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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란

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Comment ' 8

  • 작성자
    Lv.1 칼도
    작성일
    06.08.23 03:13
    No. 1

    혹시라도 달릴 댓글들과 무관하게 펌글 하나를 포함하여 보론을 두 세개 달 예정입니다. 따로 올리는 것은 도배가 되어버려 안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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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고요한아침
    작성일
    06.08.23 13:30
    No. 2

    오.. 이런글 읽는거 지지리도 귀찮긴 하지만 충분히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이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 양 이상으로 생각할 거리를 주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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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북극대성
    작성일
    06.08.23 14:15
    No. 3

    칼도님에게

    먼저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네 가지 질문과 네 가지 답변의 일관된 논점은 좋다/나쁘다의 가치판단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환상이라는 것을 [좋다/나쁘다]라는 가치판단을 내리기보다 [왜곡/진실]이라는 사실판단으로 가는 것이 의미전달에 좀더 낫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질문1.당신은 왜곡된 환상을 주는 것은 예술로 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답변1.정확히 말하면 나쁜 예술의 속성 가운데 하나를 왜곡된 환상으로 본 것이었다. 왜곡된 환상 때문에 나쁜 예술은 물론 순수예술에도 있을 수 있다.

    위의 예처럼 예술작품 속의 환상을 좋다/나쁘다의 가치판단보다 왜곡/진실이라는 사실판단으로 대체해보면 좀더 의미가 명확해지고 불필요한 논쟁의 소지가 없어집니다.왜곡된 환상은 분명히 나쁠 것이고 진실된 환상은 좋은 것이 분명합니다.
    질문2에서 "개인차원의 가치판단일 뿐이다"라는 의문이 제기된 이유도 이와같습니다. 왜곡/진실이라는 사실판단으로 접근한다면 위와같은 질문이 제기될 리가 없을 테지요. 사실판단은 순수한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칼도님의 답변처럼 작품 속에서 또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판단됨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질문3에서도 마찬가지로 좋다/나쁘다의 가치판단 때문에 불필요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논의의 본질은 왜곡/진실인데 토론은 좋다/나쁘다로 진행되니 대중예술의 장점이 반론으로 제기되었습니다. 대중예술의 장점인 오락기능은 왜곡/진실이라는 사실판단과는 무관한 사항입니다. 대중예술은 분명히 장점이 있지만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재미를 추구할 순 없겠죠.
    질문4에서는 더디어 왜곡/진실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토론이 진행되었는데요, 질문자는 평균적 대중의 지적수준이 왜곡을 구분해 낼 정도의 수준이기에 대중예술에 의해서 대중이 기만당할 리가 없다는 입장이고 칼도님은 대중기만이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입장입니다.

    장르문학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작품속에 강간장면이 들어 있고 그 강간장면이 실제와 왜곡된 것이며 또한 심각한 비윤리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글을 읽고 있는 평균대중이 좋다/재미있다/건필/구무협의향수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할 것이며 창작의 자유도 분명히 보장받아야 할 것이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분명히 지켜야할 보편적인 가치관이 담보될 때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만약 이것을 지키지 못하고 무한정 자유를 외친다면 스스로 그 존재가치를 깍아내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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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秋雨
    작성일
    06.08.23 16:36
    No. 4

    있음에도 불구하고(일본식 발음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maestro
    작성일
    06.08.23 20:24
    No. 5

    秋雨// 이왕 지적해주셨으면 대체되는 한국식 어법도 알려주시는게
    어떨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칼도
    작성일
    06.08.23 20:57
    No. 6

    전체가 일본어적 어법인지는 모르겠고 '불구하고'를 빼도 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습관이 되어서 부지불식간에 붙이게 됩니다.
    -------------------------------------------------


