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라클 드로잉
작가 : 탈주병
출판사 : ?
미라클 드로잉. 한 때 나는 이 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봤다. 초창기의 미라클 드로잉은 정말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정말 별의 별 것을 다 시각화 시켜서 묘사했고, 드라마도 잘 살아 있었다. 잘 쓴 요리소설을 보면 소설에 나온 걸 먹어보고 싶지 않은가? 이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이 소설으 보다가 내 태블릿의 배경화명이 르누아르의 그림으로 바뀌었다.
그땐 정말 좋았다. 한... 130화까지는.
이 소설은 이제 재미있지 않다. 뭐랄까... 계륵 같은 존재다.
이 소설은 주인공을 잃어버렸다.
단순히 주인공의 등장이 적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아, 물론 그것도 큰 문제이긴 하지. 주인공의 등장이 3화에 한 번, 5화에 한 번 이런 꼴로 나온다면 당연히 문제이지 않을까?
최근 4화에는 주인공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용을 보아하건데, 아마 한 2~3화 정도를 더 주변인물의 주인공 찬양으로 채워 넣을 것 같다. 그럼 벌써 6화 이상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되겠네. 만약 최근 4화 이전에도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니, 그런 건 생각하지 말자. 이미 충분히 머리는 복잡하니.
어쩌다가 그 재미있던 소설이 이런 꼴이 되어버렸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이 소설의 전개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전개방식은 다음고 같다.
지나가던 주인공이 누군가를 만난다. 혹은 어떤 사건을 당한다.(그 사건에서는 그림의 품질과 고칠점을 알려줄 빛이 등장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 허벌나게 불쌍하고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이 연관되어 있다. -> 주인공이 그림을 그려 불쌍한 이를 구원한다. -> 이전 전개에 사용했던 것만큼의 분량을 소모해 주인공을 찬양한다.
물론 이런 전개 방식이 미라클 드로잉에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게 항상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미라클 드로잉에서는 아니다. 여기서는 이 전개방식이 아주 나쁜 형식으로 등장한다. 어떤 형식이냐면...
종교 경전의 형식이다.
빈정거리려고 일부러 자극적인 용어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저렇게 느끼고 있다. 미라클 드로잉은 그림을 그려 사람을 구원하는 신, 진호를 찬양하기 위해 쓰여진 경전이라고.
미라클 드로잉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다. 물론 사람의 탈은 쓰고 있지. 하지만 오욕칠정이라는게 존재하질 않는다. 내 기억에 분명 초반에는 주인공도 사람이고 오욕칠정이 존재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오욕칠정이 사라졌다.
초반 주인공은 자신의 재능없음에 절망하던 평범한 청년이었고, 그림의 빛을 보는 능력을 얻은 이후에도 그것을 확신하지 못해 스스로를 갈고 닦는데 여념이 없는, 전문가 능력물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가 누군가와 엮이고, 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진행하고...
그런 식이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주인공은 인간성을 상실한다. 진호는 뭔가 야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기 위해 내달리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인간적인 약점이나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방황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어이없는 모욕이나 중상모략, 하룻강아지의 깝죽거림에도 아무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불쌍하고 어리석은 이들을 지혜로운 말씀과 그림으로 깨우칠 뿐이다.
이 친구는 정말 별의 별 장소에서, 별의 별 일로, 별의 별 사람들을 구원한다.
대충 이런 식이다.
인터뷰를 하려고 기자를 기다리다가 ‘정말 우연히’ 자신의 음악적인 가치관으로 인해 고민하는 국악인을 만난다. 그리고 마치 구세주가 계시를 내려주듯 몇 마디 말과 그림(혹은 그림 비슷한 것)을 통해 깨달음을 준다.
내가 본 글에서만 주인공은 저런 방식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 3류 배우, 스승의 그늘에 가려있던 천재화가, 3류 연출가, 동화 작가, 레스토랑 주인, 국악인, 피아니스트, 가수 등을 구원했으며 이 목록이 전부인 것도 아니다.
최악의 전개는 그 중에서도 자신의 예술관 때문에 방황하는 예술인들을 구원할 때이다. 그는 고민도 안 하고 몇 마디 지혜로운 말씀과 함께 친히 그림(이나 퍼포먼스)을 그려 단박에 그들을 깨우쳐준다. 아니, 완전 다른 분야잖아? 주인공은 분명 화가였을 텐데? 그나마도 자기 앞가림도 못해서 허우적대던 그런 화가?
상상해보라. 요리 소설의 주인공이 볶음밥을 볶아 방황하는 미술인을 구원하고, 만두를 찌며 음악인을 구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게 계속 반복 되는 것을.
기괴하지 않은가?
