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는 많이 낯설고 마이너한 장르입니다.
하지만 높은 마천루에서 사는 호화층과 관짝같은 침대에서 자는 빈민들, 빼어난 과학 기술과 암울한 생활, 압도적인 기업의 권력과 보잘것 없는 인간의 저항은 나름대로의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이버펑크 장르에 과감하게 도전한 글이 있다는걸 알고 읽어 봤습니다. 비록 기계와 인간만이 아닌, 마법도 포함된 세계지만요! 엘프와 드워프와 오크가 있고, 드래곤이 군림하는. 쭈욱 읽은 결과, 큰 기쁨을 느꼈지만, 많은 아쉬움도 느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데커드는 사이버펑크 게임을 한 번 클리어한 캐릭터로,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지게 됩니다. 아무런 연줄도 명성도 없는 상태로, 어쩔 수 없이 앞날이 뻔한 함정 런(더러운 일)을 수행하고, 당연히 일이 꼬이게 됩니다. 주인공은 마법사이자 거너이자 해커인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살아 남으며 안정된 미래를 잡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소설은 이야기의 구조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주인공은 매 런(더러운 일)을 할 때마다 다양한 목표와, 다양한 장애를 만나고, 그것을 다양한 수단으로 극복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런은 주인공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엉뚱한 장애물이 튀어나오죠. 주인공은 아득바득 그것을 헤쳐나갑니다.
주인공이 평범한 러너 정도가 아닌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데도 왜 그렇게 몸을 낮추어 러너 일을 하고 있냐는 질문에도, 압도적인 기업의 힘과 주인공의 희소성을 내세워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쉬운 점도 많아요. 인간이 기계와 마법과 만나고, 드래곤이 군림하여, 엘프 드워프 오크가 돌아다니는 사이버펑크 세계라면 바로 떠오르는게 있습니다. 섀도우런. 이런저런 부분에서 오리지널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암만 봐도 섀도우런이 떠올라요. 더군다나 마리 루이즈, 높으신 엘프 아가씨는 섀도우런 리턴즈의 바로 그 아가씨 아닌가 하는 생각만 무진장 크게 듭니다. 아, 드래곤이 여전히 미국 대통령을 하고 있다는게 다르긴 합니다.
보다 큰 단점은, 이 주인공 데커드가 런만 하는 기계같다는 겁니다. 이야기 구조는 런-후일담-런-후일담-런-후일담이 반복되고, 다른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사람을 살고 있는지. 그런 묘사도 자연스래 사라집니다. 다른 소설,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는 산업혁명 시대 런던이 어떤 곳인지 몇 번이고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이미지를 남기는 것과는 달라요.
마지막에 안 좋은 말을 좀 쓰긴 했지만, 재밌기는 합니다. 앞서 지적한 단점 중 뒤에 것만 좀 고쳐줬으면 해요. 앞의 건 무리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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