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200플 넘긴 글을 보고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토론마당으로 가기는 그렇고, 다른 글을 비평할때 기준이 될 수도 있는 글이겠다 싶어서 이곳에 올립니다.
1. 서론
기본적으로 소설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현실이라고 함은, 작가가 지니고 있는 모든 정보와 그에 대한 해석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은 완벽하게 현실을 기반으로 하기에 현실에서 유리될수 없지만, 허구의 이야기이기에 현실과 완벽하게 대치되는 것도 아니다.
캐릭터와 사건 모두 작가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모든 부분은 현실에 존재하는 작가와 완벽하게 유리될 수 없다. 다만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고, 현실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를 개연성 있게 지어내기 위해서는 작가가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라고 독자들이 납득하는 것 뿐이다.
결국 소설속에서 독자가 현실을 반영하는 어떤 면을 찾았고, 그에 대한 지적을 하였을때, 그 지적이 소설의 허구성과 연관지어 봤을때 옳으냐, 틀리냐는 따질 수 있어도, 소설은 허구니까. 처음부터 지적하면 안된다. 라는 논리는 옳지 않다. 작가가 아무리 허구의 영역을 넓게 잡아도 그 기반은 현실이기에 독자의 누군가는 거기서 현실의 테이스트를 맛볼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소설적 허용, 즉 상상을 통한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용납해야만 할까.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내용이던지 글로 써 낼 자유가 있다. 이것은 독자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권리이다. 다만, 작가가 그러한 내용을 써내는 권리를 사용해서 타인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때 (즉 자신이 쓴 내용을 공개했을때) 타인이 그것을 읽고 비평, 혹은 그 내용에 따라서 비난 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이다.
즉 어떤 글을 독자가 비난, 혹은 비평했을때, 작가는 당신의 비난, 혹은 비평이 틀렸다고 반론 할 수는 있을 지언정, 왜 비평이나 비난을 하느냐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작가의 입장에서던, 독자의 입장에서던 저렇게 극단적으로 치닫는 경우는 잘 없고, 서로가 어느정도는 타협하고 살고 있기에 큰 문제가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본론
그렇다면, 우리는 그 문제가 되지 않는 타협의 선을 어디까지 잡아 줄 수 있을까?
흔히 어떤 소설이 소설 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즉, 독자들의 현실적 사고방식과 충돌이 일어나는 부분은 대부분 현실을 모티브로 한 사건이 소설속에 등장할때가 아니다.
독자들과의 충돌 영역은 바로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해석을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 표현]하는 가이다.
그렇다면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그 작가의 해석을 옳다고 판단해 주어야 하는가?
1. 소설속의 사건이나 인물이 현실세계와 직접적이거나 구체적으로 추론 가능한 표현들의 연관성이 강하게 있다면 독자 역시 현실적인 가치판단을 바탕으로 소설에 개입하여 비판할 여지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표현]이다. 작가가 모티브를 따왔다고 사건이, 혹은 인물의 캐릭터 상이 꼭 현실을 상기시킬 정도로 구체적으로 디테일 할 이유는 없다.
예전 사마달 소설 중에 [대도무문]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광고를 정치풍자소설이라고 했었는데, 소설 전면에 대놓고 당시 3김(DJ, YS, JP)얼굴을 캐리커쳐한 캐릭터들이 떡하니 놓여 있는 그런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실질적으로 대도무문은 모티브를 소설 외적으로 (당시 신문이나, 광고, 책표지등을 통하여) 작가가 미리 알려주니까 이 캐릭터가 저 사람에게서 따온거구나. 라고 알 수 있지, 그러한 사전정보가 없이 순수하게 소설로만 읽는다면,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그냥 잘 쓰여진 무협소설에 불과하다.
배경도 중원이요. 한국전쟁은 정사대전으로 바뀌었고, 핵폭탄은 천멸이라는 독(毒)으로 치환되었다. 남과 북의 이념싸움은 정파와 사파의 이념싸움으로, 중국과 러시아는 새외문파로, 미국은 황궁으로, 일제시대는 원나라로 사상, 단어등이 모두 [무협소설의 배경에 맞게 어레인지] 되어 표현되었다.
