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카닉에 대한 로망은 기계장치의 발달과 역사를 같이 하는 현대 남성의 본능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 형태의 거대 로봇이 광학 병기를 마구 난사하는 한편으로 금속 장갑에 불꽃을 튀기며 난투하는 공상은 그런 로망의 절정입니다. 통칭 기갑물인데, 아쉽게도 이제까지의 한국 장르소설에서 기갑물은 비교적 자주 시도된 데 반해 좋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 드물었습니다.
개돌청년=데프프픗 작가의 양학하는 기갑 헌터는 그런 면에서 드물게 찾아볼 수 있는 재밌는 기갑물이라 할 만합니다. 이야기는 레전더리 컴퍼니의 신세대기, 솔로 넘버 기간트의 생산 소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3000번대 순위까지 있는 기간트의 파일럿 중 3번 파일럿, 박정상은 레전더리 사와의 악연을 계기로 PMC에서 탈영, 엘베레스 공국에 투신하게 됩니다. 신세대기의 주조로 기간트 업계는 폭풍전야처럼 요동치고, 박정상은 마나코어의 각성 현상과 함께 새로운 시대에서 파일럿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씁니다. 그 와중에 박정상은 결혼을 하기도 하고, 솔로 넘버 기체와 대적하게 되거나 이계의 비밀에 접근하기도 하면서 점차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매력적인 기갑물 소설인 것처럼 썼는데, 사실 소설이 매력적인 것에야 틀림없지만 매력적인 ‘기갑물’ 소설인지까지는 좀 애매합니다. 솔로 넘버 기체, 파일럿 순위 등... 초반까지는 참 매력적인 기갑물의 자질이 보였다면, 작품이 진행되면서 완결을 가늠하는 전체의 흐름은 이계의 적들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인류의 분쟁이 아니라 세계 간의 결전이라는 스케일 사이에서 작가는 아군 중 주인공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고, 상대적으로 이전까지 나왔던 여러 기간트들의 비중은 많이 낮아집니다. 예컨대 꽤 박력 있는 존재감이 기대됐던 1번이나 2번 파일럿의 기체 같은 경우는 나중 가면 점점 셔틀화됩니다.
반면 히로인의 존재감은 백 배쯤 더 높습니다. 그녀들 다수가 거진 파일럿으로 활약하지도 않거니와, 1인칭 전문인 작가의 특성상 히로인이 끼어드는 만큼 이것도 기갑물 비중과 점차 반비례 곡선을 그립니다. 초반까지 고려하면, 결과적으로 기갑물 1/3, 마나코어 각성이라고 불리는 이능력 대전 1/3, 연애 1/3 정도 될까요?
히로인하니까 하는 말이지만, 애초에 이 소설은 기갑물이 되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필력 탓도 아니고, 설정 탓도 아닙니다. 공지 목록에 작중 등장하는 기간트들의 일러스트가 아니라 히로인들로 도배된 시점에서 글러먹었습니다. 작가가 기갑을 더 좋아해야 작품이 기갑물이 되지, 여캐를 더 좋아하는데 어떻게 소설이 기갑물이 되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정주행하면서 기간트 일러스트들이 무척 보고 싶었는데 참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작품의 재료 중 하나로 쓰였다는 것만으로도 기갑물이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이기도 하지만, 소설 자체가 재미있게 읽히기 때문입니다. 기갑물 아닌 소설이 넘쳐나는 시국에 굳이 목적한 로망스보다 다른 노선을 택했다고 해서 소설을 폄하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모로 가든 서울로만 가면 그만이고, 소설은 재미있으면 그만이니까요.
개돌청년 작가의 특성이라면 주인공 위주로 진행되는 1인칭 소설이고, 캐릭터 간의 케미가 돋보이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중간중간 삽입하며, 장중하다기보다는 가벼운 문장으로 '나'의 심정과 행보를 그대로 옮겨서 대체로 이입이 수월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만큼 스토리와 설정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편인데, 작가의 초기를 제외하면 이제까진 개돌청년 작품에서 실망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문피아 세 작품을 보면 난봉꾼에 기둥서방에 유비에 꽤 비슷해보이는 주인공 컨셉도 은근히 다 다른 편이구요.
이번 작품은 특히 전작 중 알고보니 창술최강의 패턴을 많이 옮겼고, 딱 전작만큼 재밌습니다. 차이라면 기갑물의 비중이 낮아진 만큼 소소한 에피소드의 비중이 높고, 무엇보다 히로인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하렘물입니다.
여타 양산형 하렘물이 그렇듯 '나는야 주인공이 너무 좋아'의 공기처럼 가벼운 사랑들을 남발하기보다 주인공을 욕 먹는 난봉꾼 컨셉으로 잡았기 때문에 볼 만합니다. 남성 독자는 상대적으로 여성 독자에 비해 하렘물을 쉽게 읽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남성 독자가 하렘물을 보기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면 소설을 지나치게 주인공 편의주의적으로 만들어서 싸구려처럼 만드는 여캐의 도구화일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저기 씨 뿌리고 다니는 주인공을 별 거부감 없이 인정하는 히로인(이라는 이름의 트로피)보다, 반쯤 애증 섞인 감정으로 바가지를 긁는 쪽이 납득하기도 편합니다. j모 사이트에서 다른 쪽의 극단을 보여주는 탓인지 도리어 작가가 양지에서는 이런 선을 잘 지키는 것 아닌가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렘물을 싫어하는 여성 독자 분이라면 일남다녀 구도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거겠지만... 비슷한 이유로 저도 로판을 싫어하니 별 할 말은 없네요.
재밌게 읽기도 했고 기갑물로서 아쉬움이 남기도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사족이긴 하지만, 기갑물하면 포화와 전쟁의 냄새가 확 그려지는 키워든데 딱 마법사의 새벽 후반부만큼만 암울해도 좋지 않았을까... 아예 이계 파트를 지워버리고, 기간트도 좀 팍팍 죽여서 캐릭 회전이 빨라진 만큼 신메카 묘사에도 힘쓰거나 하면 더 그럴 듯하지 않았을까...
사족 두 번째로 말하자면 마법사의 새벽이 작가 작품 중 제일 볼 만했습니다. 단순한 최종보스전이 아니라 여러 반전이 있기도 했고, 캐릭터, 특히 히로인의 매력도 그렇고... 원래 적당한 비극이나 절박감이 함께 할수록 캐릭터의 매력은 올라가는 것이 법칙이라. 개돌청년이 보여주는 캐릭터 간의 케미 중에서는 마법사의 새벽이 가장 인상좋게 남는 것도 그런 이유 같습니다.
블로그에 이미 비슷한 리뷰를 작성하기도 했는데, 두 번째로 쓰면 짧아질 줄 알았더니 작가 팬이라서 더 길어졌네요. 저는 추천글을 쓸 때는 꼭 추천하고 싶은 글만 써서 말하고 싶은 걸 다 쏟아붓다 보니 더 길어지더라고요.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찬성: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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