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기영/성상영/운룡
작품명 : 경비무사/연단가/비룡재천
출판사 : 로크미디어/마루출판사/마루출판사
(비평도 아니요, 시비도 아니요. 그저 얘깃거리가 될 재미있는 대목들이 쉬지 않고 튀어나와 짚고 넘어가고자 할 따름이요.)
1. 또 하나의 세 쌍동이 도시를 탄생시킨 경비무사
"파마행 일행이 두 번째 목적지인 제갈세가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당가가 위치한 성도만큼은 아니었지만 양양 등 큰 도시를 곁에 둔 양번도 꽤 번화한 거리와 수많은 민가들을 지니고 있었다." 기영, 경비무사 제2권 292페이지
무한이 단일한 도시가 아니라 장강 남북의 무창, 한양, 한구(하구)의 세 도시(무한삼진)를 아우르는 세 쌍동이 도시임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지만, 무한삼진이 역사상 큰 의미를 가진 적은 항일전쟁 시기를 제외하고는 별로 없다.
무한과 유사하게 한강(한수)를 사이에 둔 쌍둥이 도시, 양양과 번성이 합하여 '양번시'가 된 것은 1950년의 일로, 삼국지를 한번이라도 읽은 이라면 형주가 자리하고 있던 양양과 관우가 최후를 마친 번성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제갈량이 은거하던 융중산이 양양 교외에 있는데, 기작가는 제갈세가가 있는 곳을 양양과 별도의 양번이라는 촌동네로 설정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양번은 양양+번성일 뿐 아니라 제갈량은 형주의 외척(삼국지연의에서 채부인, 채모의 사촌쯤 됨)으로 융중산에 일시 머물던 상황이었으므로 제갈씨의 본가가 여기 있을 이유도 없다. (양양과 번성은 실제 역사에 있어서는 삼국지보다는 30여 년에 걸친 송원전쟁이 유명한데 양양의 함락이 남송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2. 명나라의 대를 끊은 연단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을 건국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거인 서달의 집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내 손녀일세. 서영이라고 하지. 사위가 일찍 죽고, 사위의 가문 사람들 역시 전쟁통에 모두 죽는 바람에 내 성을 물려받은 아이지.”
서달은 아들 하나에 딸이 둘 있었다. 그중 장녀는 사위를 잃고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손녀만 남겨 두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성상영, 연단가 제1권 131페이지
주원장이 친위쿠데타로 호유용 등 개국공신들을 씨몰살시킨 것은 유명한데, 4대 승상 중 하나였던 서달 자신은 병사인지 독살인지 불명하게 죽었지만 그 후손들만은 쌩쌩하게 살아남아 번영을 누렸다. 성작가가 아들 하나, 딸 둘이라고 한 것과 달리 실제 서달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연왕 주체(영락제)의 황후요, 차녀와 삼녀는 대왕과 안왕의 왕비로 주원장과 3중 사돈이었다.
장녀의 사위가 일찍 죽기는커녕 정란지변에 성공하여 4대 영락제가 되었으며, 오히려 서달의 장녀인 인효황후가 즉위 5년 만에 죽었고, 인효황후는 아들만 셋을 두었으니 홀로 남아 서씨를 이은 손녀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부모가 죽었다고 손녀가 외가 성을 잇는다는 황당한 얘기는 듣기를 처음이다.
어쨌거나 서달의 세 딸 모두가 명나라 황실/왕실에 시집을 갔으니 서작가의 말대로 서달 사위의 가문이 전쟁통에 모두 죽었다면 명나라 황실이 모두 전멸을 당했다는 얘기 아닌가? 주원장 이하 주씨황실이 아예 대가 끊어져 이후 명나라 역사를 이을 수 없으니 300년 명나라 사직이 성작가의 붓 끝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명말 만력제 시기 주씨 종친이 15만 7천명이었다고 했는데 겨우 단 한 문장으로 여자까지 30여만을 날려버린 성작가를 보면, 과연 펜은 칼보다 강하다 아니할 수 없다.
