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그리고 제대로 된 궁수를 얻어내는 것도 전혀 쉬운 일은 아니였습니다. 우선 중세 후기에 유명한 잉글랜드 장궁병은 여러세대에 거쳐 자유농민(Yeoman) 계층에게 활쏘기를 유희거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함으로서 얻어낸 것이고 만약 국가에서 처음부터 동원해 활쏘기를 훈련시켰다면 인력양성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화살은 한발한발이 모두 돈이며, 그렇게 열심히 훈련시켰고 열심히 돈을 낭비하는 병과가 자칫하다간 간단히 죽기도 한다는 여러가지 운영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궁수의 단점중 인력양성의 어려움을 대체하기 위해 석궁병이 동원됬고 그중 제노바의 석궁병이 제일 유명했는대 이러한 석궁병도 석궁의 가격이 무시무시하다는 것과 화살의 값이 제법 심하게 깨져나간다는 단점은 어찌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단순히 궁수를 기병과 비교한 것이 아니였고, 제 글의 댓글에서 중세 후기및 르네상스 시대의 전투양상을 모두 이미 말했습니다. 그것에는 단순히 기병 vs 보병 덩어리가 아니라 보병 vs 보병 덩어리에서도 어떤 양상이 보이는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또한, 기병과 보병이 맞부닥칠때는 생각보다 훨씬 많고 잦았습니다. 게다가 제 글의 목적은 궁수를 기병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궁수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됬었는지를 말하는 것이였었습니다. 그런대 단순히 궁수를 기병과 비교하는 것으로 보셨다면 좀 덜 보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시대의 차이를 보셔야합니다. 몽골은 13세기에 왔습니다. 이때면 판갑이 14세기나 15세기만큼 전반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의 과도기고 대신 coat of plates(http://en.wikipedia.org/wiki/Coat_of_plates)이나 플랫링 메일(http://www.swordsknivesanddaggers.com/Medieval-Knight-Flat-Ring-Rivet-Chain-Mail-Coif-CH0104--Medieval-Weapons_p_14914.html) 처럼 과도기적 갑옷을 입던 시기입니다. 판갑에 비해 비교적 싸고 간단하지만 약하지요. 거기에 비교적 전술이 덜 발달됬던(중세전투에도 다양한 전술이 보여지긴 했지만, 동양이나 동방처럼 발달 된 전략전술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중세에서 기사들은 정말 농담이 아니라 가끔은 돌격 밖에 모르는 뇌똥남 그 이상 그 이하도 못 됬던 적이 많습니다. 현실을 보자면 그 돌격이 매우 강력해서 단순히 돌격 밖에 모르는 뇌똥남도 많은 적을 무참히 학살한 사례가 매우 많지만, 안타깝게도 복잡하고 정교한 전략전술을 뛰어난 명장 바투에게까지 먹히진 못했습니다. 실제사례를 통해 한번 얘기해봅시다.
모히 전투는 1241년에 몽골군의 헝가리 침략의 승패를 결정한 결정적 전투였습니다. 이 모히 전투는 어느정도 되는 기간동안 여러번의 공격과 방어와 전략들이 충돌한 전투인대 우선 몽골군이 페스트 근방을 약탈하는 사이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헝가리왕 벨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뇌똥남답게 그냥 돌격해 나가서 약탈중인 소규모 몽골군을 무찌르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는 이름이 기억 안 나는 한 듣보잡 대주교가 자기도 나가서 전공 좀 세우려고 했다가 몽골군의 정교한 유인전략에 말려들어 늪에 갇혔고 자기 목숨만 겨우 살려 돌아왔습니다. 함께 간 중갑기병대는 그저 눈물만... 이 짧은 2개의 전투만으로도 유럽 기병대와 몽골 기병대간의 전투가 어느 양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잘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좀 더 봐봅시다.
