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기술발전을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으며, 대비해야한다는 생각은 이미 윗 댓글에서 밝혔으니 할 필요 없는 말입니다. 말은 역사적으로 운송, 교통을 위한 수단으로 쓰였지 심미적 관점에서 그다지 고려되지 않았으므로 자동차로 대체된 것이 당연하고 따라서 반론으로서는 적절치 않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는 올 것이고 많은 일들을 기계로 대체하게 되겠지만 그건 인간의 시대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 하고 싶은 일들을 더 많이 하면서 살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계가 하는 게임플레이는 인간보다 정교하겠지만 아무 의미도 없지요. 소설도 마찬가지이고, 기계가 잘 키운 화분도 심미적 관점에서 의미가 없습니다. 기계적 작업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로 인간을 평가하던 시대에서 인간적 창조력을 평가하는 시대로 변천해갈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10프로의 취업이 인간시대의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위에 제가 희망적인 관점이라고 했듯이 보다 자기 자신에게 효용을 베푸는 방식-즉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이 더 많아진다고 생각하시는것이 더 적절할 듯 하네요. 일자리 나누기의 개념으로 본다면 10프로 취업이라는 말은 100프로 고용상태일때 열흘에 한번만 일하면 된다는 말로도 대체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심미적 관점이라는것은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기계가 쓰는 소설도 잘 쓰게 되면 팔릴거에요. 혹은 무료배포되던지... 아무튼 저는 읽어볼겁니다. 기계가 썼다고 해서 보면 눈이 뽑히고 하진 않을것 같거든요. 인간이 쓴것중에서는 가끔 시각을 포기하고 싶은 작품들이 있긴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창작은 대체될 수 있어요. 감상은 대체될 수 없습니다.
건물주님들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에게 세를 받은 다음 그 돈을 가져다가 역시 일을 해서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에게 주어서 살 수 있는 것이군요. 인구의 다수는 건물주가 아니라 노동인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입니다. 건물주가 인구의 대다수가 되면 건물주들도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산이 기계로 대체되는 사회에서 기계에 의해 아무리 재화가 생산되어도 적절한 방법으로 그것을 소비해줄 소비자가 없으면 사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구의 10퍼센트만이 취업을 한다는 말은 구매력이 10퍼센트의 인구에게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 사회는 망하겠지요.
혹시 90퍼센트의 인구가 빈둥빈둥 놀면서 공짜로 재화를 받는다는 식의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말이 되지 않는 가정입니다.
빈둥빈둥 노는사람들이 있어야 위에 말씀하신 인공지능이 생산한 재화가 유지되니까요. 아니면 10프로 외에는 말들처럼 다 줄여버릴 수도 없잖아요? 생산의 문제보다 분배의 문제가 더 중요한 시점이 올 수 밖에 없어요. 기계가 많은 부분 90프로가 아니라 절반만 차지해버려도 이 문제는 심각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럼 무상적인 복지를 제가 이야기 했던가요? 그건 안되는 이야기라고 했지요. 사람의 가치를 노동력에 둔다면 인간시대의 종말이 맞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하는 존재입니다. 고로 누군가를 위해서 노력해서 얻어지는 이득을 경제학에서 효용이라고 말한다면 그 효용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했을때도 보상이 적용되어야 무상복지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이런 경제제도 다들 경험한적 있어요. 잘 씼고 잘 뛰어놀았다고 어린시절 부모님이 용돈주잖아요? 건물주와는 좀 달라요. 노력에 대한 보상이 되어야 합니다.
평생 취직을 안하고 그저 학교만 다녀서 장학금만으로도 생활이 된다고 보자고요. 그런 사람이 몇백만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취직으로 기여하는것만 유의미하다는 생각을 하지마세요. 자기효용과 사회효용의 교집합에서 우선적으로 분배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소비도 사회에 기여하는거에요. 불경기라고 하지요. 분배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생산이 소비를 넘어선것이고요. 당연히 모든 자원의 분배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이득이 되기때문에 이루어지게 되요. 개인의 건강(정신적, 육체적, 사회적)을 지키는것도 사회에 이득이 되지요. 고로 거기에 보상을 안해줄 이유가 없지요.