    보론 1 - 로맨스 장르 이상의 것으로서의 <로미오와 줄리엣>


    얽매임의 비극, 운명인가 덫인가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고대의 비극에서 인간은 신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나 신탁이 정한 운명에서 헤어나지 못해 비극적 삶을 살게 된다. 아가멤논에서 오레스테스로 이어지는 아트레우스 가문의 비극은 신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작된다.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덫에서 헤어 나오려 하나, 신탁의 내용은 결국 실현된다. 아드메토스와 알케스티스의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만, 비극으로 끝날 뻔한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의 호의 때문에 시작되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근대 초기의 극작가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젊은 시절에 쓴 작품이지만(1590년대 초), 벌써 근대의 비극이 어떤 구조를 갖는지 잘 보여 준다. 근대의 비극은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든 조건 때문에 탄생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심히 보아야 할 점이 있다. 사람들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비극의 조건을 형성하지만, 그것을 ‘신화화’하면서 마치 고대의 신탁이나 신이 정해준 숙명처럼 ‘바꿀 수 없는 조건’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고대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거역할 수 없는 어떤 ‘불변의 구조’ 속에서 비극적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두에서부터 잘 드러나 있다. “아름다운 베로나를 무대로, 세도 있는 두 가문이 오랫동안 쌓인 원한으로 또 싸움을 일으켜, 시민의 피로 시민의 손을 더럽힌다. 이 두 원수 가문의 숙명적인 허리에서 불운한 한 쌍의 연인이 태어난다.” 몬타규와 캐풀렛 가문은 사회 생활을 하는 가운데 서로 반목하는 사이가 된 것이지만, ‘두 원수 가문의 숙명적인 허리’라는 조건은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하는 신탁과 같이 작동한다. 그것을 증명하듯 극이 시작하자마자 두 가문의 하인과 친척들은 이 숙명적인 대립 관계를 행동으로 직접 보여준다. 그들은 두 가문이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불변의 구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구조는 오로지 죽음에 의해서만이 깨질 것이라는 점에서 어떤 신탁의 억압성보다 더 억압적이다. 그래서 이 비극은 표면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여섯 사람의 무고한 ‘죽음의 이야기’를 그 근저에 깔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사랑은 자연스런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만나서 이루어낼 일이 무엇이겠는가. 둘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그 사랑은 우연적으로 보일 뿐 사실 필연적이다. 이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사건이 오히려 필연적이어서는 안 되는 인위적 구조의 ‘필연성’ 안에서 헤어나지 못함으로써,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비극이 된다.

    이들의 비극은 절대화한 인위적 구조와 자연적 표출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다. 모든 인위적인 것은 모든 자연적인 것과 충돌할 가능성을 지닌다. 이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검 앞에서 베로나의 영주가 한 말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늘은 그대들의 기쁨인 자식들을 서로 사랑하게 해서 그 사랑으로 인해 도리어 파멸하도록 했다. 나 또한 그대들의 반목을 등한시 한 죄로, 친척을 두 사람이나 보내 버렸다.” 몬타규와 캐풀렛 가문은 상호 증오를 절대화해서 인위적 구조를 만들었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하늘의 뜻대로 자연스럽게 서로 사랑했지만, 그 구조의 포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구조가 운명처럼 그들을 함부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랑은 희생되고 구조는 오로지 죽음에 의해 깨져 두 가문은 화해하게 된다.

    이 비극은, 인간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인간 스스로 불변의 구조를 만들어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즉 인간이 사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삶의 조건들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위적 조건들이 절대화할 때,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표출은 그 조건들과 갈등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결국 비극은 탄생한다.

    비극의 대단원에서 베로나의 영주는 이 점을 성찰하자고 사람들을 초대한다. “서글픈 평화를 가져오는 아침이다. 태양도 슬퍼서인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구나. 이제 가서 이 슬픈 일들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칼도
    작성일
    06.08.23 21:00
    No. 7

    보론 2 - 예술의 훌륭함이란


    질문 1:

    당신은 순수예술이란 사회적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깨버리는 어떤 그 이상의 충격을주는 예술이라 말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계몽되고 깨지면서 그 인식의 지형이 넓어 진다면, 그전 인식의 지평을 깨는 예술작품은 무엇이 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예전 신분제 사회일때 신분제를 깨기 위한 어떤 사상이나 예술작품은 그당시에는 분명 사회적 인식의 바깥에 있었으나 지금은 분명 사회적 인식의 안 쪽에 있다. 또한 여성 선거권 1인 1표제등 역시도 예전에는(16~17c) 생각하기 힘든 것이지만 지금에는 당연한 것들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당시의 그런 사상들을 닮고 있는 것은 지금에 와서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순수예술이 되는 것인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인가?


