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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ersonacon 風雲我
작성
04.09.07 12:25
조회
4,506

출처 - http://jinpkl.hihome.com

1. 한고조 유방의 아내 - 여태후(呂太后)

한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치(여태후). 산동단현 출신이다)(기원전241~180)

. 어렸을때 부친은 원수를 피하여 패현으로 피난와서 살았다. 첫 번째 만난 연회때 유방의 비범한 기도에 반하여 기쁘게 반려로 맺어졌다. 일테면 평범한 인간이었던 유방의 부인인셈이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항우를 이기기위하여 여치와 유방의 부모는 이년간이나 인질로 있었다. 203년 여치는 한나라로 귀환하여 관중에 머물렀다. 유방이 천하는 통일한후 칭제후에 여치는 황후로 봉하여졌다. 둘 사이에는 그녀가 낳은 영(盈)이라는 아들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여치는 위인됨이 모략을 일삼았다. 한초, 여후는 유방을 도와 한신(韓信)을 죽이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상 최고 잔혹녀로 꼽히는 여태후는 모성이 매우 강한 사람 이었다. 한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태후는 태자가 보위에 올랐을 때 팽월등 이성왕(異姓王)들이 도전해올 것으로 예상하고 한신, 팽월 등을 미리 제거했다. 유방이 죽은후, 혜제(惠帝)를 세워 자신은 황태후가 되었다. 혜제는 유약하였기에 실제 정치는 그녀의 장악하에 놓였다.188년 혜제 붕어후에 소제(少帝)를 세웠는데 소제는 생모를 위하여 여후가 죽기를 바라였기에 원한어린 말을 남기었는데 이에 발끈하여 소제제위 8년에 여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상산와 유의를 옹립 황제를 시켰다. 호령일출태후란 말은 , 여후가 국정을 마음대로 장악한 16년간을 가르키는 말이다.

여태후의 평가는 후세에 분분하지만 유방을 도와 휴양생식의 황노정치를 병행시키며 나름으론 애를 썼다. 유방임종전의 여후는 유방이 죽기전에 미리 안배를 하였다. 소하상국후에 누가 그 자리를 이을 것인지 그러자 조참, 왕릉, 진평순으로 잇게하였다. 단 독임을 막게하였다. 문화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유가천하는 위기가 찾아 왔다. 유씨천하를 위하여 주발이 필요하였기에 태위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여후가 장악하였다. 단지 그녀는 유방이 임종전에 중요인상의 안배적 차원에서 신하들을 다루어 나갔다. 상국의 자리는 그렇게 소하, 조참, 왕릉, 진평, 주발의 개국공신 순으로 이어져 내려갔다. 각기 대신들을 쥐락펴락하는 바람에 나라는 안정되었고 백성들은 편안하였다.

모든 공신들은 내치에 힘썼으며 백성을 마음을 따르기 위해 애썼고 법제, 경제와 사상문화의 각개 영역에 군등하게 힘을 써서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루는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현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 여태후를 본받은 점이 많다 하겠다. 위인됨이 비록 모략가이긴 하여도 대신들을 다루는 솜씨는 일급이며 백성을 아끼는 마음도 일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적을 죽이는 아주 참혹한 솜씨도 일급이니 그녀가 악녀인지 성녀인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는게 꽃어름눈물의 생각이다. 사인방중 하나인 강청의 어리석음, 우리나라 고관댁 마나님들의 옷욕심에 비하자면 여태후야말로 여장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할 때 독하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세울 수가 있었을까? 항우가 개국한 이면에는 여태후의 내조가 없었다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혼란스런 현정치현실을 바라보니 여태후 페이지뷰를 작성하는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라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여태후 만년, 자손이 모두 죽자 부끄럽게도 고조의 자손이라 속여 릉여씨(凌呂氏), 등 모든 여씨 외척들이 후가 되었다. 기원전 180년 여후가 세수 62세로 붕어하자 한고조와 합장하였다. 이후 여씨는 권력욕으로 난을 일으키고는 끝내 진평등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이천년간 유가사상이 유가사상으로 점철된 것에 대한 사학자들의 평가는 구구하다. 남성 위주 사회에서 살아 남고자 했던 그들의 처 절한 몸부림은 후세 사가들에 의해 왜곡된 부분이 많이 있다. 남편의 가족이 왕좌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수많은 남자 혈족을 살해했으며 시어머니의 귀를 불태우고 눈을 뽑고 팔과 다리를 자르는 등 질투심을 붙태우며 20년간 권력을 유지하며 살았다. 남편인 유방이 죽자, 유방이 생전에 총애했던 척부인의 옷을 벗기고 힘이 센 내시들로 하여금 두 다리를 잡아당기게 한 다음, 남편과 관계를 가졌던 음부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리고는 죄수들에게 척부인을 욕보이게 던져놓았으며, 강제로 독약을 먹이고 귀에는 유황을 붓고 두 눈까지 뽑아버렸다. 결국에는 양팔과 다리까지 잘랐으며, 시체는 똥오줌이 넘치는 변소에 던져버렸다. 태자의 이복형제 및 숙모도 처치한 뒤 아들을 여씨 집안 후손과 결혼시킴으로써 황실 혈통을 유씨에서 여씨로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여태후가 죽은 뒤 여씨 일족의 권력은 유씨 집안으로 넘어갔다.

