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몇 가지 역사적 사실만을 나열해 보지요.
1. 민비라는 호칭은 비하의 뜻을 담고 있다.
이씨왕 이라는 말과 똑같은 경우이다.
2. 명성이라는 시호는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내려졌고 황후로 추봉되었다.
따라서 공식 명칭은 명성황후이다.
3. 명성황후 때문에 조선 말기의 정국 혼란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고종이 자신의 영을 세울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놓지 못했던 대원군 탓이 크다.
4. 명성황후는 일본의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명성황후는 급진적 개혁에도 반대하고 지나친 쇄국에도 반대했다. 덕분에 양 측의 반발을 모두 받고 있었을 뿐 명성황후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지나쳤다거나 사리사욕을 위해 행한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유 역시 자신들에게 걸림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5. 명성황후 때문에 민씨 일가가 득세하였지만 그것이 조선의 패망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다.
명성황후의 친정 식구들의 패악도 있었으나 그들로 인하여 고종이 대한제국이라는 마지막 시도도 해 볼 수 있었고 그것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6. 명성황후의 공, 과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고증 및 연구는 이루어진 적이 없다.
아마도 그녀에 대한 이미지와 그녀를 연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친일파의 뿌리가 드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7. 구국의 영웅으로 묘사되는 대원군의 말년 행보는 나라를 말아먹기위해 작정한 것 같다.
쇄국 정책, 당백전, 대규모 토목공사, 구시대 인사들의 중용,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대한 부적응 등 대원군을 비판할 것은 무척이나 많지만 그것 역시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다.
잘 모르면서 함부로 비하하고 비난하는 것은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닌것 같습니다.
물론, 잘 모르면서 함부로 칭송하고 영웅화 하는 것도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저도 사실을 나열해보겠습니다.
몇 가지 틀린게 있을 수 있지만요.
1. 민비라고 썼다고 비하는 아닙니다. 당시 양반들이 상소문에서 ‘민비’라고 썼습니다. 이게 만약 비하였다면 양반들이 왕에게 쓰는 상소에 왕비를 비하하는 명칭을 쓰지는 않았겠죠.
2. 어떻게 보면 공식명칭이 맞습니다만, 대한제국을 조선의 연장선으로 보느냐와 아니냐에 따라서 아직도 의견이 갈린다고 들었습니다. 즉, 명성황후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칭일 뿐이지 딱히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죠. 광개토대왕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해서 광개토왕이 비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논리입니다.
3. 명성황후 때문에 조선 후기 정국 혼란이 발생한 게 아니라는 주장은 맞습니다만, 그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습니다. 대원군 탓이라는 건 좀 어불성설이군요. 대원군이나 명성황후나 세도 정치때문에 막장이 된 상황 속에서 집권한 것 뿐입니다
4. 명성황후가 일본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던 것도 맞습니다. 급진적 개혁도 반대하고 쇄국도 반대했고요. 하지만 좀만 파고들면 이 사람은 그냥 자기 자리 보전에만 관심이 있지, 비전도 없는 사람입니다. 일본이 위기감을 느낀 이유도 당시, 삼국간섭 이후 명성황후를 위시해 조선이 러시아 쪽으로 기우려는 경향 때문이었고요. 사리사욕 맞습니다.
5. 민씨 일가가 득세했다고 조선의 패망을 불러온 건 아니죠. 하지만 임오군란의 경우, 당시 민비의 인척인 사람이 군인들 주는 식량에 모래와 흙을 잔뜩 섞는 바람에 발생했지요. 이게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청나라가 갑자기 출동해버려서 우리나라를 점거하고 청나라의 속국에 준하는 협정을 맺는 계기가 됐지요. 그리고 일본에도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요.
그리고 명성황후들의 식구들로 인해서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는 논리는 정말 처음 듣네요. 이 사람들에 대해 조금만 알다보면 저절로 욕지거리가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민씨 일가는 고종의 개혁에 방해만 됐습니다.
6. 대원군의 말년 행보는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게 사실입니다만 대원군을 비판한다고 해서 명성황후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대원군은 똘기가 충만하기는 했어도 정권유지를 위해 외세를 불러들이지는 않았죠. 당장 대원군 하야하자마자 조선이 맺은 조약이 바로 그 운요호 조약입니다.
여러모로 실드 칠 여지가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잘 모르면서 함부로 까는 일은 삼가야겠지만 이런 식이면 연산군도 옹호가 가능할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만 잠어님의 글들은 사실이라기 보다는 잠어님의 가치판단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1. 민비라고 부르는 입장은 비하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사람들이 어떻게 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부르는지가 중요한 것이지요.