    답변:

    1) 훌륭한 예술의 기준

    사회적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서 깬다는 것은 여러가지 내용을 가질 수 있다. 원근법보다 더 실제의 인간의 시각경험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외부 세계를 재현한 그림 그리기,중국에서 온 관념산수 안그리고 조선의 산천을 염두에 둔 진경 산수 그리기, 캔버스에일상적인 물건들을 붙이기(콜라쥬), [연극에서] 객석을 무대와 통합하기, 조성을 안쓴음악(무조음악) 만들기, 감상자쪽에서의 터치와 둘러보기를 요구하는 조각만들기, 쓰고 버리는 작품 만들기, 주인공과 결말이 없는 소설 쓰기, 통상적인, 아마도 지배 이데올로기가 각인되어 있는 사회적 규범을 위반되어야할 것으로 생생히 드러내는 소설 쓰기, 억압받거나 연약하거나 무시되는 것들을 조명하는 작품 만들기, [일상적 의식이나 지배적인 사회과학적 인식에는 포착이 안되는] 사회적 관계망 속의 인간들 간의 관계의 심층적이고 복잡한 진실을 밝히는 소설 쓰기, 아무것도 서사하지 않거나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느낌을 주는 그림을 처음으로 그리기(추상 미술), 통상 찬양받고 칭송받지만 실제로는 나쁜 사회적 조건 때문에 별로 실천되지 않는, 그리고 아주 많은사람들이 그 별로 실천 안됨에 대해서 별로 문제를 안느끼는, 순수하고 자유롭고 고귀한 행위들을 생생히 예화하는 작품 만들기(이를테면 <소나기>같은 소설이나 <산티아고에 비는 내린다> 같은 영화),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봉합되어 있는 사회적 모순이나 균열을 폭로하는 작품 만들기, 극복되어야 역사 발전이 되는 그런 극복해야 할 것을 상대로 영웅적으로 투쟁하는 인간이 모습을 생생히 그리는 작품 만들기 등등등등


    2) 과거의 훌륭한 예술이 오늘날에도 훌륭하다면..

    흔히들 결과보다는 과정/방식이 중요하다고 얘기 많이 한다. 인식의 지평을 깼다는 결과는 인식의 지평을 깨는 과정/방식에 의해서만 수반되며 양자는 붙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방식은 그때 거기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진정성있을 수 있다. 절대왕정을 상대로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인 투쟁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나 그 시기의 사회적 동학을 규정한 계급적 대립이나 모순을 심도있게 파헤친 소설(이를테면 <적과 흑>이나 발작의 많은 소설 등등)은 이미 벌써 완성되어 있는 시민사회를 누리는, 그 시기와는 다른 사회적 관계가 지배적인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진정성의 느낌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그 정도로'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으로 투쟁해야 할 상대가 있고 오늘날에도 '그 정도로' 사회적 동학을 규정하는 계급적 대립이나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한편으로는 그 시기의 사회와 다른 사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시기의 사회와 '역사적 연속선상'에 있는, '같은' 사회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주인공들을 '옛날'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으로, 그래서 우리들 자신을 그들의 위치에 대입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 느낀다. 결국 훌륭한 예술에서 훌륭한 것은 인식의 지평을 깼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낳은 주인공들의 느낌/생각/행위 및 그것들의 절묘한 서사이거나 그 결과를 낳은 원인으로서의 작품'자체'인 것이다.


    질문 2:

    세월이 지났음에도 우리가 순수 예술 이라 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 예술의 인식의 지평를 우리가 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피카소 그림은 분명 오래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피카소의 그림을 순수예술이라고 한다. 그럼 아직까지 우리가 넘지 못한 인식의 지평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답변 2:

    피카소의 그림이 아직까지도 훌륭한 예술이라면(단순히 '순수예술'이 아니라), 그것은다음 세 가지 이유일 수 있다.

    1) 그 그림이 세계를 재현하거나 느끼는, 특히 '소위' 입체파적인 방식이 일반 대중의눈이 세계를 재현하거나 느끼는 방식보다 '여전히' 더 진실하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사회적 인식의 지평을 깬다는 것은 우선은 작품의 사실이다. 위대한 예술작품이 이미 깬 인식지평을 사회는, '대부분의 우리'는 여전히 고수하고 있을 수 있다.

