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는 SF 영화 중에서는 유래없이 정확하고 사실적인 과학 이론을 담은 영화입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가설 단계에 지나지 않는 것들(초끈이론, 중력장 이론 등등)을 사실이라고 ‘가정’하여 묘사했습니다만, 그것들이 모두 사실이 맞다면 인터스텔라가 표현한 과학은 매우 정확한 것이며 사실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개연성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사실을 묘사한다고 해서 그 글의 사실성이 동시에 갖춰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은 그 점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이렇게 감상란을 사용합니다.
저는 문피아에서 주로 스포츠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이며, 어떤 전문적인 자격을 갖추고 감상문을 쓰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1. 들어가기에 앞서 소소한 것들.
유래가 없는 병풍해.
거대 플랜트를 만들 능력은 있어도 지구를 바꿀 능력은 없는 과학자들.
거대한 식량난과 과학에 대한 경시.
이것들은 인터스텔라가 ‘사실’로 명시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인정하고 봤을 때 작중 이야기 흐름은 개연성을 모두 갖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소소한 것들을 지적하고 넘어가죠.
- 식량난이라면서 술이 있다? 그것도 밀주가 아닌 판매용 술이?
물론 옥수수로 술 만들 수 있습니다. 제작진도 저것은 옥수수로 만든 술이다, 라고 말하고요. 하지만 그게 뒤늦게 부랴부랴 첨언한 변명같이 들리는 건 어째서일까요?
역사적으로 식량난을 겪으며 술을 공식 판매한 국가는 전무할 겁니다. 술을 마시지 않을 방법은 없으니 밀주를 빚어 판매하기도 했죠. 그만큼 술은 곡식대비 가성비가 극히 낮은 음료입니다.
- 이미 스스로 이착륙이 가능한 비행기가 있으면서, 아폴로의 향수를 듬뿍 내는 로켓 추진으로 이륙한다?
물론 스스로 이착륙이 가능한 비행기,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만들었다면 기존의 로켓 시스템은 사장되는 게 맞습니다. 미국이 우주관련 사업을 속속들이 축소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바로 비용입니다. 멸망해가는 지구에서 로켓 추진에 들어가는 엄청난 연료와 비용을 감당한다는 것은 다소 의아한 선택이지요. 물론 이것은 개연성을 떠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한 일종의 오마쥬일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적이라거나 사실적이라거나를 제외하고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 타스나 케이스(맞나요?)와 같은 로봇 운용이 가능하면서 외계에서는 사람에게 의지한다?
작중에서는 이런 변명을 합니다. ‘로봇들은 생존 본능이 없다. 그래서 응급 상황 대처가 안 된다.’ 이것이 작중 설정이라면 옳은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변명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실제로 대처가 되지 않는 장면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타스는 작중 최고의 인기 캐릭터이고, 살아 있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생생합니다. 실제 활약상은 어지간한 ‘인간’보다 우월합니다. 말 그대로 궁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 한 줄 설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중 만 박사에서 드러났듯이 인간이 믿기 힘들죠. 타스 수준의 로봇을 만들 수 있으면서 임기응변에 대처가 안 된다는 궁색한 변명은 어떻게 봐도 설정 미스입니다.
2. 본격적으로 들어가서.
- 밀러행성엔 처음부터 갈 필요가 없었다.
밀러 행성!
거대한 해일이 밀어닥치는 장엄한 모습에 우와~~~ 입을 벌리고 봅니다만, 잠시 입을 닫고 생각합시다. 밀러 행성을 처음부터 방문한 것은 개연성이 전혀 없는 선택입니다.
단, 밀러 행성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그런 중력장 궤도를 도는 행성이라면 엄청난 시간 격차가 생길 것이고, 공전 속도는 무지하게 빠를 것이며 구심력 탓에 중력이 상쇄되어 실제 표면에서는 중력이 강하다고 느끼기 힘들 테니까요.
물론 애초에 그렇게 빠른 공전 속도를 어떻게 맞췄으며, 어떻게 기체가 견뎠는가(덤으로 행성도 견뎠는가) 생각해본다면 과학적과는 거리가 멀지 모르겠습니다만, 애초에 웜홀에서도 견딘 기체인 걸요. 그 정도는 견딜 수 있다고 칩시다.
즉, 밀러 행성은 과학적과 사실적을 제대로 고려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개연성은 없습니다.
작중 브랜드가 말합니다. 우리가 도착한 시점은 몇 분 뒤에 불과할 거라고. 그건 도착하고 나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밀러 행성의 궤도를 본 시점에서,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중력의 영향을 받는지 확인한 시점에서 생각했을 장면입니다. 만약 그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몇 명이나 되는 ‘과학적 사고를 하는 남녀들이’ 밀러 행성에 착륙하기로 정했다면 단체로 정신 이상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애초에 들어가기 전에 7년이 지나니, 어쩌니 대화를 하며 시간 격차에 대해 설명하니까요.
그럼 어째서 밀러 행성에 간 걸까요?
고작 수분 만에 이 행성이 살만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까?
밀러를 데려와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면 고작 몇 분 동안 밀러 행성에서 어슬렁 거린 그녀를 데려오는 것보다 우선 블랙홀에서 멀리 있는 에드워드나 만 박사의 행성부터 가는 것이 옳습니다.