이미 세계는 물방울 몇개만 떨어져도 넘칠만한 상황에 와있다고 생각해요 전세계적인 불황은 이 분배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타개될 수 있는 문제에요. 현재 기술적으로 구현가능한 자동화기술만으로도 50프로의 취업인구가 대체될 수 있어요. 구글은 이미 자동운전기술을 완성시키고도 이를 쉬쉬하며 언급을 회피하고 있지요. 경제적인 재앙이 될 도화선을 당기는 악역이 될 수도 있거든요. 인간은 적응할것이다라고 낙관하시는것 같은데 이게 정말 잘 대처해도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에요. 사회는 천천히 바뀌지요. 기술은 빨리 발전하고요. 그 속도의 차이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을 줄이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이거 고민해야되는 문제에요. 저는 가장 희망적인 상황을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것 같네요.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되기는 하는데 여행을 하고 운동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런거 전부 사회적인 효용이 있지만 이제껏 무시되어 왔거나 경제적인 보상이 없던 부분이죠 저는 그걸 개인적인 효용이라고 불렀고. 사회적효용의 범위를 더 넓게 잡으면 된다고 하면 그대로 좋고요. 어차파 개인이 사회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이상 건전한 개인이 많은 사회 행복한 개인이 많은사회 유능한 개인이 많은 사회 이게 좋은 사회겠지요. 90프로가 취업이 안되는 사회일지라도 그 개개인데 대한 효용을 사회가 극대화 시켜 줄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생각해야 된다면 지금처럼 취업으로 귀결되는 자원분배시스템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과는 꽤나 다를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어쩔 수 없이 다를 수밖에 없고요.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기존의 사회, 기존의 기준을 되풀이해 말하면서 이름만 바꾸어 부른다고 다른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과속방지복권이나 장학금은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사회적 효용을 위한 것이며, 생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주지는 않죠. 단순히 그만큼의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행이나 운동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인구의 대다수가 실업자가 되는 사회에서는 자기효용에 다른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운동이나 여행, 학교를 게속 다니는 일 등에 원래 매겨질 가치보다 훨씬 큰 생계비 정도의 재화를 지급한다는 말씀이 되겠군요. 그게 다른 게 아니고 무상복지입니다.
그 원래의 가치라는것이 취업으로 귀결된다면 그렇지요. 소비자에 대한 가치가 새로 매겨져야겠지요. 잉여자원은 어쨌든 분배를 해야 사회가 돌아가는것인데 취업인구가 너무 적어서 소비가 안된다? 이건 취업인구에 대한 가치가 잘못되었다고 보아야지요. 소비인구에 대한 가치평가가 새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그냥 일인당 얼마 이렇게 나누어 주어야 그게 무상복지가 되는것이고요. 성취나 노력에 대한 보상이 되어야 자기효용이 되는거겠지요. 분명히 불황이 온다는것은 분배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소비자의 가치가 지금은 너무 낮게 잡혀있다는 것이고요. 취업인구 이외에 돈을 주는것을 무상복지라고 한다고 정의를 내리고 싶으신건가요? 무상복지라는것은 아무 이유없이 주는 돈을 말합니다.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 건전한 개인 건전한 소비자를 만들어 내는것의 가치가 새로이 매겨져야 된다는 말이지요. 무상이 아닙니다. 아무 노력없이 얻어지는 복지는 저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절대 50프로의 실업자가 생기는 일은 없어! 이렇게 단정하고 싶으신가요?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찌 분배를 해야하나요? 취업인구의 가치는 소비자가 있어서 존재하는겁니다. 자영업 힘들다고들 하지요. 왜 그럴까요? 구매자의 지갑이 가볍기 때문이죠. 이건 소비자의 가치가 잘못 평가되어서 오는 실패입니다. 그럼 돈을 그냥 나눠줘요? 그걸 반대하기때문에 위의 글을 쓴거구요. 당장 지금의 세계경제의 상태만 봐도 뭔가 하지 않으면 불황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저는 애초에 무상복지가 나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생산이 늘고 재화는 쌓여가는데 실업자가 늘어난다면 무상복지라도 해서 경기를 부양할 수도 있죠.