2.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 측천무후(측天武后)

《황후가 되기까지》

성신황제(聖神皇帝) 측천무후, 즉 무측천(武則天: 624~705)의 본명은 무조(武照),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였으나 고종이 죽은 후에 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로 16년간 재위하였지만 실제로는 50여년간 집권을 한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황제이다.

624년(唐 高祖 武德 7년) 1월 23일 무측천은 수도 장안(長安)에서 태어났다.

636년(당 태종 貞觀 10년)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황후 장손씨(長孫氏)가 병사한 후, 그 이듬해에 태종은 무측천의 용모가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황궁으로 불러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았다. 이때 무측천은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녀가 갓 황궁에 들어온 어느날 태종은 후궁들을 데리고 성질이 포악하여 "사자총"이란 이름을 가진 사나운 말을 보러 갔다. 태종은 사자총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대들 중에서 저 말을 제압할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겠는가?"

후궁들은 아무도 감히 나서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지만 무측천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에게 쇠채찍과 철퇴·비수만 주시면 됩니다. 먼저 저 말이 말을 순순히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후려치고, 그래도 계속 난동을 피우면 비수로 저놈의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무측천은 황궁에 들어간지 12년이 지나도록 태종을 위해서 단 한 명의 자식도 생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재인의 직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무측천이었지만 오히려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 고종)는 일찍이 태자 시절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649년(정관 22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무측천은 감업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그 이듬해 태종의 기일에 황제가 된 고종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다가 홀로 쓸쓸히 지내는 무측천의 모습을 보고 옛정에 사로잡혔다. 이에 고종은 예교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데리고 들어갔다.

무측천이 다시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와 후궁 소숙비(蕭淑妃)의 사랑 다툼이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고종의 마음은 황후 왕씨의 라이벌이었던 소숙비에게 쏠려 있었는데, 황후 왕씨는 그러한 고종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 놓기 위하여 고종에게 무측천의 입궁을 적극 부추켰다. 황후 왕씨의 보살핌 속에서 다시 황궁으로 들어간 무측천은 정성을 다해 황후 왕씨를 모셨으며 고종은 그러한 무측천을 더욱 좋아했다.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동시에 받으면서 무측천의 품계도 정이품 소의(昭儀)까지 올라갔다.

무측전은 후에 소숙비, 황후를 제거하고 결국 자기가 황후가 된다.

《자식을 죽인 비정한 어머니》

무측천은 비록 심성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건언12사(建言十二事)"라는 12조의 건의서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농업발전, 조세경감, 언론확대 등의 비교적 완비된 치국정책이 포함되어 있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라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그후 고종이 정사를 처리하는 권한을 무측천에게 넘겨주었던 까닭도 바로 그녀의 이러한 정치적 역량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무측천은 자신의 권세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친자식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무측천에게는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철(李哲), 이단(李旦)이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656년 태자 이충(李忠)이 폐위되자 무측천의 장남 이홍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홍은 착하고 온순한데다 겸손의 미덕까지 갖추고 있어 고종과 여러 대신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후 고종은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황위를 그러한 이홍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자신이 공들여 닦아놓은 권력의 기반을 송두리째 아들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홍은 자기의 말을 잘 듣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이홍이 황제가 되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권력이냐  자식이냐? 이 양자택일의 중대한 기로에 선 무측천은 비정하게도 자식을 버리고 권력을 택하였다. 675년 무측천은 24살의 아들에게 독약을 먹여서 죽여 버린다.