    2) 그 그림에 여전히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환경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미적인 것'이, 우리 삶속의 미적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탄핵'하는 효과를 갖는 그런 종류의 미적인 것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어떤 미적인 것은 그 자체로 그리 미적이지 못한 사회의 인식지평을 깨는 무기이다.

    3) 그 그림(이를테면 <게르니카>같은 그림)에 아직까지도 우리가 자행하는 야만과 부정의와 폭력에 대한 생생한 고발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질문 3:

    어떤 사람에게 인식의 지평을 충격을 주어 무너뜨리고 그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을 순수 예술이라 했는데, 어떤 충격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미쳐 이해되지 않을 경우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소나기>의 경우 나는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과연 어느정도 파장효과를 가져야 하는가? 만약 작품에는 분명 인식의 지평을 허무는 어떤 깊은 사상이 담겨 있지만은 작가의 고뇌와 작품의 사상을 아무도 이해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수예술이라 칭할수 있을까? 예를 들어 지금에서도 정말 이해하기 힘든 예술작품이 14C 에 나와서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답변 3: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인식의 지평을 깬다는 것은 우선은 작품에 속하는 사실이다. 사회가, 대부분의 우리가 그 작품의 공덕을 즉시 누린다는 법은 없다. 아무리 훌륭한 예술도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접근이 용이하지 못하면 사장되거나 극히 제한된 사람에게만 인식의 지평을 깨는 효과를 미칠 것이다. 과거의 훌륭한 예술이 몇십년이나 지난 다음에야 그 진가가 인정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있었다. 물론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은 개개인의 부족함 탓이라기 보다는 '대체로' 사회적 조건 탓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교양을 쌓을 여유가 주어진 이들에게는 더 노력할 의무가 있다.

    어쩌면 <소나기>는 비교적 순수한 예술이기는 해도 크거나 깊은 감동 줄 수 있을 정도의 훌륭한 예술은 아닐지도 모른다.그러니 <소나기>에 대해서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탓할 필요까지는 없다. 당신이 아직 더 세상을 깊고 넓게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하는 연배에 있으므로 아직은 <퍼펙트 스톰>같은 영화를 보고 감동받거나 은행이나 백화점에 걸려있는 이발소 그림을 보고 별로 감흥이 안일어날 정도의 감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질문 4:

    마지막으로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 순순예술이라면 인식의 지평을 넘지 못하는 계몽에 속하는 예술이나 이미 지나버려 이제 인식의 지평 안쪽에 있는 예술(첨에 언급했던)은 과연 어디 범주에 속해 있는 것인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 위계적 범주에 속한 것이라면 순수예술이 되지 못하는 위의 예술은 대중예술에 속하는 것인가?


    답변 4:

    순수하게 계몽에만 속하는 예술은 그 계몽이 충분히 달성된(그 계몽이 보급하고자했던인식지평이 충분히 보급된) 사회에서라면 더 이상 아무런 효과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그 예술은, 그것이 나올 당시에 대중예술이었든 순수예술이었든, 잊혀질 것이다. 인식의 지평을 넘지 못한 예술은 순수예술일 수도 있고 대중예술일 수도 있다(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순수예술은 인식의 지평을 깨뜨려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순수한 예술이나 훌륭한 예술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 예술 역시 그 인식 지평이 깨지고 그 깨짐이 많은 우리들을 장악한 순간 예술작품으로서는 순수한 무Nothing가 될 것이고 역사적 사료로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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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북극대성
    작성일
    06.08.24 08:53
    No. 8

    "인간이 사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삶의 조건들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위적 조건들이 절대화할 때,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표출은 그 조건들과 갈등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결국 비극은 탄생한다."

    장르문학은 절대적으로 재미를 추구해야된다. 장르에서 문학성을 구현하는 것은 그 정체성에 비추어 맞지않다. 장르의 독자가 10대이기에 10대에 맞추어 작품을 만들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장르의 조건이 절대적으로 굳어지면 작가와 독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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