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절로 수긍이 가는 글 입니다. 예전 무협소설을 읽을때 많은 그저 그런 작품들 속에도 재미를 넘어 감동한 작품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재미는 있어도, 덮으면 생각나는 책들이 없다고 느껴서, 판타지장르의 대세가 문제가 아닐까 싶어 무협소설에 대한 글이 올라온 김에 써놓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판타지에서도 반지의 제왕은 말할것도 없고, 드래곤라자에서도 석양의 감시자 '아무르타트'가 마지막 장면에 날아가는 걸 볼때에 느낀 감성을 잊고 있었네요.
판타지소설이 좀더 좋은 작품이 되려면 설정의 자유로움을 작가 스스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제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다른 생각도 역시 더욱 좋은 작품이 나올수도 있겠다는 걸 이제는 납득했습니다.
판타지가 주제 자체에서 시작하여 모든 틀을 세워나갈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신화적 아키타이프에 대한 모방과 수용이 본격문학에 비해 자유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팬픽으로 지칭하신 소설들이 말 그대로 팬픽 수준에서 끝나게 되는 것은 기존의 틀에 대한 관찰과 분석이 부족하거나 그것에 대한 모방의 그릇이 기존의 체계를 담아낼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닮음의 과정은 작가의 머리와 가슴을 거쳐 펜을 쥔 손끝에 이르렀을 때 작가가 지닌 고유한 세계관에 섞여 ‘다름’을 야기해야 합니다. ‘드래곤 라자’의 드래곤이 ‘드래곤 라자’만의 드래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팬픽 수준에 머무는 작품들은 닮음의 과정 보다는 복제의 과정을 따르고 있어요.
일전에 리쾨르의 책을 읽다가(아마도 ‘악의 상징’이었을 겁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바로 판타지 장르였습니다. 신화 속의 어떤 경험이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경험의 원형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처럼, 역시나 판타지 소설도 판타지 소설로 끝나지 않고 다른 판타지 소설의 원형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자기가 감명 깊게 읽은 텍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아키타이프를 단순히 복제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멜로디로 변주하느냐는 여전히 작가의 몫으로 남게 되는 셈이지요.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기계음으로 가득하지만, 귀가 탁 트이는 선율이 조만간 들려 올 것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우리들은 단어 그대로의 ‘판타지’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작가가 판타지를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과정 자체가 사실 특징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기는 합니다. 그 판타지의 설정들 자체가 특정한 주제를 표현하고 그것을 보조하기 위하여 탄생했으니, 그러한 요소들이 부각되어 만들어진 판타지 세상은 현실과 구분되며 결코 현실과 같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사람이란 언제 어디서나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는 존재고, 이는 현실 세상이든 판타지 세상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그럼에도 현실과 판타지의 배경은 외떨어진 섬과 섬 사이처럼 먼 거리로 떨어져 있습니다. 판타지에서의 주제의식들은 현실에서의 주제의식들과 완전히 합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거죠. 요컨대 어떤 틀 안에서 무언가를 조물락거리는 것과, 틀 자체를 조물락거릴 수 있는 것의 차이는 주제의식의 표명에서 꽤 높은 정도를 보인다는거죠. 그래서인지 가끔 판타지의 문제점으로 '좋은 주제의식이지만 그 주제의식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므로 현실을 효과적으로 반영하지는 못한다'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논의들에 답이 없다는 건 아니고, 여러 고민을 거치고 발전을 거듭해가다보면 판타지의 다양한 문제점들이 점차 해결되어가는 작품들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한 팬픽' 만이 쓰여지고 추구되는 상황 속에서는 그 발전은 정말 요원하다는 생각입니다.
여담이지만 사실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한 팬픽' 자체가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은 안합니다. 모든 글들이 특정한 주제를 잡고 그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만을 가지고 있다면! 좋게 읽을 수 있겠지만 가끔은 너무... 좀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들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지금은 좀 많다는 생각이 들구요.
쓰고 나니 셸먼님이 말씀하신 '주제' 와 제가 말한 '주제의식' 이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만... 주제 > 주제의식이니 애교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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