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차남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 아들에게 사과하고, 장녀 안현생과 사위 황일청이 만선 시찰단으로 분향 배례했던 상황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네요.
안중근 집안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서훈자가 11명이나 되니까요.
해방 이후 안중근 의사 집안의 후손들은 혹독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마나 돌봐주시던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셨고,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고, 6.25 전쟁이 터졌죠. 그 기간동안 많은 후손들이 월북을 하거나, 미국으로 떠나게 됐죠.
그나마 이력이 남아 있는 분들은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내셨던 겁니다. 나머지 분들은 기사로 검색해도 잘 나오지도 않아요. 일부 유족의 친일 행각과, 이승만 정권의 김구 세력 탄압, 그리고 6.25 전쟁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한번 더 들여다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차남의 친일행적이라 적어두었습니다. 유독 차남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말을 줄인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히죠. 안중근 의사 집안 서훈자는 15명으로 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진사 집안으로 딸도 대학에 보내 대학 교수가 될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습니다. 광복후 집안 손들은 군인으로 또한 국책사업회사의 이사급으로 활동했습니다. 혹독한 현실때문에 미국으로 가거나 월북한 것이 아닙니다.
안중근 집안은 김구와 끝까지 함께한 사람도 있고 싸운뒤 갈라선 사람도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이 있긴했겠지만 부유했던 안중근 가문은 625전쟁 전후로 고향으로 월북, 해외로 이민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적 맥락을 보았을때 안중근 집안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후원하였고, 광복후 귀국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공산/사회주의 계열이 일부 월북했고 전쟁에 휩싸이기 싫은 사람은 해외에 이민한 사람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진사 출신이고, 할아버지 안인수는 현감 출신이지만, 그 가족들의 생애 대부분은 부유함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안중근의 가족들이 하얼빈으로 이주하면서부터 빈곤하게 살았다는 것은 수많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국내 재산을 처분해서 떠났고, 군자금 등으로 사용했다는 건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특히 하얼빈 의거 이후 일제의 집중적인 감시와 탄압이 이어졌고,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면서 제대로 정착조차 하지 못한 채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의 행적을 찾아보시면 얼마나 혹독한 현실을 버텨야 했는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해방 이후 귀국한 일부 가족들의 거처도 자비로 마련한 것이 아닌 김구 선생이나 임정 관계자들 또는 정부가 제공한 임시 거쳐였습니다. 대부분 몇 개월에서 몇 년 정도 거주할 수 있을 뿐이었죠.
이승만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안중근의 의거를 테러 행위로 치부했고, 그것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적대관계이거나 이념적으로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비슷한 대우를 받았죠. 특히 조마리아 여사 등 다수의 가족들이 김구 선생과 밀접한 관계(임시정부 활동, 김인과 안미생의 혼인 등)가 있었기 때문에 더 박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2대 손 '생'자 돌림 항렬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길은 군이었습니다. 애국자 집안이니 당연할 수도 있었죠. 안진생, 안춘생, 안봉생 같은 사람들은 독립군 경력으로 초기 국군에 참여할 수 있었고, 6.25 전쟁 기간동안 공을 세워 출세한 인물들입니다.
안중근과 가족들의 업적은 사실상 남한 내 이념적 혼란이 진정되기 시작하는 박정희 이후 재평가 됩니다. 왜 1970년 이전에 해외로 떠난 유가족들이 많은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성녀 씨의 배우자 권승복이야 말로 부유한 진사 집안이었습니다.
결혼 초 몇 년은 양복점도 했었지만, 그마저도 독립군 군복 만드느라 돈을 다 써버렸죠.
권헌 씨도 사업을 했지만, 임정 지원에 올인 하셨고요.
애초에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신다면 독립운동 하셨던 분들 중에 먹고 살만했던 경우가 있을 수가 없었다는 걸 잘 아실텐데요.
그렇게 부유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안성녀 씨의 행적에 대해선 여러 기사들이 있으니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신다면, '안중근 유가족'이라고 검색을 한 번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같이 멀쩡하게 살아오신 분들이 없어요.
고생하고, 이용당하고, 사기당하고, 버림받고 웬만하면 거의 새드엔딩입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탈탈 털어넣었는데,
뭔 돈이 남아 있어서 안중근의 유가족들이 부유하게 살아겠습니까.
그리고 그 정도 했으면 나라에서 챙겨주지는 못할 망정, 나라를 떠나게 만들기나 하고 말이죠.
그런 분들이 한 둘이 아니에요. 해방 이후에 돈이 없어서 귀국조차 못한 분들도 많아요.
안중근 패밀리라는 네임드인데도 이 정도면, 무명인 분들은 훨씬 더 심했겠죠.
그러다 6.25 전쟁 터지고, 냉전 시기까지 오니까 러시아나 중국 쪽에 갇혀 버린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독립운동사와 냉전 시기 사이에 엄청난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미제 앞잡이, 빨갱이 2분법으로 나누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거기에 근거없는 자의적 판단으로 고난의 시간들까지 왜곡하면 절대 안되는 겁니다.
독립운동 관련 단체 같은 곳에 가서 그런 얘기하시면 진짜 욕 엄청 먹을 거예요.
안공근의 실종도, 옥관빈의 피살도 김구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건 일부 학자들의 주장 수준입니다.
안공근은 김아려 여사 문제로 김구와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죽일만큼 나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옥관빈도 안창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임시정부 사람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김구가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증거도 없습니다. 실제로 암살을 실행한 이들도 아나키스트 계열이었고, 그들은 안공근을 통해 김구와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두 인물의 죽음을 김구와 직접적으로 묶기엔 모순점이 생겨 버립니다. 차라리 김구와 안창호의 파벌 싸움에 희생된 것이 옥관빈이라고 말하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리고 옥관빈의 사치스런 생활때문에 아나키스트 들의 타겟이 되었다고 하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미 단정 짓고 말씀하시는 건 스텔라리 님이신 것 같은데요.
애초에 자기 조직도 아닌 사람들을 동원해서, 아무 잘못도 없는 옥관빈을 죽였다고 하면, 누가 김구 선생을 따르고, 임정에 김구 선생이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추측의 근거가 당시 프랑스 공사관 보고서일텐데, 그렇다면 수사 후 김구나 임정을 왜 처벌하지 않았을까요?
안공근을 김구가 죽였다면, 왜 실종 처리 되었으며, 누구의 증언도 없고, 조마리아 여사 등은 임정에 그대로 남아 있었을까요?
그냥 의혹일 뿐입니다. 밝혀진 사실이라면 모를까, 야사 수준의 내용을 역사인 것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버그라니스’에 살림을 장만했으니 온 집안 식구더러 오시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살림살이로 보든지 식구로 보든지 솔가할 수는 없었지요... 어머님과 어린애들만이라도 보내는 것이 좋겠다... 그분들의 주선으로 선친이 마련하신 버그라니스에서 고독한 살림을 시작"
애초에 돈이 없어서 모든 식구가 가지 못하고, 김아려 씨와 아이 둘만 러시아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처도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마련해준 것이고요.
신문을 구독했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아마도 소식을 전하기 위해 누군가 가져온 것이겠죠. 구독할 형편도 안됐을 겁니다.
러시아도 유학을 간 게 아니라, 안 의사가 불렀기 때문에 간 것 뿐입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남편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구두를 꺼내 신은 거고, 기차도 생전 처음탄 것입니다.
원래부터 부유했으면 평소에 그렇게 살았겠죠.
곳곳에 삶의 퍽퍽함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있는데, 너무 보고 싶은 것만 보신 거 아닐까요.
Comment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