김영삼 총재를 모티브로 한 주인공은 섬에서 태어나 전쟁의 혼란기를 겪고, 내부적 정치싸움을 한뒤 나중에 특정 지역의 맹주가 된뒤, 독재에 맞서싸우다가 고난도 좀 겪고 난뒤 탑이 된다. 라는 인생의 큰 흐름만이 비슷할 뿐. 나머지는 무협적 세계관의 인물로써 무협세계에 맞게 행동한다.
즉 위에서 예를 든 대도무문 처럼, 독자가 현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도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모티브가 된 현실과의 연관성이 전혀 표현되지 않는 소설은 소설 내부적으로 완결된 독립성을 지니고 있고. 그렇기에 독자가 현실의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소설내부의 가치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즉 중요한것은 현실을 얼마나 비틀어서 소설속의 세계관에 알맞는 표현들로 [어레인지]하여 현실의 색체를 지워낸 뒤 사용하는가가 모티브의 쟁점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이런 고려가 되어 있지 않다.
특히나 [어레인지]할 부분이 거의 없는 (실제로는 가장 신경써서 세밀하게 어레인지 해야만 하는) 현대판타지류를 작성하는 작가들이 도마에 오르는데.
예1) 중2명 데이즈 괴벨스 찬양사건 처럼 [직접적]으로 현실의 인물을 소설속에서 언급한다던가.
예2)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마루타 사건처럼, [실존]하는 영역인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실제] 731부대에서 행해졌던 [마루타 실험사건의 개요]들을 묘사한다던가.
예3) 문피아에서도 한번 거론 되었던 이계만화점 운지 사건이나, (주 : 운지는 그 단어 자체에 현실에 존재한 특정인물과 연관성이 있었으며, 고인능욕에 대한 편향적인 뜻도 내제하고 있었다.)
예4) 혹은 별명이 쥐, 이메가와 같이 현실에서 특정인물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킬 수 있는 [포인트]적인 현실 표현을 그대로 소설속 표현으로 사용한다던지.
이러한 예시들은 모두 현실세계와 직접적인 혹은, 그 표현에 있어 누구나가 당연스럽게 [소설적 장치]가 아닌 현실의 어떤 사건 혹은 인물을 강하게 다이렉트로 연상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허구의 영역에서 현실의 영역으로 사고를 확장하여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고, 현실의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소설을 비판할 수 있는 당위성이 생긴다.
만약 소설에서 이러한 사건이나, 캐릭터의 연관적 표현에 의하여 독자의 판단 기준이 허구 -> 현실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이미 소설이 지닌 허구성은 상당부분 훼손되고, 독자 VS 작가는 50%이상 성립된거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 편향적인 서술이나 기만적인 서술이 있다면, 당연히 비판의 영역이 존재한다.
독자가 소설의 특정 부분에 대해서 완벽한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설령 현실을 눈가리고 아웅하듯이 허구라고 주장만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할 지라도, 그러한 모티브적 표현 자체가 그대로 문제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그러한 독자가 현실을 반영할 수 밖에 없는 모티브적 사건,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직접적인 작중 [묘사]나 [서술]이 특정방향으로 편중되어 있을때, 혹은 기만적인 서술이 있을때 독자들은 작가와 충돌을 빚을 수 있다.
기만적인 서술이라 함은, 작가가 자신의 직접적 서술을 피한채 캐릭터를 이용하여 교묘하게 편향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뜻한다. 단 여기서 독자들이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캐릭터의 캐릭터 성을 잡기 위한 묘사로써의 용법과. 캐릭터를 통하여 드러나는 사상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기만적 서술과 캐릭터성을 위한 묘사를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보자.
1. 캐릭터 성을 위한 묘사.
이시이 :
"우리 대 일본 제국의 의학 발전과 무기 개발을 위해서 중국인,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해야 겠다."
"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우리 일본인 보다 못한 2등 인간이므로 이렇게라도 제국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
위 캐릭터의 대사는 한국인 독자로서 불쾌할 수는 있지만, 악역 인종차별주의 지배민족 의 선민사상 논리를 지니고 있는 일본인 캐릭터라는 설정이 있다면, 얼마든지 내뱉을 수 있는 대사다. 아니 역으로 이러한 대사를 내 뱉음으로서, 이 캐릭터가 인종차별주의자 이고, 지배민족 선민사상을 극단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독자에게 인식되어 질 수 있다. 이 정도는 (그 내용의 거북함은 잠시 내려놓고서) 당연히 소설적 허용으로 봐야 한다.
