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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인 및 폭력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접하고 있다. 뉴스에서부터 영화, 소설, 게임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살인과 폭력에 대한 이야기들을 접한다. 특히 영화와 게임의 경우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통한 현란한 영상으로 살인과 폭력이 다뤄지고 있다. 때문에 소설에 대해서만 살인과 폭력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장르문학의 속성상 전적으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장르문학, 특히 무협소설이 어떤 방식으로 살인과 폭력에 대한 책임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작품에서 드러내는 표현수위와 더불어, 작가가 어디에 포커스를 맞출 것인가 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폭력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표현적 기법으로 보면 유머를 통해서 경감시킬 수도 있고, 과장된 측면을 두드러지게 보임으로써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숙련된 기법이 필요한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소재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
그렇다면 필자의 생각으로는 세 가지 방법이 남아있는 것 같다. 첫째, 선택한 주제를 작품 속에 명확하게 펼쳐 보이는 방법과 둘째,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경우, 그리고 셋째 도덕성의 부각이다.
그런데 주제를 작품 속에 온전히 드러내 보이는 건 사실 표현적 기법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면 선택할 것은 후자의 두 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면 무협소설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은 혹자(或者)들이 케케묵은 것으로 생각할 덕목인 협이다.
1. 법의 불합리성, 비형평성
법은 왜 제정하는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 있어서 하나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춰 다툼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즉 소유의 문제, 살인의 문제, 기타 분쟁 혹은 분쟁의 씨앗이 생길 만한 여러 가지 일들을 원만하게 처리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간혹 우리는 법이 불공평함을 토로하는 여러 목소리들을 들을 수가 있다. 법이라는 존재는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하면서도 불평등하다고 외치는 사람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법을 누가 제정하느냐와 관련이 있겠다.
법은 집권층에서 제정하는 것이다. 집권층은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곤 대개 세력가 혹은 유한계층에서 배출된다. 즉 법은 이미 태생적으로부터 지배층 혹은 유한계급에게 편향되는 한계를 갖는다.
자고로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하지 않던가. 법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일정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춰야 하는데, 그 지식을 갖추는 것에는 매우 뛰어난 지능을 갖춘 몇몇의 천재를 제외하곤 대개 경제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하루 종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한 사람이 공부할 시간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겠는가. 또한 가난한 이라 하더라도 법을 다룰 자격을 갖는 순간부터 십중팔구 유한계급에 편입된다. 즉 집권층 및 유한계급에 비교할 때 무한계급 혹은 빈한계층에서는 법에 있어서 불리하다.
한편 법은 집권층이 집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기도 하다. 농경사회에 있어서 지주는 단지 부자에 한정되지는 않았다. ‘땅’이라는 생활터전의 소유, 즉 경제생활의 주체로써 지주는 촌락에 있어서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는 위정자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지방호족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명 태조 주원장이 제정한 <대명률>에는 중앙집권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의 호족 및 지주들에게 손을 들어주는 다수의 조항들이 들어가 있다. “노비는 주인을 고발해서는 안 된다.” “동생은 형의 범죄에 대해 증언하지 아니하고”, “처는 지아비에 대해 증언하지 아니하며 노비는 주인에 대해 증언하지 않는다.” 등 다수의 조항이 그것이다.
이런 법의 불평등의 경향이 과연 과거에만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2. 무법자로서의 협의 정당성 혹은 당위성
정부를 ‘칼만 안 든 조폭’이라고 얘기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위에 제시한 법의 불공평성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또한 정상을 참작한 살인이라 하더라도 5년 이상의 실형을 언도하는 데에 반해 경제사범들에 대해서는 2년 6개월 내지는 3년 정도의 형량을 매긴다. 설령 수천억의 사기를 쳐 수십 수백 명의 피해자들을 자살로 내몰아간 어떤 사기꾼의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어떤 여성의 정조를 유린하여 자살로 몰아간 자의 경우라 해도 그에게 내려지는 벌은 강간 혹은 강간치상 정도일 뿐이다.
그런데, 소위 민주주의사회라고 하는 지금에 있어서도 불평등하다, 억울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은 마당에, 과거의 법은 어떠했을까. 지방 관리와 결탁한 호족 및 지주들은 무한계급에 대해 사리사욕을 마음대로 채우면서도 법의 그물망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더욱이 ‘노비는 주인을 고발해서는 안 된다’라는 법 조항이 있을 정도 아닌가.
