해야 된다는게 양탕님의 요지였죠. 애초에 이야기가 커진것도 이것때문이죠. 판타지소설에서 판타지적 요소를 빼면 무엇을 논할수 있을까요? 증명을 요구한다면 판타지를 볼 이유가 없죠. 그리고 역사적사실이 있다고 다른상황에서도 꼭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는 법은 없는데, 양탕님은 그런 유연성이 부족했구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박상준1
    작성일
    09.03.24 20:25
    No. 7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네요.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해낸 허구에 기초한 가상의 세계입니다. 판타지 소설은 그 허구와 가상이 더욱 극단적으로 전개된 소설입니다. 판타지 소설의 그 비현실성을 누가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 비평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문학적 문법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는 것 아닙니까. 저는 해당 작품을 읽지 못했으니, 그 작품에 대해서는 얘기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그 전개에 쏟아지는 힐난입니다.
    그 문학적 문법이란 별게 아닌 지극히 보편적인 문학적 담론인 세계와 주체의 문제입니다. 초인이 등장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초인이 가지는 세계사적 의미입니다.
    판타지를 신화와 전설 민담 등의 상상력에서 찾는다면 우리나라 판타지의 효시는 금호신화나 구운몽 등에서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판타지 소설의 신화적 원형을 찾아내는 것이 구운몽처럼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평은 문학입니다. 비평가는 작품을 해체하기도 뒤틀거나 재구성하기도 해서 하나의 창작물을 만들어냅니다. 이번에 거기에 쓰인 기재가 생산관계입니다. 그럼, 그 정치경제학적 기재가 판타지를 비평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논증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적 관점이 유연하니 마니를 따질게 아니고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박상준1
    작성일
    09.03.24 20:36
    No. 8

    금호신화-->금오신화. 삭제가 안 돼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금원
    작성일
    09.03.25 00:52
    No. 9

    항몽님, 제가 님한테 그렇게 말하는게 아니잖아요. 아로스에서 관료제나 봉건제도 한 요소지만, 아로스라는 인물의 능력과 아로스 세계자체의 잠재력도 중요한 요소였죠. 하지만 양탕님은 뒷부분에 관련해서는 증명할 수 없는 문제다라고 하며 무시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우리가 현실세계의 문제를 논한다면 모르지만, 글속의 내용을 논한다면 그 글의 상황도 판단의 한 요소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양탕님에게 제가 유연하지 못하다고 하는게 그렇게 거슬리나요? 저나 몇몇분이 계속이런 내용을 올리자 논지를 왜곡하여 힘만가지고 날뛰는 소설을 비평했죠. 이런 것에서 저는 양탕님이 판타지소설을 볼때 현실만을 절대적기준으로 삼으며, 집단을 위협하는 초인이 등장하면 글속에서 어떻게 자리잡는가보다는 깽판물로 본다고 느낄수 밖에 없더군요. 다시한번말하지만 그래서 사고가 경직되었다고 말한거구요. 그리고 앞으로 답변할때는 어려운말보다는 좀더 쉽게좀 해주실래요? 쉽게해주시면 이해하기 편하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박상준1
    작성일
    09.03.25 08:04
    No. 10

    예 금원님. 제 댓글 바로밑에 달려서 저한테 하는 말인지 알고 제가 대답했네요. 그리고 제가 어려운 말을 쓰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밖에 쓰지 못하는 제 한계인 것 같습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박상준1
    작성일
    09.03.25 08:12
    No. 11

    니다. 제가 공부가 적어서 이지요. 익히 알려진 개념 외에는 제가 말하는 것이 또 다른 개념 해석의 논쟁을 가지고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제 키보드가 문제가 있는지 중간에 글이 올라가 버렸네요. 삭제가 안 되니 좀 난감하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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