2. 기만적 서술
문제가 되는 기만적 서술은 주로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2인 이상의 캐릭터가 이야기를 나누는 영역에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발생한다. (주로 주인공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들 중 한명이다.)
1. [편향적인 해석]이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타인들에게 [인정받는다.]
2. [편향적인 해석]이 [부정]되거나 [반박]되지 못한채로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것.
간단한 예는 다음과 같다.
1.
이시이 : "전쟁 동안 일본의 한국 지배는 정당했으며,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희생으로 인류의 의학진보가 이루어졌다."
동준 : " 그 시대는 그런 시대였으니 옳은 소리다."
2.
이시이 : "전쟁 동안 일본의 한국 지배는 정당했으며,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희생으로 인류의 의학진보가 이루어졌다."
유미 : ...(그런 가능성도?)
같은 캐릭터가 같은 내용을 내뱉지만, 독자가 비판을 가할때는 캐릭터성을 위한 묘사를 위한 영역의 서술인지, 아니면 작가의 기만적 서술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해야만 한다.
이러한 편향적 서술이나 기만적 서술이 부분적인 영역,
즉 개인에 따라 가치관이 다른 영역 - 정치관, 경제관, 역사관, 종교관 등에 따라 나뉘는 부분이라면, 그에 반대되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에게서만 비판받겠으나,
인간의 도덕성이나, 국민성, 사회가치 같은 큰 틀의 영역에서 어긋난다면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디 냉철한 작가나, 독자라면, 완벽한 소설속에서도 편향적이거나 기만적인 서술을 하지 않고, 그러한 서술을 찾아내서 비판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단 독자의 판단 기준이라는 것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서 비판의 중점을 둘 수 있는데,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영역을 어느정도 잡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큰 틀이라고 해도, [한국인]과 [세계인]의 기준은 다르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대체역사물들은 위 1번의 영역을 상당히 위반하고 있는 영역의 소설들이다. 역사를 다루기에 현실을 끌어 올 수 밖에는 없다. 즉 독자와 작가의 사상적인 부딪힘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지닌 소설이다.
대체역사물의 비판에는 여러가지 방향이 있지만, 큰 틀에서 정말 중립적인 판단으로 드라이하게 바라본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재 출판되었거나 연재되고 있는 상당수의 대체역사물은 [한국식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대체역사 소설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비판하는 일제시대 자체를 비판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모순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크게 문제삼지 않는 것은 그러한 작품에 대한 독자의 해석이 허구의 영역을 상당수 벗어나 있고, 보편적인 가치관에도 충돌이 생길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라는 카테고리 영역에 있어서는 [복수], [부러움]의 정서를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소설이 피해자가 되는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에게주어졌을때 거세게 비판받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즉 독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비판을 할때도 자신의 비판점에 대한 포인트를 정확하게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 제국주의 찬양하는 극우물에 대한 비판이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옳은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틀릴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독자는 현실을 반영할 수 밖에 없는 영역의 편향적인 서술 혹은 기만적인 서술이 용납가능한 것인가? (즉 개인마다 가치관이 다른 영역 - 즉 나는 용납못하지만 다른 독자는 용납할 수 있는 영역인가?)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용납불가능한 영역인가?를 생각해서 비판해야 하며, 작가는 의도적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서술하는 것이 아닌한, 가능한 중립적인, 혹은 독자의 대다수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영역으로 글을 전개, 혹은 서술해야 된다.
결론
독자가 작가의 과도한 모티브나 현실적 소재의 직접적인 차용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과도한 모티브나 현실적 소재를 다룸에 있어서 작가가 어떤 가치중립적인 영역을 벗어났다면,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서론에서도 밝혔듯이 등장인물의 성격과 사고방식, 스토리전개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자연발생 한것이 아닌,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며, 이는 독자가 발견한 편향적 사고에서 작가가 완벽하게 유리될 수 없음을 뜻한다. 다만 독자 역시 그러한 편향적 사고를 지적할때, 작가가 정확하게 소설적 허용의 선을 넘었음을 증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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