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보를 세우고 김용은 편집장겸 주필겸 정치평론에 신문연재를
합니다. 아마 그게 그의 두번째 작인 벽혈검이었을 거구요.
이후 사조삼부작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의 초인적인1인 3역의 역활로 인해 명보가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글을 쓰면서 그의 대필설이 나왔고
공식적으로 일부 대필을 본인이 인정합니다.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것이죠.
천롱팔불를 쓰던 도중 2번째 결혼을 하면서 신혼여행을 1~2달 유럽으로
갑니다. 그 기간동안 신문연재는 계속되었고 결국 나중에 예광이
신혼여행기간중에만 대필했다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예광과 김용이 처음 만난게 사조를 쓰기 전 이었고 그때 예광은
중국에서 홍콩으로 밀입국한 사람이었죠. 그래서 사조때부터 예광이
대필하지 않았나 하는 설이 있습니다. 솔직히 신혼여행기간만 대필
했다는게 궁색한 변경 같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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