이홍이 죽은 후 고종은 원래 두통 증세가 있던데다 정신적 충격까지 받아 현실적으로 더 이상 정사를 계속 돌보기가 어려워 황위를 무측천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측천은 황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이홍이 죽은지 한 달 후에 둘째 아들 이현이 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은 형 이홍에 못지 않을 정도로 총명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뛰어났다. 더욱이 재상들이 주변에서 그를 잘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측천은 다시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다. 결국 무측천은 다른 사람을 교사하여 태자가 여색을 탐한다고 모함하게 하였다. 680년 8월 이현은 태자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폐서인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파주로 추방되었다. 684년 무측천은 중종 이철을 폐위시킨 사흘 후에 파주로 사람을 보내어 이현을 죽였다.

이현이 폐서인 된 이튿날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에 책봉되었다. 683년 고종은 황위를 태자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써 태자 이철이 황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중종이다. 중종은 그의 형들에 비해 아주 나약했기 때문에 무측천은 처음부터 순순히 그의 즉위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황태후가 된 무측천을 안중에 두지 않고 그녀의 역량을 과소평가했다. 중종은 황후 위씨와 그 일족들을 총애하여 먼저 자기의 장인 위현정을 재상에 임명하였다. 고종이 임종시에 임명하였던 고명 재상 배염이 동의하지 않자 중종은 안하무인격으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를 모두 그에게 주었는데 어쩌겠단 말이오?"

배염은 무측천에게 달려가서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무측천은 즉각 대신들을 건원전에 소집하여 중종을 폐위시켜 여릉왕으로 강등한 다음 그를 궁궐 깊숙한 곳에 유폐시켰다. 중종을 유폐시킨 후 무측천은 자기의 막내 아들 이단, 즉 예종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예종의 정사 참여를 배제한 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모든 대소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최초의 여자 황제》

690년 9월 9일 중양절을 기하여 무측천은 마침내 예종을 폐위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준비해 둔 도읍지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무측천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였으니, 중국역사상 그녀는 황제에 즉위한 나이가 가장 많은 황제가 되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수구세력의 반항을 제지하기 위하여 색원례, 주흥, 내준신 등과 같은 악독한 관리를 임명하여 참혹한 형벌로써 수천 명에 달하는 당왕조의 종실과 대신들을 주살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다지기 위해서 많은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과거제도는 신분에 따라 관리를 임용하던 악습과 그로 인한 폐단을 타파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새로 임용된 관리들 중에는 미천한 집안의 출신들도 많았다. 그들은 신분의 상승을 필요로 하였고 무측천은 그러한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 주었다. 이로써 많은 문인학사들은 무측천의 지지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무측천은 수구세력을 타파하여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굳건히 다지는데 그들을 이용하였다. 그녀는 또 「무거(武擧)」를 설치하여 무예에 뛰어난 사람을 관리로 선발하였으며, 각급 관리와 백성들이 직접 천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녀는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하나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새로운 인재의 발굴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고루 잘 등용하였다. 따라서 그녀의 집권 시기에는 정관(貞觀: 627∼649, 당 태종의 연호) 시기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궁궐에 인재가 가득하였다. 당시에 재상을 역임하였던 이소덕, 소량사, 적인걸, 요숭 등은 모두 뛰어난 재상으로 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무측천은 만년에 이르러 황위를 자기의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지만 재상 적인걸 등의 반발에 부딪혔다. 황위를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어 무씨 정권을 계속 유지시킬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아들(중종 이철과 예종 이단)에게 물려주어 다시 당왕조의 황태후로 돌아갈 것인지, 무측천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결국 699년 무측천은 유폐시켰던 자신의 셋째 아들 중종 이철을 다시 불러 황태자로 삼았으며, 당시의 태자였던 예종 이단은 현명하게 태자를 형에게 양보했다.

무측천은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평가할 때 양단으로 엇갈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그녀는 죽기 전에 자기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도 무측천의 묘비는 이례적으로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만 남아 있다.

706년 정월에 50여 년 동안 권력을 휘둘렀던 측전무후는 세상을 떠났다.

《측전무후의 비용 비법》

무측천은 80세의 고령에도 여전히 젊은 시절의 용모를 유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당서(新唐書)≫에서는 그녀를 일러,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자신을 잘 가꾸어 측근들조차 그녀가 노쇠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였다.