다양한 스커미쉬들이 일어나는 사이, 헝가리왕 벨라는 군대가 다 준비되자 나가서 몽골군을 무찌르기 위해 군대를 출정했지만 이제 헝가리왕이 다 준비되자 몽골군은 정면충돌을 피하며 후퇴했습니다. 이것이 몽골군의 최고 장기이자 특징입니다. 이들은 적이 약할 때 치고 적이 강할 때 도망쳐 다시 적이 약해지면 다시 칩니다. 뇌똥남들로부터는 기대할 수 없는 정교함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머리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헝가리군에서 상당한 규모의 별동대가 출병해 sajo bridge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막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고 있던 몽골군을 맞이해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것은 몽골군이 기동성을 잃고 근접전을 강요받으면, 즉 몽골군이 가진 우위를 모두 잃으면 서양군대보다 딱히 특별히 강한 것은 없음을 증명하지요.
하지만 이 후에 몽골군의 대응이 바로 당시 몽골 지휘관 수부타이와 바투의 장점인 영리하고 유연한 사고를 보여줍니다. 몽골군은 다리가 막히자 조금의 주저도 없이 재빨리 후퇴해서 피해를 최소화했고, 이 헝가리군의 수비를 뚫기 위해 작전을 짰습니다. 우선 몽골군은 소규모의 별동대를 강 북부로 보내서 강을 건너게 함으로서 헝가리군의 측면을 위협했고, 수부타이는 남쪽으로 가서 임시 다리를 강에 새로 건축했습니다. 하지만 헝가리군의 발목을 계속 잡고 가능하다면 sajo bridge도 확보하기위해 바투는 다리에 남아 7기의 투석기와 함께 헝가리군을 공격해 무찔렀습니다. 이 유연하고 정교하며 재빠른 전략적 행동들 덕분에 몽골군은 순식간에 헝가리군에게 내어주었던 기세적 우위를 되찾고 승리를 위한 초석을 깔 수 있었습니다. 결국 몽골군은 아침 무렵에 모두 별다른 추가피해없이 도강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런대 그 후에 헝가리군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면 참 막장입니다. 다리를 지키던 헝가리군은 메인 캠프로 후퇴해 다시 재정비했고 이번 공격이 소규모 약탈이라 믿으며 소규모 별동대를 보냈습니다. 그 소규모 별동대는 당연히 몽골본대를 맞이해 처참한 패배를 맞이했죠. 그런대 이 별동대의 파견은 군대의 최고지휘관 헝가리왕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패배했죠. 아, 이 뇌똥남들... 헝가리왕은 재빨리 피해를 파악하고 군대를 재정비해 진군을 시작했지만 이미 바투가 도강 후의 혼란을 정리하고 군대를 재정비할 충분한 시간을 준 이후였습니다.
하지만 헝가리군은 제법 강력했고 뒤에 강을 둬서 기동력을 상실한 바투의 몽골군은 헝가리군 본대의 수적우위앞에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남쪽에 임시다리를 건축해 증원군을 추가도강한 수부타이는 강을 따라 북상해 헝가리 본대의 측면을 노렸고 몽골기마대의 무시무시한 위력 앞에 측면이 노출 된 헝가리군은 무너져 공포와 절망 아래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습니다. 두 군대의 숫자는 각각 대략 2만에서 3만 사이로 추측되고, 헝가리군의 피해는 그저 추측밖에 할 수 없지만 수천은 가뿐히 넘길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전투는 몽골군이 단순히 기동력에만 의존하던 군대가 아님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기동력을 상실했다면 크나큰 패널티를 감수해야만함을 상징합니다. 몽골군이 유럽을 침략할 때 몽골군의 가장 큰 장점은 기동력도, 그 잔악함도 아니였습니다. 몽골군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수부타이라는 위대한 지휘관의 유연한 전략적 사고였고, 그 앞에서 그 어떠한 군대도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의 쓴맛을 삼켜야만 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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