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에 관련된 감상을 쓰는 곳입니다.
음... 그걸 그리 해석할 수도 있군요...
하나 제가 느끼기엔...
하늘도 땅도 내것이니 라고 외치던 청산의 말은
아둥거리며 살아온 많은 인간 군상들의 삶을 너무도 초라하고 단편적으로 만들었단 느낌이 강했는데요...
단진 무협적인 결말을 위한...
이렇게 위대한 존재가 있는데... 너희들의 싸움은 무의미하다... 하는 식의 ...
전 괴선을 덮으며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전작들에게서 느껴지던 따스한 인간들이... 정형화 되어버렸다는 느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너무 조급하게 마무리된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다음 작품을 더욱 기대해 봅니다.
언젠가 임준욱님의 입으로 들어야 하겠지만...
어쩌면 괴선은 시행착오의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이루고자 시작했으나... 정확한 코드를 찾지 못한... 작가에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작품이 될 지도...
1. 대여점 한쪽에 비켜서서 10분동안 후리릭~ 척 ~ 하는 무협
2. 빌려서 보던중 1권의 절반쯤 읽고 에이 ~ 휙 ~ 하는 무협
3. (3권이상 빌려서) 1권을 겨우 읽고 본전생각에 몸서리 치는 무협
4. 그래도 본전생각에 이빨을 악물고 끝까지 보는 무협
5. 재미있게 읽었지만 또다시 찾지는 않는 무협
6. 줄어드는 페이지가 안타까워 마음 졸이며 읽는 무협
7. 빌려서 읽고 성이 안차 서점에서 사들고 오는 무협
8. 책장에 박힌지 몇년이 지나 갑자기 생각이 나서 다시 읽는 무협
9. 마음이 심란하고 몸이 허전할때 한번씩 보다 보니 표지가 닳은 무협
10.그리고 '하늘도 땅도 다 내꺼다'라는 머시기의 무협......
옛 경전은, 석존께서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는 물론 후대의 불교인들이 지은 계송이지만 석존의 처지를 아주 단적으로 잘 표현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을 알기 쉽게 풀이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존귀한 존재는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흔히 안하무인이며 독선적인 사람을 일컬어 <유아독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해석입니다.
유아독존이라는 말에서 <아>는 석존 자신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 한사람 한사람이 다 해당됩니다. 인도에는 예로부터 사성 계급이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극심한 계급적인 차별을 받아 가며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바로 이런 사회제도의 불공평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인간 존엄의 선언인 것입니다.
이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자비인 동시에 실제로 교단의 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석존의 제자들 중에는 아난다나 카샤파, 목가라마와 같이 왕족이나 브라만 출신의 고귀한 태생도 있었지만, 우팔리처럼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던 천민 출신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는 엄격한 당시의 카스트 제도로 볼 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또 마등기녀라는 천민 출신 여자의 출가를 허락하신 것 등은 석존께서 얼마나 인권을 중시했으며, 또 몸소 실천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석존께서는 이처럼 사회 계급이나, 종족을 가리지 않고 절대 평등한 인간 존엄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따라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곧 뭇 생명이며 그 생명체들은 각기 보배로운 불성을 지니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런 깊은 뜻이 한마디로 압축, 표현된 것이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입니다.
옛 경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구절 다음에 <삼계개고오당도중생고(三界皆苦吾黨度衆生苦)>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색계·욕계·무색계-은 모두 고로 가득하므로 내 마땅히 삼계의 모든 중생들을 고에서 건지겠다는 대자비의 서원인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여덟자구는 아주 다양한 해석이 나옵니다. 지가 젤 잘났다! 일케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남양군님처럼 점다 존귀하다! 일케 해석하는 사람도 있죠...그러니 이런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명확하지도 않은 주관을 진실인것마냥 글을 적는것은 위험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석존은 어쨋는지 몰라도 그 후인인 대승은 위의 해석과는 거리기 머네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석존 이후에 창시된 대승불교는 귀족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석존 생전에는 서민들의 종교였을진 모르나 석존 사후에는 서민들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귀족들을 위한 종교가 되어 호가호위했죠...석존 사후에 인도불교의 급속한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죠...그리고 불교의 교리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입니다만 불도를 걸으면서 지고무상안 경치는 해탈하여 보살이 되는것입니다. 해탈은 공이라고도 하죠..윤회의 사슬을 끊고 아무것도 없는 무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죠..그 즉시 속세에 대한 영향력이나 간섭같은것은 사라집니다. 보살이 되면 더 큰 자비를 베풀어야하는데 왜 수많은 중생들을 버리고 무가 되어 떠냐느냐? 제가 생각하는 불교 최대의 모순입니다...