무측천이 사용한 미용 비방은 후세에 당대 관청에서 편찬한 약전(藥典)인 ≪신수본초(新修本草)≫에 수록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민간으로 전해졌다. 그 방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5월 5일에 익모초를 흙이 없도록 잘 캐어 온다. 그것을 햇볕에 말린 후 잘게 찧어서 체로 친다. 거기에 다시 밀가루와 물을 넣어서 잘 섞은 다음 계란 크기 만한 약단(藥團)으로 빚어서 다시 햇볕에 말린다. 황토로 화로를 만들어 사방에 구멍을 낸 다음 목탄을 쌓고 그 속에 이 약단을 넣는다. 밥 한끼가 될 시간 동안 센불을 가한 후에 다시 하루 밤낮 동안 약한불을 가한다. 그것이 식으면 꺼내어 잘게 갈아서 체로 친 다음 건조한 자기 그릇 속에 넣어 둔다. 그것을 사용할 때는 활석분(델컴파우더) 십분의 일, 연지 백분의 일을 함께 잘 섞어서 잘게 간 다음 목욕이나 세수할 때 발라서 씻어내면 된다. 이 비방은 "신선옥녀분(神仙玉女粉)"이라고도 한다.

3. 중국 청대 말기의 여걸 - 서태후(西太后)

《서태후의 출생 및 일생》

서태후는 원래 그녀의 공식적인 칭호가 아니다. 태후(太后)는 황제의 모친을 일컫는 말로 서태후에서 '서'자는 '西'이다. 즉, 황제 모친의 정실은 東으로 후실은 西로 표현한다.

서태후(1835~1908)의 성은 예허나라(葉赫那拉), 이름은 옥란(玉蘭) 또는 난아(蘭兒)이다. 함풍황제(咸豊皇帝: 1831~1861)의 의귀비(懿貴妃)이자 동치황제(同治皇帝: 1856~1875)의 생모이다.

서태후의 출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1999년 4월 문화부 중국예술연구원에서 주관한 "공화국사회주의 문학예술 50년 세미나"에서 유기가 편찬한 《베일 벗은 자희의 유년시절이 논문》에서 유기는 서태후의 출신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835년 서태후는 산서성 장치현 서파촌의 한 가난한 한족 농민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소겸(王小謙)"이었다. 4세 때 장치현 상진촌의 송사원에게 양녀로 팔려가 이름을 "송령아"로 바꾸었으며, 12세 때 다시 노안부 지부 혜징에게 시녀로 팔려가 이름을 "옥란(玉蘭 : 난아 蘭兒라고도 함)"으로 고쳤다. 1852년 예허나라 혜징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궁녀에 선발되어 입궁하였다.

·1851년 자희(옥란)는 예허나라씨 중에서 궁녀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5월 9일 17세의 나이로 입궁하여 귀인에 책봉되었다가 1855년 2월 의빈으로 승격되었다.

·1856년 3월 자희는 아들 재순(동치황제)을 출산하여 의비, 즉 비(妃)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의귀비, 즉 귀비(貴妃)에 책봉되었다. 궁녀에서 귀인을 거쳐 귀비에 이르기까지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는 정권을 장악하고픈 욕망이 점점 커져 갔다.

·1860년 영·프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그녀는 함풍황제를 따라서 열하(지금의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몽진하였다.

·이듬 해 8월 함풍황제는 피서산장에서 병사하고 6세의 어린 재순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그녀와 함품황제의 황후 뉴구뤼씨는 황태후로 추대되어, 휘호를 자희(慈禧)와 자안(慈安)이라 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자희태후를 서태후(西太后), 자안태후를 동태후(東太后)라 불렀다.

·함풍황제가 죽은 후 의귀비에서 태후로 승격된 서태후는 자신의 야심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태후는 먼저 자안태후를 설득하기로 하였다.

  "지금 남편이 세상을 떠났으니 앞으로 마마나 저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것입니다. 재원과 단화, 숙순 등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좋은 날이라곤 없을 것이니, 공친왕과 합세하여 정변을 일으키지 않으시렵니까?"

자안태후는 서태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서태후는 자안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1874년 동치황제는 18세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동치황제는 병세(매독 : 천연두라는 설도 있음)가 더욱 악화되어 1874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1874년 12월 서태후는 대신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4살밖에 안된 여동생의 아들 재첨을 양자로 삼고 황제(광서황제)로 옹립한 다음 다시 수렴청정을 계속했다. 이로부터 청왕조는 황위의 부계세습 전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1881년 동태후가 돌연히 사망하였다. 동태후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미스테리에 싸여 있다. 일반적으로는 병으로 죽었다는 설, 서태후의 강요로 자살했다는 설, 서태후가 독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1886년 서태후는 영·프연합군에 의해 불탄 청의원(지금의 이화원)을 재건하고, 그 이듬해에 "수렴청정"을 "훈정(訓政)"으로 고쳤다.

