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너무 한산하네요.
그래서 방금 쓴 소설이나 짧은 거 하나 남기고 갑니다.
<칼을 문 그녀>
미은은 심장이 터질 듯이 꽉 차오르는 심정이었다.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남자.
미은의 모든 것을 가져간 남자가 눈앞에 나타난 것은 뜨거운 햇살이 비추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는 미은과는 너무나 다른 어떤 예쁜 여자와 웃으며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어, 어쩌지?’
사무실에 빨리 돌아가야 할 시간.
그녀가 은행이나 우체국에서 업무를 보고 돌아올 때면 늘 늦었다고 갈궈대는 노총각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을 빼! 미은씨. 그러니 걸음이 늦지.’
성희롱보다 더한 인격모독.
항의 같은 것을 할 만큼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이 직장도 잃으면 방바닥을 차지한 돼지 년 소리를 엄마에게 들을 것이 뻔했으니까.
이를 꽉 깨문 미은은 그대로 바뀐 신호등에 의지해 길을 건넜다.
눈길이 마주쳤고 남자는 픽! 하고 웃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남자라면 미은의 고통과 괴로움을 알았을 터.
저런 웃음은 그녀를 철저히 무시하는 그런 야비함이었다.
통장, 시간, 수많은 심부름과 철저한 성적 착취.
그에게 미은은 그냥 돼지였다는 반증의 웃음.
지난 2년 동안 아파했던 모든 시간이 바닥에 쏟아져 내리는 물처럼
흩어져 내렸다.
그대로 멈춘 횡단보도에서 미은은 그녀의 인생을 닮은 칠흙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버렸다.
빠아앙!
끼이익! 쾅!
미은은 허공으로 날아갔고 터져버린 공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아파!’
미은의 시선은 아스팔트에 흘린 자신의 피 위에서 아직도 남자를 좇았다.
잠시 놀란 표정이던 남자.
픽!
남자가 다시 웃었고 미은은 죽음이 차라리 달가웠다.
띠! 띠! 띠!
미은이 눈을 뜬 것은 얼마나 시간이 지난지도 모르는 어느 날이었다.
“어! 한서윤 환자분 눈 떴어요.”
놀란 간호사가 하는 말이 귀에 울렸다.
‘한서윤? 그런데 누가 눈을 떴다고? 나 죽은 거 아냐?’
미은은 어느새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시 눈을 떴다.
어지간한 재벌들도 눈 아래로 보는 대한민국 최고의 돈 귀신 한성혁의 딸로 말이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지쟈스 크라이스트! 빨리 병원장실에 연락해 긴급이야.”
의사들의 호들갑에도 미은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저 눈만 껌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한서윤이 누구지? 이게 도대체.’
“거...울.”
“네? 환자분 뭐라고요?”
갑작스레 깨어난 뇌사 환자. 그녀가 생명유지 장치를 빼낼 시점을 앞두고 살아나 첫 번째 한 말은 거울을 달라는 말이었다.
잠시 후 거울을 비춰주는 간호사의 미소 옆의 얼굴을 봤다.
오목조목한 탐스러운 얼굴을 가진 미녀가 거울에 나타났다.
방금 전 간호사의 미소는 얼굴은 괜찮다는 무언의 위로였다.
너무나 예쁜 얼굴이었다.
‘이건 내가 아냐. 이게 꿈인가?’
그로부터 한 달 후 미은은 서윤이라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병원을 나서는 길이었다. 비서와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들까지 대동한 무남독녀의 생환을 기뻐하는 서윤의 부모님과 함께였다.
‘일단 말을 아끼자.’
이것이 눈칫밥 29년의 내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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