주인공이 보여주는 게 그런 모습이다. 나는 솔직히 주인공이 왜 화가인지도 이해가 안 간다. 이 주인공은 화가라기보다는 예술인 전체를 굽어살피시는 자비로운 신이시다. 다만 구원해주는 과정에서 그림을 조금 그려줄 뿐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미라클 드로잉의 독자들이 ‘분량 늘리기’, ‘삼천포’ 등으로 지적하는 이상한 전개가 등장하는 것이다.
걸핏하면 갑자기 등장한 1회용 주변 인물들에게 3~4화씩 할애하는 이유는 따로 없다. ‘이번에 구원받을 어린양은 이런 사람입니다.’라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3~4화에 걸쳐 구원받을 어린양을 설명하고, 한 1~2화에 걸쳐 주인공이 친히 강림해 구원해주고, 다시 3~4화에 걸쳐 구원받은 어린양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매사 이런 식이니, 나는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인지 진호복음을 읽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것이다. 불쌍한 진호. 다른 소설의 능력자들은 다른 예술인이나 도탄에 빠진 어린양을 구원하지도 않는데 돈도 벌고, 명성도 얻고, 자기 전문분야의 새로운 경지도 맛보고, 심지어 여자친구도 생기는데! 그리고 소설의 초점도 주인공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렇게 불쌍한 주인공도 또 없을 것이다. 조연을 구원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버린 탓에 정작 자기 소설에서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으니까.
솔직히 나는 이 비평을 쓸까 말까 엄청, 정말 엄~청나게 고민했다. 한 한 달은 고민한 것 같았다. 소설을 읽어도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아, 또 이거네. 정말 비평 써야하나?’라는 생각만 들 정도였으니. 정말 거의 한 달은 고민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쓴 건, 최근 4화를 보니 이제는 저 전개방식까지도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다.
281, 282화의 내용이 뭔지 아는가? 주인공이 50화도 전에 더 그렸던 그림동화에 감동을 ‘받는 순간’이다. 내용을 보니 50화 전에 주구장창 나왔던 찬양을 또 한 번 할 셈인듯 했다.
동화책 찬양이 50화의 간극을 뛰어넘어 예토전생한다니... 하는 절망감이 들었다. 심지어 2화 분량에 걸쳐 설명한 것이라고는 ‘이런 사람이 찬양할 예정입니다.’뿐이었다. 겨우 그걸 위해 2화 분량이 소모되었다.
그래도 희망을 가졌다. 마지막에 여동생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인공 목소리라도 듣겠지?’했는데.... 역시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작가는 283화와 284화를 소모해 ‘우리는 다른 것으로 주인공을 찬양할 예정입니다.’하고 떡밥을 뿌렸다. 찬양했다고 안 했다. ‘찬양할 예정이라고 떡밥’을 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찬양 주제는.... 무려 100회 연재를 마지막으로 종결되었던, 과거 가수를 구원했던 이야기이다.
50회 전에 했던 일을 다시 찬양하겠다고 떡밥뿌리더니 이번에는 100회 전 걸 찬양한다고 떡밥 뿌린다고? 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100회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100회 연재’를 마지막으로 끝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183화 전에 완전히 종결된 이야기를 다시 예토전생 시키겠다고 ‘떡밥 만’뿌린 것이다.
나는 그걸 보고 이 비평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정말 100회 연재에서 완전히 종결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100회 말미에는 이렇게까지 써놓았다.
‘진호의 XX 초상화가 사용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난 후의 이야기였고, 방송사에는 가수와 화가의 이야기라며 또 한 번 크게 회자되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떠돌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완전히 마무리 지어놓고, 183회가 지난 지금에 와서 ‘그 가수가 방송에서 화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면’을 설명하겠다고 그 많은 분량을 소모하겠다는 말인가? 떡밥만 뿌리고 말 것은 아니지 않는가? 또 최소 3~5화는 소모하겠지.
하....
나는 작가가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눈물을 쏙 뺄 갬동적인 이야기.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
뭐 그게 꼭 나쁜건 아니다. 근데 그걸 ‘데우스 엑스 마키나, 메시아 진호’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니 문제인 것이다. 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이야기의 끝에서 등장하겠는가? 그 분이 강림하시면 모든게 단박에 종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주인공이니, 당연히 주인공이 실종되고 이야기가 겉돌 수 밖에.
나는 ‘이번에는 주인공이 등장하겠지?’라는 어이없는 기대를 하며 소설을 결재하는데 지쳤다. ‘역시나 안 나오네.’, ‘또 찬양이네.’하는 맥빠지는 재확인에도 지쳐버렸다.
아직까지는 과거 초반부의 기억을 추억삼아 미라클 드로잉을 놓지 못하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메시아 진호’가 아니라 ‘인간 진호’를 보고 싶다. 주인공이 초반부처럼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열정을 품고, 새로운 경지를 밟으며 희열을 느끼는 것을 보고 싶다. 가끔 다른 사람들과 갈등도 일어나고, 화도 내고, 욕심도 부리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고 싶다.
나는 옛 미라클 드로잉을 보며 느꼈던 재미를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 비평을 쓴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