법이 제대로 작동을 못하는 경우에, 도저히 비분강개함을 참지 못하는 성질 급한 자가 택하는 경우는 둘 중 하나다. 분에 못 이겨 분사하거나, 칼을 움켜쥐고 불의의 대상을 향해 휘두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서해의 작품 <홍염>은 중국인 지주에게 딸을 수탈당한 한 늙은 아비의 방화 및 살해를 그리고 있다. 비록 문학사에서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지는 못하나, 식민지 시대의 울분을 형상화한 것, 지배계층에 착취당하는 피지배계층의 분노를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한편, 독자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무협소설에서는 협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굳이 <규염객전>이나 <혈기린외전> 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협이라는 것은 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부정과 불평등함에 대한 저항의 정신을 모태로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인간 본연의 정의감의 실현과 부친(혹은 그에 준하는 스승이나 여타의 다른 인연들)에 대한 복수 혹은 불의한 자들에 대해 징벌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협이라는 것이다.
3. 협과 무정부주의의 구분
협과 무정부주의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아니, 무정부주의 안에 협이라는 개념이 종속된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싶다. 무정부주의자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정부 혹은 집권계층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는 경우이다. 부조리한 법과 부정부패를 일삼는 집권계층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는 경우는 위에서 얘기한 협과 일맥상통한다(물론 정부 혹은 집권계층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기력한 반응을 보이는 것 역시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경우에는 순문학과도 닮은꼴을 갖는다. 모더니즘이 이데올로기(혹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각종 기제들-그 속에 자본주의와 법도 포함된다)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파편화되고 사물화 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전혀 파악이 되지 않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주인공들이 처음부터 비양심적인 인물들은 아니다. 처음에는 비양심적이었다 하더라도 끝까지 비양심적인 채로 끝나지는 않는다. 또한 비양심적인 인물들이 주인공인 경우에는 그것을 희화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현대사회의 파탄과 비극성에 대한 것을 표방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둘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정의라는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이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경우이다. 우리는 그들을 흔히 조폭이라고 일컫는다. 불법을 통해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 자신보다 약한 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바로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즉 협에 있어서 반대되는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은밀한 거래를 통해 거대자본에 종속되기도 하고 혹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합류하기도 한다.
선악의 개념이 모호해지면서 무협소설 속에서 그려졌던 기존의 영웅적 인물들과 다른 주인공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도오>에서의 위악적인(악한 척 하나 실은 악하지 않은) 주인공을 필두로 하여 선악의 개념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순박한 주인공과 <비뢰도>에서의 다소 이기주의적인 행태를 보이는 주인공까지 다양하다. 이것은 정치를 비롯한 기존의 가치관들에 대한 불신감이 높아지면서 반영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는 주인공들이 보이는 양상이 “불법 혹은 비도덕=협”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친구에 대한 의리와 같은 따뜻한 마음이나 약자에 대한 측은지심을 가지며 순수한 악에 대해서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의 양심’을 저버리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또한 블랙코미디적 색채를 띤 한상운 작가의 <신체강탈자>에서 보이는 악덕하고 파렴치한 군상들 역시 결국은 자멸의 길로 향한다.
4. 마치며
본래 독서량이 많지 않고 작품의 선택에 대해서도 극히 개인적인 취향대로 선택하는 탓도 있겠으나, 필자는 3년 전부터 장르문학을 거의 접하지 못한 탓에 그 이후의 무협작품들에 어떤 개념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것은 온전히 필자의 일천한 독서경험만을 토대로 한 글임을 밝혀둔다.
작품 수준의 층위가 다양해지면서 소위 깽판물이라 불리는 무개념 주인공들의 만연에 대해서 들은 바 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양산형 깽판물이 대세라고 불린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협의가 없는 폭력은 그저 폭력일 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독자들이 보기에 그 작품이 협의(俠義)에 대해 다소 미흡하게 표현되었을지라도 작가들의 본래 표현하고자 했던 바는 그게 아닐 거라고도 믿는다.
하지만 다양한 색채의 소설과 작가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되, 적어도 무협이라는 장르를 표방한다면 무분별한 폭력을 일삼으며 성공하는 악한, 악행을 통해서 성공하는 악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진다. 독자들이 “강하기 때문에 정의롭다”, 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1823년 한 소년이 축구공을 손에 들고 달리는 순간, 그것은 축구가 아니라 미식축구의 시초가 되었듯이 근본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혹은 새로운) 장르일 뿐 기존의 장르에 소속될 수 없다. 또한 무협소설이 문학으로서의 보다 확고한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협(俠)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협이라는 근본을 잃어버린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무협이라 부를 수 없다. 또한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을 잃어버린다면 무협의 문학적 위상은 매우 위태롭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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