소비자의 가치가 저평가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가치평가를 새로 한다는 말은 결국 여행 한 번 갔다오면 생계비 지급, 혹은 동네 모임에 나가서 수다를 떨면 생계비 지급, 뭐 이런 식이라는 말씀이잖습니까? 취업을 했고 안 했고를 떠나서 이런 일에 먹고 살 만큼의 돈을 주는게 과연 온당한 성취에 따른 보상으로 볼 일이냐는 겁니다.
지금읜 기준은, 좌담회 나가서 하루종일 떠들면 십여만원 정도 줍니다.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진 일이니까요.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해 준다면 인간은 좀 더 편안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래야 되는 거잖아요? 지금 상대적으로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별거 아닌 일들에 돈을 받는다고 생각되겠지만 경제에서 효용이란 얼마나 힘든가가 아니라 얼마나 큰 이득을 사회에 주는가 입니다. 그래서 고층빌딩에서 유리를 닦는 사람이 힘들고 위험하다고 해도 가끔 콘서트하고 자가용 제트기로 놀러다니는 팝가수보다 돈을 적게 받는것이구요. 저 별거 아닌 일들이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는 시대가 된다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거구요.
기계가 우리 먹고 입고 살 것들을 대신 만들어 주는 거지요. 살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기계가 모두 대신하니 우리는 그 외의 것들에 신경쓰면 된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 외의 것들이라는 게 한가하게 여행다니고 만나서 수다 떠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뭔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노예에게 생산을 맡긴 후에 자기는 쾌락에 탐닉했던 고대의 귀족같은 것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명백히 말해서 그건 타락입니다. 자기 좋은 일을 한다고 돈을 준다는 식의 발상은 그러니까 안 됩니다. 풍요로운 삶은 누려도 좋겠지만, 우리는 미래에도 할 일이 아주 많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미지의 분야를 개척하는 것 말이죠.
지적 호기심, 자기 희생 등의 발로로 나서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예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소수입니다. 미래에 아무리 풍족해지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 있는 동기를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좋아서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만으로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뭔가가 쉽게 주어지면 그 사회는 쉽게 나태해졌습니다.
고대의 문화에 대해 말하자면, 벽화라면 도공들이 그렸습니다. 문자라면 서기들이 썼지요. 공예품은 장인이 만들었습니다. 건축물은 석공들이 지었습니다. 문학은 시인들이 남겼습니다. 가지기만 귀족이 가졌죠. 귀족들이 이따금씩 스스로 할 때가 있었지만 그들이 주체가 되어 뭔가 남겼다고 할 만한 것은, 글세요?
베토벤,데카르트,세익스피어,김삿갓... 수많은 귀족들이 그저 먹고싸고만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신사임당은 그림을 그렸으니 일단 귀족이 아니고 화가이고요. 먹고 살만하다고 다들 향상심이 없는게 아니에요. 그러니 향상하고 성취하는것에 돈을 주자는것이고요. 현대의 자본주의는 재능이 없으면 좋아하는 일을 못해요. 쓰레기같은 글을 쓰더라도 일단 뭐라도 좀 쓰고 싶어서 쓰면 돈을 지급하다보면 정말 대문호가 나올 수도 있고요. 창작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감상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좋은 음악을 찾아듣는 귀족들은 음악가들을 지원했고 음악가는 그걸 바탕으로 음악들을 만들었지요. 감상은 대체될 수 없다고 했지요. 이게 포인트입니다. 기계가 좋은글 좋은 음악을 만들 수도 있지만 감상은 대체될 수 없어요. 그걸 평가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빅 데이터기반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가치판단에 의존해야 하거든요.