밀러 행성은 가는 것만으로도 7년 걸린다면서요.
에드워드나 만 박사는 졸지에 냉동 상태로 7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연료 문제나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순차적으로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면, 처음부터 밀러 행성은 선택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었습니다. 작중 50년이 지나도 밀러 행성 입장에서는 얼마 지난 것도 아니니까요. 밀러 입장에서는 “왜 안오지? 좀 더 기다릴까?” 하고 룰루랄라 수면에 들어가면 온 문명이 흥했다가 멸망해도 몇년 지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따라서 “그녀의 데이터를 수집하기 전까진 안가!” 라던 브랜드의 말도 이해 안가는 건 사실이지만, 밀러 행성에 들어간 것 자체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는 결론이 나오죠.
- 타임 패러독스,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연성이 생기는 건 아니다.
작중 주인공이 말합니다. “그들이 아니야! 우리라고!” 블랙홀 내부에서 주인공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중력의 힘으로(사실 이것은 가설에 불과하며, 실제로 중력이 차원을 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초끈 이론의 불명확한 미래를 생각한다면 영영 증명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요) 딸래미에게 중력 제어 이론을 알려주는 감동적인 장면입죠.
하지만 이 순간 타임 패러독스가 생깁니다.
정말로 주인공 말대로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다면 말입니다.
즉, 이것은 미래에 중력장 이론을 파훼한 인류가 나온다는 뜻이며, 그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괴거에 주인공님이 딸래미에게 이론을 전파했기 때문인데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타스는 물론 주인공은 블랙홀의 어마무지한 힘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겠죠.
말그대로 무한 루프이자,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타임 패러독스에 빠지게 된 겁니다.
작 중 주인공이 전파자로 뽑힌 이유는 이러합니다.
주인공이 딸을 ‘사랑’해서(아들무룩은 무시합시다. 전미가 딸을 사랑하고 한국도 딸을 사랑하니까요).
‘사랑’은 작중 무엇보다 강력한 지시제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뭐든 다 알아내고 뭐든 다 찾을 수 있어요. 사랑을 격렬히 추구하는 저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힘입니다.
한 마디로 책임자인 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주인공밖에 없으니, 주인공에게 블랙홀로 가서 딸에게 알려라! 라는 것이 됐습니다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주인공밖에 없으니 ‘그들’이 아닌 ‘우리’는 정말로 ‘우리’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상해집니다. 미래의 ‘우리’도 주인공이고 과거의 ‘우리’도 주인공인데 뭐하러 주인공에게 건너건너 알리죠? 직접 ‘미래의 주인공이’ ‘과거의 딸에게’ 알리면 됩니다. 무한한 시공에서 주인공 외엔 딸을 찾을 길이 없다면 ‘우리’는 주인공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황을 보면 ‘우리’는 주인공이 맞습니다.
감동적인 장면을 위해 두루뭉술 열린 해설을 열어둔 것까지는 좋습니다만, 이건 열어두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잘 모르겠으면 설명하지 마라.
모르는 건 침묵하는 게 좋다.
대체로 옳습니다만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 딸래미가 말합니다. “가세요! 가라고요! 브랜드한테!” 할애비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식들은 됐고, 알아서 살길 살라는 뜻이죠.
이 역시 ‘아, 예쁜 브랜드랑 이어지다니 훈훈하군.’ 씨익 웃을 만한 장면이긴 합니다만 이상한 점 느끼지 못하셨나요?
작중 주인공이 나사를 발견하고 하늘로 날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묘사된 것은 아닙니다만, 주인공 없이도 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아 매우 짧을 겁니다. 당시 딸은 어렸고, 주인공과 브랜드가 엮일 것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연애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기특한 딸은 거의 없거든요. 그런 것을 떠나 처음 브랜드와 주인공의 대화를 보면 지상에서 친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딸은 아무런 정보가 없음에도 브랜드와 주인공 사이의 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입니다. 거기에 더해 브랜드가 어찌되었는지도 명확히 이해하는 거 같아요.
물론 브랜드가 외계에서 정착하고 신호를 보냈으니 브랜드가 살아 있다는 것은 눈치챌지도 모르겠습니다만(작중 묘사는 1g도 안 됐지만요), 단방향 신호라고 작중 묘사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요?
훈훈한 결말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은 가운데, 딸은 중력의 비밀에 대해 알아내더니 천리안이라도 얻게 된 모양입니다.
물론 제가 딸이라면 이런식으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아, 아버지는 우주 여행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게 되었구나. 이것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동일하게 여행한 브랜드밖에 없겠다.’
“You go. (To) Brand. She‘s out there setting up camp. Alone in a strange galaxy. maybe, right now she’s settling in for the long nap. By the light of our new sun in our new home.”
그런데 말이죠. 이 대사를 직접 보아도 어디까지나 우겨 끼워맞춘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작중 상황으로는 도무지 유추가 불가능하며 확대해석을 한 결과가 이것이지요.
3. 결론
인터스텔라는 굉장히 사실적이고 또 과학적인 영화입니다만(가설의 영역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개연성 면에서요?
제 점수는 5점도 안 됩니다.
삼류 작가조차 지적할 수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거든요.
결론 : 사실성, 과학적이라는 말이 개연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것보다 개연성이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인터스텔라의 성공을 볼 때 그런 것보다 재미가 더 중요할지도(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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