3. 위조상품 제조의 효시, 비룡재천
“하문 포구에 자리한 유가 다방(茶坊)의 총관 오원융은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어렵사리 구한 녹차인 신양모첨(信陽毛尖)의 초청(炒靑: 찻잎을 뜨겁게 달구어진 솥 안에서 덖어냄) 작업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운룡, 비룡재천 30페이지
이 작품은 1권의 초입부터 특이하게도 차의 종류와 제조과정 등을 나열해대 작가가 제법 차 공부를 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청나라를 배경으로 함에도 명청을 구분 못하는 자잘한 내용이야 다 무시하기로 하고, 차에 대한 설명이 많으므로 차 얘기만에 국한하기로 한다.
중국 4대명차 뿐 아니라 세계 10대 명차로 꼽히기도 하는 신양모첨은 하남성 신양시에서 생산되므로 산지 이름 신양이 붙은 것이다. 그런데 하문은 복건성 남쪽 끝으로 주원장이 세운 작은 성 하나로 출발했지만 역사상으로는 명말 청초에 대만을 차지했던 정성공이 40여년 간 본토쪽 거점도시로 유지하며 청군과 공방을 벌인 요새도시로 유명하다.
운작가가 하문을 단순히 포구로 지칭(그것도 지겨울 정도로 자주)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지만, 그걸 알건 모르건 하남성 신양과 복건성 하문은 수천km 떨어져 있다. 그런데 신양에서 녹차를 날라다 하문에서 덖는다는 소리도 황당하려니와 그걸 덖는 이유가 이후 페이지에서 황실에 들어갈 공물(貢物)로 납품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는 그야말로 기절할 지경이다. 좁은 의미의 중원인 하남에서 차를 실어다 중국의 남쪽 끝인 하문에서 가공하여 북쪽 끝인 북경으로 납품한다는 설정을 황당해하는 건 운작가의 웅대한 스케일에 비해 내가 스케일이 작아서라는 걸 인정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뭐 그래도 운송비를 뺄 수 있다는 데야 뭐 할 말이 있겠는가?
운작가는 차에 대해 많이 아는 듯 설명을 나열하고 있지만 운작가가 가장 기본적인 사항, 즉 차를 왜 덖는지 알고 있는지는 심히 의문이며 이에 따라 이 설명들은 다 쓸데없는 사족이고 잘난 척이다. 즉 찻잎은 나무에서 따면 발효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차를 찌거나 덖는 것은 건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열을 가해 효소를 죽임으로써 찻잎의 발효를 중단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특성을 이용하면 찻잎의 발효 정도를 조절할 수 있는데, 발효를 진행시키다가 가열하여 중단시키면 여러 가지 단계의 발효차를 만들 수 있으므로 차의 산지뿐 아니라 이 가공방법에 따라 차의 종류가 나뉘게 된다.
특히 녹차(綠茶)는 찻잎을 따자마자 찌거나 덖어서 전혀 발효를 시키지 않은 차를 말하는 것으로, 신양모첨이 대표적인 녹차의 한 종류이다. 즉 하남 신양에서 이미 찻잎을 덖어서 녹차를 만든 걸 하문으로 날라다가 다시 덖을 이유가 없는 것이고, 신양에서 찻잎만을 따서 날랐다면 수천km 이동하는 동안 다 발효되어 버릴 것이므로 하문에서는 신양 찻잎으로 녹차를 만들 수가 없다. 하문에서 녹차를 만드는 방법은 하문의 차밭에서 딴 찻잎을 덖는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운작가가 설명한 신양모첨 가공은 하문에서 차를 만들어 ‘신양모첨’이라는 상표를 붙여 팔겠다는 위조상품의 제조를 설명하고 있는 셈이며. 이는 상표법과 원산지표시에 관한 법률의 심각한 위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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