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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란의 <레드 세인트>

작성자
Lv.10 뮤뮤
작성
09.08.05 05:33
조회
3,066

작가명 : 라옌다

작품명 : 레드 세인트

출판사 :

※ 미리니름이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작품을 읽지 못하신 분이나 연재분량을 반 이상 따라잡지 못한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편의를 위해 평어로 씁니다.

100회 연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정연란의 <레드 세인트>는 참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영문도 모른 채 납치당해 살인귀로 길러지고 또 학살당한 아이들의 비극적인 최후와 살아남은 아이들의 처절한 투쟁을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묘사하며, 인물의 내면을 심층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서술하고, 거칠고 욕이 난무해도 맛깔스러운 표현으로 독자를 즐겁게 하는 작가의 필력은 눈이 꽤 높다고 자부하는 독자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적인 요소들을 일일이 늘어놓는 것은 이만 자제하고 그 중 일부분에만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내가 <레드 세인트>에서 매우 높이 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는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의 완숙함이다. 이 작품을 2부까지라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제목의 ‘레드 세인트’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짐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자’는 성자이되 어디서 어떻게 성자로 추앙받다는 것이며, 어떠한 가치를 대변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앞으로의 전개를 통해 드러나겠지만 작가는 이미 본문과는 무관해 보이는 각 장의 도입부에서 힌트를 던져주며 ― 이제는 한국 장르소설에서 클리셰 격이 된 ‘허구문헌발췌 도입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 본문에서는 보이지 않는 포석을 하나씩 두어가고 있다. 힌트는 1장의 도입부에서 언급된 ‘이퀄리안 교’이며 키워드는 ‘이퀄리안(equal=같은, 동등한)’에서 알 수 있듯이 ‘평등’이다. 이는 도입부에서 보듯 후에 왕정의 몰락과 공화정의 수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레드 세인트>는 이념을 부르짖고 있는 글이 아니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평등’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은 1장 도입부 이후로 본 기억이 없다. 주인공도 뭐 대단한 이념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유지를 잇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에 따라 살인귀들에게서 살인 충동을 지우는 막막한 과제 앞에서 달아나지 않겠다는 반항심에 의지해 힘겨운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뿐이지, 누굴 구원하겠다느니 세상에 나의 이상을 퍼뜨리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아직까지는) 추호도 품고 있지 않다. 반면에 주인공이 평등, 박애 같은 생소한 개념을 깨닫고 세상에 자신의 이상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은 흔하다. 그 중 대부분이 중2병 수준에 머무르고, 잘 된 축에 드는 작품들도 상당히 직접적으로 주제를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미숙함과 한계를 드러낸다. 이와 달리 <레드 세인트>의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대신 주인공과 대립하는 세력의 논리와 그 사상적 배경을 부각시키되 그 역시 지나치게 드러나지 않게끔 하는 놀라운 절제력을 보이고 있다. 주인공을 이념을 위해 싸우는 투사로 그림으로써 현실성을 망각하고 진부한 전개로 이어지는 우를 범하지 않는 노련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아직 표면으로 완전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회의 사상적 중심은 라르팔레스 교이다. 라르팔레스 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중 하나는 ‘차별적인 사랑’이며, 신은 만물을 차등을 둬서 사랑하므로 인간은 신에게 좀 더 사랑받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그런데 현세의 신분격차가 전생에 산 삶의 결과로, 신분상승은 현세의 삶을 통한 노력으로 내세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라르팔레스의 교리는 정치적 목적과 결합하여 주인공과 그 동료들이 당한 비인도적인 일, 즉 ‘정적에게 오명을 씌우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하여 살인귀로 만들어 충실한 가신을 암살하게 만들었고, 자신이 기른 그 살인귀들을 학살하여 영웅이 되고 왕이 된 것’을 ‘있을 수 있는 일’로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역겹기 짝이 없는 억지 논리이지만, 피해자 중 하나인 니넷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보편적인 사상에 근거를 둔 주장이기도 하다.

“지랄 말고 끝까지 들어. 너도 신학이라는 걸 좀 공부해 봐라. 신이라는 새끼가 세상 만들길 이 모양으로 만든 거야. 라르펜 성자 가라사대, 천한 것들은 선행을 행하여 내세에 귀하게 나도록 노력하고 귀한 것들은 우를 범하기 쉬운 권세를 타고났으니 이로 인해 내세에 천하게 나기 쉬우니라. 알아들어? 아마 다리아탄의 대의를 위해 시타디아에서 뒈진 우리의 불쌍한 친구들은 내세에 어디 엘프나 페리의 귀족가 장남 차녀쯤으로 태어나시겠지. 그리고 아마 다리아탄은 오크 사생아나 드워프 팔삭둥이로 태어날 거야. 그건 원래 그런 거지. 근데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위에 있는 것들을 쳐 죽이는 건 성자가 허락한 적이 없거든. 다리아탄은 성자가 허락한 짓을 우리한테 했고, 넌 성자가 허락하지 않은 짓을 다리아탄한테 하려는 거지.” (본문 중에서)