예, 이따금씩 먹고 살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한 결과물을 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예외적으로 소수인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대다수의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쓰레기같은 글을 쓰더라도 일단 뭐라도 좀 쓰고 싶어서 쓰면 돈을 지급'하자.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넉넉히 먹고 살만큼 주지는 말고 조금만 주며, 사명감을 갖도록 어디 데려다 놓고 훈련시키고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액수를 줄이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감상하는 것도 그저 좋은대로 하면 하면 하고 말면 말고가 아니라 정해진 만큼의 분량을 소화하고 소명의식을 가지는 사람들을 키워내자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게 관점의 차이죠. 저는 중요성을 다수의 행복에 놓고있고 황소님은 이 사회의 성취에 놓고 있어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 이런 입장이신듯 한데 결과적으로 분배의 문제가 다시 나올 수 밖에 없어요. 조금 지급해서 자원이 남으면 바다에 버리나요? 바둑의 이야기를 해보지요. 인간이 절대 인공지능을 못이기는 상황이 곧 올터인데 그런 입장에서 보면 바둑은 인공지능의 기준에서는 시원찮은 결과물만 내어놓은것이 되겠지요. 인류최강자라도... 결과에 상관없이 노력한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하면 어차피 잉여자원이 생길 수 밖에 없어요.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회사다니지만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을거에요. 그러면 지금보다 열배는 경쟁이 심한 상황이 옵니다. 당연히 좋은글이 나오겠지요. 바닥에 깔려서 거름이 되는 쓰레기글도 필요한거에요.
성취가 곧 행복인 것입니다. 조금 지급해서 자원이 남으면 더 나은 글을 쓴 사람에게 지급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버리는 게 아니고.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는데도 바둑협히, 리그가 해산되거나 하지 않고 현행 유지되는 이유는 바둑이 인간의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에게 지면 쓴맛은 느끼겠지만 인간의 게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둑의 의미는 사람이 두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기준에서 평가하는 자체가 의미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회사에 안 다닙니다. 회사 때려치우고 작가로 전업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근이 쓰는 사람은 지원을 해도 근근이 쓴다는 말입니다.
한사람이 소비하는데는 한계가 있어요. 대기업회장님이 동네 분식점 떡볶이를 얼마나 팔아 줄 수 있을까요? 현재의 상황은 분배가 안되어서 경제가 세계적으로 불황에 빠진 상황입니다. 재능의 여부는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대기만성인 경우도 있고요. 다독 다작 다상량이 글을 잘쓰는 비결이라지요. 이거 여유가 없으면 못해요. 성취만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요. 그저 자식얼굴만 보고있어도 행복한 사람도 많고요. 행복감은 70억명이 있다면 70억의 행복이 다 다를거라고 생각되네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뭐 이런 국민교육헌장은 이미 폐기되었어요. 성취욕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민족이지만 행복도는 뒤에서 세는것이 빠르죠. 가장 높은 자살율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런 크지만 작은 이야기를 떠나서 더 큰 세계 경제를 위주로 보아도 보다 많은 분배가 필요해요. 그래야 경제가 돌아갑니다. 동네 떡볶이집 매상이 실제로 경제의 현 주소에요. 회장님이 몇조를 벌어도 상관없는 이야기지요.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자발성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위기의식, 이익을 향한 열망(결국 모두 생존을 위한 집념으로 귀결되지요)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사람에게는, 생물에게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식이 가장 강력한 동기이기 때문이죠. 인간 일반에게서 그 이상의 강력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는가...? 있다면 말씀하신대로 세상은 바뀔지도 모릅니다만, 인간이 생물로서의 본성을 유지하는 한 미래에도 지금과 같이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사회여야만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답글이 먼저 올라간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네요. ㅎㅎ
지루함과 타락 대공황 등등 위험요소는 정말 많아요. 생존의 위기는 기아나 물자의 부족이 아니라 자기파괴적인것들이 될 가망성이 크겠죠. 일반적인 생물들은 천적이 있어야 더 잘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인간은 천적없이도 70억의 인구가 될 동안 잘 살아왔어요. 생물학적인 한계를 어느정도는 극복했다고 볼 수 있겠죠. 지금의 상황을 멸망 또는 불멸의 기로에 서있다고도 합니다. 세계의 수많은 부호들이 증명해 준 바. 그래도 인류는 살아남을거라고 생각해요. 배터져죽지 않을거라고.
