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고려 때부터 우리는 수도가 함락당해도 왕만 무사하면 됐습니다.
이 점을 무시하고, 한양만 보고 달렸으니....수도점령 후에는 어떻게든 전쟁의 결과가 가닥이 잡힐 거라 생각했던 것, 설마 선조가 몽진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의병들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수도점령만을 생각해 지역점령에 소홀했던 것, 이로 인해 보급의 문제에 당면한 것.
이게 왜군의 패인이라 볼 수 있겠죠. 물론 명의 참전과 수군의 대활약까지.
사견이지만, 일본은 조선과의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인 명나라를 생각해야했기 때문이죠. 해서 쾌속진격을 통한 수도점령이라는 전략을 구상한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파천(播遷)을 쉽게 보면 안됩니다.
전쟁시 파천을 행한다는것은 자기가 무능한 왕이라는것을 세상에 퍼트리는 행위입니다. 얼굴에 똥칠하는것이지요.
특히 체면을 중시하는 유학에서는 왕을 탄핵하는데 100% 성공율을 자랑할만한 정치적 행위입니다. 어찌어찌 탄핵은 피했다 치더라도 세도가들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 왕 노릇은 피할수 없는 수순입니다.
왜란시 조정의 행태는 일본을 너무나도 깔보는 경향이 컸습니다. 왜놈들도 주자학에 간쓸개 다빼줄듯이 구는 정치가들이 파천을 행할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겁니다.
말로는 주자,양반,선비,체면을 입에 달고 댕기던 것들이 급하니 백성 버리고 쏙 도망가다니..왜놈들보다 못했죠 그당시는 ...
물론 파천이 가벼운 것은 아니나, 국란의 위기 때마다 등장한 것은 파천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고려-조선에서 전쟁시 수도를 떠난 왕 중에 신하들의 허수아비가 된 사례 역시 없지요. 제가 아는 한에서지만.
오히려 파천은 신하들의 간언에 의해 이뤄지는 수순이었고, 수습 후에는 임금의 피난길을 수행했다하여 공신으로 책봉되기까지하니, 이를 명분 삼아 탄핵을 주청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실제로 탄핵이 이루어 진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죠.
덧붙여, 고려 현종, 공민왕, 선조, 인조가 전쟁 후에 신하들의 허수아비 노릇을 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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