4. 이미 확고한 위치를 잡은 상태에서의 자리보전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별로 와닿지 않습니다. 국고를 바닥낼 정도로 이미 충분한 권력을 잡고 있는것이 고종과 명성황후였습니다.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아닌 그 아래의 친족들이 자리보전을 위해서 아귀다툼을 했다는 말이라면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법도 상, 대원군과 대원군의 지지세력 역시 부당하게 왕권에 도전한 것입니다.
5. 임오군란의 뒤처리는 대원군이 진행했습니다.
6. 일본의 과한 요구에 대하여 대응할 방법으로 청나라를 이용할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대원군도 마찬가지(대원군의 입경 촉구 서신)였습니다. 믿었던 청나라에 납치 당한 것도 대원군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실드라든가 깐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1. 명성황후는 사후 추존된 것입니다. 생존 당시 대한제국도 아니었고요. 이런 논리대로라면 대한제국 건국후 모든 왕들을 황제라고 불러야 합니다.
조선의 왕비들은 보통 ~비, ~왕후 ~씨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민비는 고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불렸던 표현이고요.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사극에 나오는 모든 조선의 중전들은 비하입니까?
‘민비라는 호칭은 비하의 뜻을 담고 있다.’라고 전전 댓글에서 ‘사실’이라고 달아놓으시고 이제 와서 비하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신다는 것은 김백경 님 또한 가치판단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명성황후라는 명칭이 애국이고 민비라 부르면 비하이며 일본에 동조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
역사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분들께 여쭤봤는데 매년 이런 항의가 들어온다고 하더군요. 어설픈 민족주의의 발로입니다.
4. 글쎄요. 고종과 명성황후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친족이 다 잘못했다? 애초에 그 친족들이 어떻게 정권을 쥐게 됐는지가 의문이네요. 그들 역시 세도정치라는 흐름을 타고 외척세력으로 득세한 거죠.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그들을 누가 등용한 겁니까?
그리고 대원군이 왜 자꾸 이야기가 나오는 지 의문이군요. 저도 대원군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려고만 했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왜 명성황후가 그 당시 정치상황에서 명이니 암이니 하는 것에 대원군이 나오는 지 모르겠습니다. 대원군이 더 나쁘다는 말씀을 하고싶은 건가요?
5. 이게 의문이네요.
6에서 말씀하신 청나라의 대원군 납치를 알고 계신다면 ‘임오군란의 뒷처리는 대원군이 진행했습니다.’라고 달랑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죠.
당시 임오군란 후 홧김에 봉기한 군인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대원군을 찾아갔고, 고종은 대원군을 인정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동안 우리의 명성황후께서는 청나라에 SOS를 치고 도망쳤죠. 그 후 청군이 들이닥치고 말씀하셨다시피 대원군을 납치했고요.
그후는 아시지 않습니까.
다시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는 답례로 청나라에 큰 보상을 해줘야 했지요.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의미가 담긴 규정을 포함해 각종 청나라에 이권을 많이 주었고, 당시 서울까지 상인들이 진입하는 걸 허용했죠. 그 후, 미국을 비롯해 다른 국가들이 최혜국 대우 조약을 이용해 조선에 경제적 침투를 했고요.
대원군이 군인들이 싼 똥을 치운 것은 맞습니다만, 뒤의 청군 주둔이나 경제조약을 맺은 건 명성황후죠. 정권을 되찾은 답례로요.
5.처럼 단순하게 임오군란의 뒷처리는 대원군이 진행했습니다 라고 달랑 말씀하시는 건 위험하죠.
ps. 재밌는 사실 하나를 알려드리자면, 학생들에게 근현대사를 가르칠 때 보면 갑신정변(1884)의 다음 단원이 곧바로 동학농민운동(1894)입니다.
그렇다면 왜 1884~1894 사이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을까요? 가르칠 게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 동안 우리의 명성황후께서는 아무 것도 한 게 없거든요. 자그마치 일본이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낸 1894까지 10년 동안 아무런 개혁도 없이 그냥 국고나 탕진하고 있었죠.
자꾸, 사실 사실 하시는데
아무런 의미 없이, 사실을 따지자는 건 위험할 때도 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어서 일제의 강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하거든요. 막 도표 보여주면서, "야, 봐라. 그 동안 경제 수치가 이만큼 증가했지 않냐." 이런 게 흔히 말하는 뉴라이트 논리죠.
또한 아까부터, 사실대로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사실 중에서 일부만 부각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명성황후와 그 친족을 이해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명성황후가 중용했던 분들의 행동을 보면 이분이 어떤 분인지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측근들을 보면 권력자가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지요.
명성황후의 측근들 대부분이 명성황후 사후 일본을 반대하는 것은 고사하고 일본이 국권을 유린하는데 협조했습니다.