건문제님, 남양군님이 주관을 진실인양 쓰지는 않은 것 같군요. 남양군님은 분명 "~라고 봅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주관을 진실인양 쓰지 않으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요? 매우 어려운 문제군요.
음, 님의 해석 중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인 말로 성문, 연각 다음의 성자(聖者)로 불타에는 미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보살도 윤회의 사슬을 끊지는 못한 것이지요. 그리고 "해탈은 공이다. 윤회의 사슬을 끊으면 아무것도 없는 무의 존재가 된다" 이거 확실한 말인가요?
제가 불교교리에 밝지 않아 뭐라 할 수 없지만 어째 좀 이상하군요. 세상의 고(苦)를 끊고 해탈한 불타가 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 아무래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만약 공(空)이 되어 버린다면 불계(佛界)는 무엇이며,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는 무엇인가요?
~라고 봅니다 라는 물구를 미처 읽지못했군요..그 말에 대해선 저도 사과드립니다. 보살도 아무래도 제가 단어선정을 잘 못한 모양이군요..
그리고 제가 공이 되어 무가된다는 말은 법명까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한 고승이 중국 황제 앞에서 한 말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었죠...
한 고승이 해탈하여 공이 되었다며 많은 사람들이 떠받들자 황제가 심술이 났습니다. 그래서 고승을 골탕먹이기 위하여 아주 어려운 문제들만 줄줄 내면서 풀어보라고 하였죠...그만큼 법력이 높고 지고한 존재라면 이 정도쯤은 간단히 해보여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비꼬면서 말이죠.
그러자 고승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화가나서 "네놈이 짐을 능멸하느냐!"하며 일갈을 했죠..그러자 고승왈. "저는 해탈하여 공이 되었으니 공이 무슨 말을 하며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일화를 읽으면서 밑에 나와있는 세부설명에서 읽은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유명한 고승이 그런말을 했다니 불교에선 그게 진리겠군, 이렇게 생각하며 적은 글입니다.. 님 말이 옳다면 그 고승의 말도 전면 부정해야겠군요. 그리고 제가 책에서 읽기로는 불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는 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하여 공이 되는것이다라고 읽었는데.......휴,,종교란 참 어렵군요
도올 김용옥님의 금강경강해 중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에 대승의 생성과정과 의미가 잘 나와 있군요.
부처님 사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이 권위화 되고 그 후계자들도 덩달아 권위화되어 부파불교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 중 "說一體有部"라고 하는 아비달마 교학불교가 소승으로 규정되는 대표적인 종파였습니다.
이때 불교교단의 지도자들을 아라한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아라한의 독주, 독선, 독재의 편협성을 타파하고 出家者나 在家者를 불문하고 곧바로 불타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대중운동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혁신운동의 주동자들이 내건 이념이 바로 一乘(후에 大乘으로 통칭됨)입니다.
이하 김용옥님의 글을 간추린 것입니다.
『이 일승은 나만이, 혹은 내가 속한 어느 집단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일체의 구분의식이나 우월의식이나 특권의식의 거부를 말하는 것이며, 이 우월의식, 특권의식의 거부가 곧 대승의 출발인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론이 바로 보살인데, 이는 善根을 자기의 행복 추구로부터 자기의 깨달음의 추구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며, 나아가 선근을 자기의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깨달음과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야이다.
따라서 이 金剛能斷의 지혜의 실천이 바로 대승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남양군님이 쓴 대승의 의미가 크게 잘못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건문제님 덕분에 오랜만에 불교서적을 접하니 마음이 가라앉고 창밖의 바람소리가 정신을 맑게 하는 것 같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
건문제 님께 ... 공을 깨우쳐 생사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은 아니죠. (약간 모순인 거 같으니, 부연하겠습니다.)
아래 에피소드는 정확한 인용이 아니고, 대략 취지만 ....
예전에 어느 분이 성철스님께 물어 봤답니다. 생사란 단지 어리석은 생각이 나고(생) 소멸하는(사) 것일 뿐, 사람이 태어나고(생) 죽는(사)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즉 윤회란 가르침이 단지 깨우침을 주기 위한 방편(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죠. 그에 대해서 성철스님은 방편이 아니라고 대답하셨답니다.
성철스님의 대답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질문입니다. 즉, 불법은 현실계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심리계(?)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았다는 거죠.
후자의 입장에서 선다면, 건문제님이 제기하신 일화에 아무 모순도 없죠. 그리고 전자의 입장에 서더라도 영원히 현생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화적 세계관이니까, 굳이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후자의 관점에 더 치중하고 있습니다. 불법은 심법이라는 거죠. (제가 심리학쪽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다면, 묻는다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질문에 신경쓸 필요도 없죠. 묻는 것에 대답해야 한다는 강박은 단지 동물적 강박이죠. 왜 대답해야 하나요? 이것은 분명히 심리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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