빈곤이 분배를 못받아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지요. 정치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그런데 제 요점은 빈곤보다는 불황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겁니다. 물자는 그리도 많지만 구매력있는 소비자가 별로 없어서 세계경제 전체가 불황으로 들어가고있는 상황이지요. 우리나라의 경제적인 성공또한 경쟁과 생존본능이라기보다는 공산주의 저지선을 만들고 싶어하는 미국의 무작정 퍼주기에 의한바가 큽니다. 프레이저보고서를 참고해주세요.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을 타는 과학자가 나왔나요? 과학의 성취가 이제는 너무 멀리가 있어서 말그대로 어마어마한 거인의 등에 올라타야 뭔가 성취라는것을 만들어낼 만 하지요. 이제 성취는 교육과 기반시설에서 나옵니다. 소말리아에서는 생존본능이 있어도 안되요.
보상이 없어도 경쟁은 일어나죠. 그런데 보상이 있으면 훨씬 강한 동기를 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만. 상금을 걸고 롤대회를 하면 보통의 게이머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튀어나오잖아요? 번지 점프의 일입니까? 익스트림 스포츠지요. 목숨걸고 스릴을 즐기는. 그거야말로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국제적 빈곤은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인 불안정입니다. 국제 경제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낙후되어 있는 것이거든요.
당연히 어떤 종류의 성취든 열망이나 동기만으로는 이룰 수 없죠. 돈도 필요하고 조건도 필요한 건 하나마나한 소리고요. 돈도 필요하고 조건도 필요하니까 열망이나 동기는 인간에게 중요치 않다? 이게 무슨 논리입니까.
저도 복지가 아니라 경제를 말하고 있는거에요. 이 경제에서 전체적으로 이득을 얻으려면 불황을 타파해야하고 이는 새로운 분배정책이 필요하다는거지요. 기존의 분배정책에서 그나마 써먹을만한것은 무상분배겠지만 그것은 독약이고요. 보상회로를 만족시키지 못하니까요. 생 물 로 서. 생물로 인간이 가진것은 생존본능만이 아니에요. 거의 없다고 과소평가 하셨지만 순수한 향상심도 생각보다 많아요. 경제의 양극화가 향상심을 자극할 것이라는 논지이신것 같은데 이는 그저 경제의 동맥경화같은겁니다. 이대로 양극화의 상태에서 인공지능까지 소유한 부유층이 나타나서 영원토록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경제는 영원히 불황이고 이건 지구적인 재앙입니다. 수정되어야 해요.
제가 경쟁 체제를 말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고래와 새우를 싸움 붙이자는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불공평한 건 애초에 경쟁이 아니니까 당연한 겁니다. 그건 학살이나 불도저로 밀기 같은 거죠. 공정한 라운드와 심판이 필요한 것이고 현 상황은 심판이 고래 편을 들고 있다고는 봅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경쟁 체제를 지지한다고 해서 양극화를 지지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류입니다. 양극화는 경쟁 체제의 폐단이지 경쟁 체제의 지향점이 아니거든요.
근데 님이 말씀하시는 건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게 좀 심한 듯하네요. 자본주의를 폐기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생존의 위기를 느끼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씀도 하시고(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그런 게 가능?), 또 이번에는 보상회로를 만족시키는 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군요.
대 공황의 경제위기에서 선택했던것이 스웨덴의 복지였어요. 결코 경제상황이 좋아서 실행한것이 아니었죠. 그때와 현재의 대한민국을 비교하면 우리가 훨씬 상황이 좋아요. 그런데 왜 우린 못하느냐? 황소님이 막고 있어서 못해요. 배가 고파야 일을 한다는 논리죠. 그러니 불황을 벗어날 수가 없는거에요. 복지가 문제가 아니라 불황이 문제라고 했지요. 왜냐면 불황만 타파가 된다면 다들 돈이 돌텐데 복지는 현재처럼 중요하진 않죠. 더구나 우리나라는 가족중심의 사회라서 유럽보다 파급력이 크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북유럽식 복지를 지지하는건 아니에요. 더 업그레이드 시키자는거죠 그냥 돈을 퍼주지 말고 뭐라도 해야 돈을 주자는 거에요.