이후에도 조선이 망하는데 일조했고 조선 멸망후 일제강점기에도 친일로 이름을 떨친 분들입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군사독재에 적극협조한 전력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명성황후가 등용한 민씨가문 사람들은 지금도 한국사회 지도층으로 호위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중용하고 측근으로 삼아서 결국은 나라가 망하는데 일조한 분이 무슨 존경받을 분입니까?
고종이 조선이라는 나라보다 왕실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 것처럼 명성황후 이분도 조선의 국익보다는 자신의 권력 그리고 자신의 집안인 민씨 집안의 권력을 위해 일한 분입니다.
권력자가 사익을 공익보다 앞세우고 특히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국가에 해가 되는 할 때 우리는 그들을 매국노라고 부르지요.
명성황후... 민씨 가문 사람들이라면 모르지만 한국인에게 절대 존경받을 분은 아닙니다.
존경받을 만한 분인지의 여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알려진바대로 고종황제가 명성황후의 외척에 시달렸다는 말은 과장이 섞여 있다고 합니다. 되레 고종황제가 명성황후의 외척들을 이용하여 정국을 주도 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지요.
저는 정확한 증거 없이 당시 상황을 너무나도 쉽게 매도하고 편한대로 쉽게 이해하려 드는 것이 우려됩니다. 한편으로는 조선은 멸망할 만했다라는 식민사관이 너무도 쉽게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어렸을 때 국민학교 선생님이 하셨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나무가 자라질 않는다. 기껏해야 붉은 소나무 밖에 나오질 안아서 사과 궤짝 만드는 데에나 쓰인다. 일본같은 다른 나라들은 훨씬 좋은 나무들이 많이나오는데 우리나라는 그런것 하나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 나라다."
어렸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경복궁이라든가 기타 오래된 건물들의 나무는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더군요. 커서 알고 봤더니 우리나라 또한 금강송이라든가 적송이라든가 엄청나게 좋은 재목들이 많이 자라던 나라였습니다. 모두 베어지고 다시 심어지지 않는 등의 관리가 허술했던 것이지요.
욕을 하는 것, 얼마나 쉽습니까?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저는 그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1900년에 태어나서 일본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지요. 세조와 대원군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을 하는 인물이니만큼 명성황후에 대한 평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소설의 내용은 허황되지 않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으라는 것일까요?
시대상으로는 무척이나 큰 차이가 납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교육을 받으면 식민사관에 물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인물의 글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는 것이 더 허황되어 보입니다.
명성황후의 잘못 중에 국고의 낭비가 있습니다. 금강산 미신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사실로 확인 된 바가 없으니 그렇다 치지만 9년만에 국고를 탕진한 부분은 욕먹을 만 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대원군이 당백전 발행 등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60배나 급등했다고 합니다.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으로 불안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은 대원군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하면 구국의 영웅쯤으로 묘사됩니다.
저는 이것이 더 이상하게 생각될 뿐입니다.
고종은 죽은 후 올린 칭호고 광무제가 일반 칭호죠. 조선은 그냥 임금님이나 주상전하가 일반칭호였지만 황제국이 되서 독립된 연호-광무-를 사용했으니 광무제라고 하는게 보기 좋습니다. 고종이라고 해도 상관없지만요.
민비는 민비도 맞지만 죽은 후 나라가 황제국이 되고 황후로 승격됐으니 황후 칭호를 붙여주는게 품격있어보입니다.
이상한 것은 흥선대원군이죠. 조선왕실 종친이라서 원래가진 흥선군이라는 칭호에 아들을 왕실에 양자로 보내고 그 생부라는 이유로 받은 대원군 칭호가 더해져서 흥선대원군이 됐지만, 나라가 황제국이 된 후에는 당연히 왕작을 받았습니다. 헌의대원왕이라고 불러야 되는데 아무도 그렇게 안불러요.
명성황후가 드라마에 이르러 '후'가 되고 국민들 사이에서 공감을 일으킨 건 단순합니다.
일본의 무사집단에게 시해된 것.
'후'에 집착하는 것은 그를 미화하여 죽음을 통해 일본의 침해를 강조하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아닐까요?
그의 행보가 옳지 않은 면이 있다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이를 비난하고 깎아내린다면 가해자의 입장에서도 좋은 변명거리가 생기기 때문이죠.
'그럴 만한 위인이었다.' 라는 터무니 없는 논리가 사용되기 때문이죠.
사실과 별개로 우리 스스로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한 방어 기제 외엔 달리 이 공감대를 설명할 수가 없네요.
그럴만해서 침략했다. 라는 식민사관이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서도 버젓이 사학을 대표하는 현상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노릇이죠.
그렇다고 이러한 방어기제가 객관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명분을 내팽겨 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댓글을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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