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분명히 세상에는 쓰레기, 지뢰를 읽고는 <너무 감동적이였어요.>
하면서 눈물 줄줄 흘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게 사실이죠.
하아.. 장르이외의 일반책들은 몇년후에 다시 읽어보면 처음에 느꼈던 것들과 다른 무엇을 알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뢰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몇년이 지난 후에 보면 어떤 기분일지.. 아흠.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글의 수준차이와 읽는 수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고,
아는만큼 느끼고 아는만큼 보는거라고 말할 수 밖에 없네요.
쓰레기와 명작이 모두 같은 장르 문학이다..
하하 올림픽 체조심사서 춤만 추면 다 10점만점 준답디까.. ㅋㅋㅋ
몇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a.사람들의 가치관 혹은 취향은 다양하게 존재하며 만물은 그 쓰임에 따라 천차만별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b.사람과 만물은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훌륭함과 안 훌륭함 강함과 약함 좋고 나쁨의 상대적인 층위로서 존재한다는 사실
a는 이세상은 다양성의 세계이다를 의미하고 b는 그 다양성도 층위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a와 b는 모두 사실이다.차이점은 a보다는 b가 좀더 구체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충돌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a와 b 중 어느 사실을 더 중시해야 할까?
예를들어, 누군가가 당신에게 만원짜리 지폐 한 장과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두고 가져가라고 제시했을 때, 만약 만원짜리를 선택한다면 b의 사실을 중시하는 쪽이고, 당신이 만약 천원짜리를 선택한다면 돈의 가치를 모르는 즉 a의 사실에 머무럴 뿐 b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기에 당신은 녹색의 지폐색깔보다는 붉은 색깔의 천원짜리를 더 아름답게 보았을지도 모른다.a의 사실인 다양성의원리에 의해서 당신은 특이하게 돈의 가치보다는 색깔의 아름다움을 우선시한다. 분명한 것은 당신은 돈의가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또하나의 예를 들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개고기를 먹는 쪽과 먹지 말아야하는 쪽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경우는 위의 만원짜리 천원짜리처럼 분명한 층위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개고기식육을 선택하든 금식을 선택하든 a의 사실에는 만족될 수 있다. 그러나 b의 사실을 만족시킬려면 엄청난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사실 개고기를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 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훌륭하고 안 훌륭한지를 밝히는 것은 훌륭함과 안훌륭함의 언어적 개념을 새로이 정립해가면서 따져야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식욕의 욕구를 훌륭함과 안훌륭함의 협소한 잣대로 잴 수 있겠는가.
위의 두가지 대표적인 예를 통해서 어떤 결론을 하나 도출해 낼 수 있다. 층위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안에 대해서는 우리는 a와 b중 b의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천원짜리보다 만원짜리가 더 가치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만원짜리를 선택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이경우 a를 중시하여 천원짜리를 선택한다면 당신은 특이한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층위가 사회적으로 합의되기에 까다롭거나 애매모호한 경우에는 a와 b중 a를 중시하는 것이 좀더 안전할 것이다.다양성을 인정하고 상대를 포용하는 자세가 우선시되어야 하며 층위를 결정짓기 위해서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섣부르게 b를 선택했다가는 독선적인 사람으로 지탄받기 십상이다.
위의 결론을 좀더 요약하면, 어떤 사안을 판단함에 있어서 다양성이냐 층위냐 선택을 해야한다면, 결국 구체적인 사안에대한 층위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어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입니다.
양판소를 놓고 이것을 다양성에 더 중점을 둬야하는가 아니면 층위에 더 중점을 둬야하는가 이것의 문제입니다. 문학에 대해서 훌륭함과 안훌륭함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제시되어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입니다. 분명히 제시되어있습니다. 양서와 금서가 있듯이 권하는 책과 권하지 않는 책이 있듯이 예술과 포르노가 존재하듯이 문학작품에도 분명한 층위가 존재합니다.많은 문학이론은 그래서 생긴것이죠. 좋은 식단과 나쁜 식단이 분명히 구별되듯이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나쁜식단도 다양성의 원리에 의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양판소도 다양성의 측면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저는 당신에게 다양성의 측면에서 색다른 식단을 제시하겠습니다. 5개월동안 하루세끼를 라면으로 드셔보십시오.
선생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습니까? 먼저 태어난 그사람들은, 다양성 이전에, 좋고 나쁨 훌륭함과 안 훌륭함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사람들을 존경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미 훌륭함을 경험했기에, 안훌륭함의 나쁜점을 알고 있기에, 먼저 아는 사람의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안훌륭함을 깨닫지 못하고 부실한 식단을 훌륭한 식단인줄 알고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슬픈눈으로 바라봅니다. 먼저 아는사람의 책임으로 그렇게 애써 아이들의 식단을 고칠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음....층위가 확보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런 층위의 문제를 장르에 갖다되면 거의 99%는 쓰레기가 됩니다.
정의와 주인공의 만족이라는 명분으로 살인을 정당화하고 법을 무시하며 사회안정을 위반하는 것이 장르문학이죠.
요즘 초등들이 온라인 총쏘는 게임으로 인해 사람을 쏴 죽이는것에 무감각해지고 몇명 죽였는지 기억안나요 하는 말들이 나오는데 무협, 판타지 소설에서의 살인과 구별이 됩니까?
층위로 따지면 쓰레기처럼 될 뿐이죠.
단지 책내용의 구도와 문법, 개연성만을 따져서 몇몇 책은 양판소가 아니니 명작이다... 그래서 이런 장르소설등은 살리고 나머지는 죽여야된다고 할 수 있나여?
물론 저도 양판소는 지양되어야 된다고 봅니다만 그것을 칼로 자르듯 층위가 합의되어졌다고 지양되어져야하는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한 층위를 나눔에 있어 장르소설에선 문법이나 구조등만 가지고 나누었는지 아니면 도덕적, 법률적, 기타 다른 내용 포함되어서 나누어졌습니까?
결국은 그런 책을 보는 독자 자체의 수준의 성숙이 문제라고 봅니다.
다라나님에게
굳이 나눌 필요가 있겠습니다까? 너무나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합니다. 왜 안좋은 음식인지 알려야죠.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해줘야죠.그래서 고치라고 설득해야죠. 더 좋은 음식을 갖다주기만해서는 알아서 더 좋은줄 모르니 가르쳐줘야죠. 그래서 어른이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설득을해야죠. 편식하면 좋지않으니 골고루 먹으라고 엄하게 질책을하고 꼬시기도하고 달래기도해야죠. 설득을 해야 변화하는 겁니다. 설득하지 않고 단지 제시하기만하면 변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어덯게 습관이 변하겠습니까?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이해를 시켜야 변화하는 겁니다. 이 과정이 없이 단지 좋은 음식을 소개만하면 그 좋은 음식이 좋은줄 모릅니다. 콩을 잘 안먹는 아이에게 콩을 아무리 들이대도 안먹습니다. 맛없다고 생각하는데 먹겠습니까? 그러나 콩의 유익한 점과 건강과 영양에 대해서 그리고 음식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 등등 다양한 경로로 설득하면 콩을 먹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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