따라서 아직 주인공과의 접촉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주인공과 대립하는 세력의 사상적 토대인 라르팔레스 교는 필연적으로 주인공과 충돌하게 될 것이라 예상된다. 그리고 충돌이 있더라도 이념적인 측면이 아니라 주인공과 그 동료들의 생존, 또 다른 희생자 발생의 저지를 위한 것이겠지만, 작가가 깔아둔 포석에 의하면 이러한 교리는 주인공이 가진 사고방식과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다. 스승 예라스티난이 가르친 ‘나 뿐만 아니라 남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남을 대하면 남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니 서로를 그렇게 대하지 않을 때보다 살기가 편하다’는 이치와 ‘피살자의 죽음과 피살자의 친지들이 경험하는 상실을 똑같이 되돌려 받음으로써 욕망을 위해 남을 죽이는 행위로 얻은 죄를 용서받은 것’의 본질을 주인공은 결코 잊지 못할 테니까.

이렇게 작가가 노련하게 배치해 놓은 포석들은 주인공에게 드러나지 않은 항상성과 일관성을 부여한다. 주인공은 전혀 의도한 바 없지만, 적들의 음모에 맞서 싸울 때 그는 동시에 적들이 대변하는 부조리와 불합리를 온몸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 주인공의 살해 욕구를 없애기 위해 예라스티난이 택한 방식의 본질은 주인공에게 과제로 남겨진, 동료들의 살해 욕구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에 대한 해답과 닿아 있을 것이며, 앞으로 주인공의 투쟁이 계속됨에 따라 명확해질 것이라 추측된다. (이 부분은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추측해본 것이다.) 주인공이 다리아탄의 마수로부터 구해내려고 하는 삼천 명의 유민들이 이웃나라의 종족 차별 정책에 쫓겨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심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주제가 줄거리에 은은하게 녹아 흐르는 경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렬한 첫인상에 반해 선호작으로 등록한 작품에서 이와 같이 흔치않은 노련함을 발견한 독자는 더욱 즐거워진다.


Comment ' 10

  • 작성자
    Lv.27 투원공210
    작성일
    09.08.05 06:10
    No. 1

    훌륭한 비평글... 나중에 보려고 했는데, 오늘 하루는 레드 세인트와 함께 하기로 마음 먹게 만들어주시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광명로
    작성일
    09.08.05 19:53
    No. 2

    이게 비평인가요?
    감상에 가까운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0 뮤뮤
    작성일
    09.08.05 20:32
    No. 3

    ㄴ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물론 제가 전문적으로 비평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 게시판에서 비평/감상의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이 글은 저의 가치관에 근거한 개인적인 느낌에 대해 쓴 것이 아니라 작가님이 주제를 줄거리에 반영하고 풀어나가는 방식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해본 것인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8 마법시대
    작성일
    09.08.05 21:28
    No. 4

    조아라에서 루나틱 언벨런스를 굉장히 재밌게 봐서 기대중입니다.
    분량 좀 쌓이면 보려고[...]
    루나틱 언벨런스가 연중인건 아쉽지만... 음 두 소설이 같은 세계관이었던것 같은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 유리아드
    작성일
    09.08.06 01:11
    No. 5

    호의적인 비평도 충분히 있을 수 있죠. 문피아에서는 나쁜 말을 하면 비평이고 좋은 말을 하면 감상 또는 추천이라고만 하니 문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0 서래귀검
    작성일
    09.08.06 01:29
    No. 6

    이거 굉장히 재밌겠군요...꼭 보겠습니다..제발 문피아에서 부정적인 감상을 감상란에 올리게 해야 이런 글이 비평란에 있어도 되냐고 묻는 리플이 없어지겠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1 벽글씨
    작성일
    09.08.07 16:55
    No. 7

    원래 문학계에서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게 비평이 긍정적으로 쓰이는데, 딱히 장르 소설 사이트에서는 적용할 필요는 없을지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0 뮤뮤
    작성일
    09.08.07 17:35
    No. 8

    ㄴ비평의 사전적 의미(사물의 미추·선악·장단 등을 들추어내어 그 가치를 판단하는 일) 자체가 중립적입니다.

    ...뭐랄까, 왜 비평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로 제가 방어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게시판 성격에 안 맞는 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싸사 님께서는 굳이 옮길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라는 점 이해하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5 외로운남자
    작성일
    09.09.20 23:08
    No. 9

    레드세인트 정말 좋아하는 글입니다~
    좋은 비평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3 아그니
    작성일
    09.10.16 23:05
    No. 10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비평문이군요. 저도 이런 비평문을 써야 할 텐데...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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