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다른데는 이견이 없지만, 위화도 회군 부분만 살짝 건드리겠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위해서 명분으로 삼은 "소국은 대국을 칠 수 없다"는 말그대로 명분입니다. 자신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든든한 배경이 필요했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는 원명 교체기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직 고려에 팽배한 친원파의 견제로는 합당하다 생각한 조치였겠지요.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로부터 조선의 외교가 명분외교인양 포장되었고, 그렇게 전해지지만 적어도 조선초 세종까지는 철저한 실리외교였습니다.
겉으로는 명분을 중시해 대국을 섬기는 듯 했으나, 태조, 태종, 세종 모두 북진을 기치로 삼아 군사조련에 힘썼었었습니다.
그 증거가 국명이 "조선"이라는데 있지요. 명나라에서는 조선이러는 이름에 불만을 표했지만 정도전의 말장난으로 허락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사림과 구분하기 위해 훈구파들을 재정립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
초기 성리학자들의 성향이 자주성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 역시 바른 해석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친명파였고, 북진정책을 위한 강병 양성이 명을 도모하려는 의지였다는 해석은 너무 심한 비약입니다.
조선 초 실리 외교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었지 대명에 적대적인 정책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요즘 반중정서가 너무 강한 탓인지는 몰라도, 님의 의견과는 달리 당시의 정황은 여진과 거란을 필두로 한 북방 민족이 조선의 주적이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죠.
조선을 세운 성리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명(중국)이라는 나라는 자신들의
사상적인 고향이었고 명이라는 나라는 자신들이 배워야 할 그런 스승의
나라였죠. 그게 조선을 세운 집권자들의 한계이죠. 어쩌면 성리학이라는
학문자체가 중국 자체를 높이는 학문이었기 때문이죠.
성리학은 송나라 주자 및 여러 유학자들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완성
되었죠. 하지만 그 당시 시대 배경이 송이라는 나라는 거란 및 여진에게
굴욕적인 외교 및 오히려 제후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 처지였죠.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게 성리학 이었으므로 당연히 자신들의 우위를
학문으로 밖에 그러낼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런 학문을 배우고 실천했으니 그들의 눈에는 북방민족들은
전부다 오랑캐요 자신들은 중국 다음으로 가는 소중화로 스스로
인식 했을 겁니다. 이런 경향의 상상을 가진 집권층으로 인한 조선의
외교 및 명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가 가능했고 북쪽을 중요시 하지 않다
보니 명과 주변국들 사이의 관계에도 당연히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또한 스스로의 주체성을 찾지 못했으니 북쪽으로 가려는 것도 꿈도
꾸지 못했겠죠.
조선이라는 나라가 고려를 무너 뜨리고 새로운 나라로 만드는데에는
성리학자 의 힘이 컸지만 오리혀 이런 경향을 가진 성리학자로 인하여
조선의 초기에는 어느정도의 독립성이 보였지만 중기 말기에 이르러서
는 주체성을 잃어 버리는 결과를 나았다고 봅니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