2005년, 경제사의 권의자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CSU)의 피터 린더트 석좌 교수는 아래와 같은 빌언을 했다.국제석학들 “성장촉진적 조세조합 선택”
“1980년대 이후 OECD국가의 경험에서 소득재분배가 국가생산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계량경제학적 증거는 전혀 없다”
“복지국가들의 조세조합이 그렇지 못한 미국 일본 스위스보다 성장에 훨씬 효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
“복지국가는 보건의료가 효율적이고 아동보육이나 여성 근로지원이 탄탄하며 소득이전의 부정적 효과를 제한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복지국가로 불리는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의 노동자가 사회지출이 취약한 미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적게 일하면서 비슷한 양을 생산한다”
“미국내에서도 코네티컷, 뉴저지, 캘리포니아 등 소득재분배에 관대한 주들에서 경제성장이 저해되기보다는 오히려 촉진되고 있다”
2005년, 미국 버클리대학(UC 버클리)의 헤럴드 윌렌스키 교수는 아래와 같은 연구결과를 내놓았다.복지국가가 영미형보다 경제성장에 효율적”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등 북구형 사민주의국가가 노동생산성 평균성장률이 2.4%, 실질소득성장률이 1.5%를 기록한 반면, 영미형 시장주의국가는 1.7%와 0.4%에 머물렀다”
미국 - 컬럼비아대학교 제프리 삭스 교수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경제학)는 저서 커먼웰스(COMMON WEALTH)(공동의 부)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보편적 복지국 성장, 선별적 복지국에 ‘판정승’
“사실이 아니라 이념이 논쟁을 지배하고 있다”
“두터운 사회안전망이 미래에 대한 믿음을 보장하고 사람들에게 위험을 감수할 수 있게 해준다”
“증거를 직시하면 선택지가 미국의 자유시장 이데올로그들이 강변하는 것만큼 그렇게 뻔한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자본주의는 높은 수준의 소득, 성장, 혁신과 높은 수준의 사회적 보호를 결합시키는 것이 가능한데, 북유럽이 그 일을 해냈고, 그 경험이 다른 나라들의 선택에 꽤 밝은 빛을 비춰주고 있다”
'이익을 추구하려는 동기가 생존욕구라는것은 황소님의 생각일 뿐이고요. 억만장자는 그럼 이익실현 욕구가 없나요?'
이익추구의 동기가 생존욕구의 발로라는 건 그냥 사실문제입니다. 그 말이 당장 먹을 밥이 없어야 움직인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건 굳이 설명할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넘어갔는데 자꾸 맞지도 않는 예를 들면서 엉뚱한 소릴 하시니 상당히 피곤하네요. 사랑과 섹스의 감정이 종족을 보전하려는 생물학적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 말이 사랑을 나눌 때마다 후손을 낳아야겠다고 생각한다는 뜻이 아닌 건 물론이고요.
'대 공황의 경제위기에서 선택했던것이 스웨덴의 복지였어요. 결코 경제상황이 좋아서 실행한것이 아니었죠. 그때와 현재의 대한민국을 비교하면 우리가 훨씬 상황이 좋아요. 그런데 왜 우린 못하느냐? 황소님이 막고 있어서 못해요. 배가 고파야 일을 한다는 논리죠.'
막은 적 없습니다. 공정한 심판 이야기도 했고, 보상 이야기도 했고, 이미 댓글로 말했는데 이해하기가 싫으신건지 모르겠지만 배가 고파야 일을 한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북유럽 복지국가 이야기 길게 하실 것 없습니다. 그 나라들이 하는 보편적 복지는 무상복지에 가까운 형태이고 무상복지는 안 된다고 스스로 언급하셨죠. '자기효용에 따른 보상'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이미 위에서 그게 기존의 자본주의적 보상방식과 실질적으로 다를 거 없다는 걸 이미 지적해 드렸습니다. 다를 거 없기 때문에 새로운 분배 방식이라고 부를 만한 부분도 없다는 것 역시 이미 말했고요.
일 안하고도 살 수 있는 사회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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