·1889년 명분상으로는 광서황제에게 정권을 돌려주었으나 실제로는 내정과 외교의 대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과 치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1898년 광서황제는 무술변법을 시행하였다. 그는 유신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하다가 서태후와 갈등을 빚었다. 이에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9월 21일 정변을 일으켜 광서황제를 영대에 유폐시키고 담사동 등 유신파 핵심인물 6명을 처형한 후 다시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서태후는 새로운 훈정을 선포하고 광서황제의 폐위를 준비하였으나, 지방의 총독과 외국 사신들의 반대로 광서황제의 칭호만 남겨둔 채 단왕 재의의 아들 부준을 황태자로 삼았다.

·1900년 8월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공했을 때 그녀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피신하였다가 1901년 9월 굴욕적인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다.

·1902년 1월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다시 그를 영대에 구금하였다.

·1908년 10월 13일 그녀는 74세 생일을 기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과식하여 5일째 되던 날 이질이 발병하였다. 아편을 평소 보다 배로 복용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녀를 더욱 여위게 만들뿐이었다.

·20일 부의(중국 마지막 황제 : 영화로도 제작되었음)를 후계자로 세운 다음 날 광서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1908년 10월 23일 정오에 서태후는 점심 식사를 받고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의자에 쓰러졌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서 대신들에게, "이후로 아녀자가 정사에 간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반드시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각별히 대비해야 하오. 특히 내시가 대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명나라 말기에 내시가 전횡하였던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오."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숨을 가쁘게 몰아 쉬다가 73년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서태후의 청말 개혁》

서태후는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두뇌를 이용하여 함풍황제의 총애를 사고, 다시 과감한 결단력과 간교한 계책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녀는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켰지만, 권력을 장악한 후 그녀의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킨 후 부국강병을 슬로건으로 내건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서막이 올랐다. 양무파는 일을 추진할 때마다 보수파와 청류당의 반대에 부딪혀 조정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보수파와 청류당의 완강한 저항 속에서 서태후는 교묘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점진적으로 그들의 역량을 감소시켜 나갔다.

·청일전쟁 후 무술변법 유신운동이 일어났다. 주지하다시피 서태후는 일거에 무술변법 운동을 진압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태후가 변법유신 자체를 줄기차게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 이로써 완고한 서태후도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행간의 《자희전신록》에 의하면 일찍이 변법 초기에 서태후는 광서황제에게 변법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전한 바 있다.

·몇몇 젊은 서생들의 옹호 속에서 과감하게 개혁을 진행하여, 불과 일주일만에 일천년간 누적된 개혁의 임무를 완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 수위는 점점 서태후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여 마침내 정변으로 유혈 진압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서태후의 불만은 단 두 가지였다.

  첫째, 유신파가 그녀를 타도하기 위한 반란 계획을 수립하여 그녀의 지위와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였다. 서태후는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한 개혁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광서황제와 유신파는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여 당시 사회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사회단체나 정치세력들을 위협하였다. 백일유신 기간에 110여건에 달하는 조서를 반포하여 사람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않았으며, 광서황제는 변법에 장애가 되는 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하여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특히 팔고문을 폐지한다는 과거제도의 개혁은 과거를 준비하고 있던 많은 선비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이에 사회 전복을 염려한 서태후는 긴급히 단호한 조치를 내려 정국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무술변법은 비록 진압되었지만 개혁은 이미 진행되었기 때문에 남은 문제는 누가 어떤 방법으로 개혁을 계속 수행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무술정변을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재확인한 서태후는 계속하여 개혁을 수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러한 조치는 정변 후 한동안 경직되어 있던 정치 사회적 국면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어 변법유신에 새로운 희망의 불꽃을 심어 주었다.

·서태후가 완만하게 개혁을 추진하고 있을 때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였다. 대세 판단에 어두운 보수파들은 서태후에게 의화단을 이용하여 외세를 배척할 것을 강력히 종용하였다.

·결국 영·프 연합군의 북경 침공으로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서안(西安)으로 피난가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서태후는 일을 망친 보수파들을 처벌하고 더욱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할 결심을 하였다.

·1901년 1월 29일 서태후는 서안에서 "예약변법"을 반포하였으며 대대적인 개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고 각계에 자문을 구했다. 이 조칙이 반포된 이후 각계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 중 양강총독 유곤일과 호광총독 장지동이 연서하여 올린 상소의 내용이 가장 완비된 것이어서, 서태후는 그것을 자세하게 읽어본 후 그대로 시행할 결심을 하였다.

·동년 4월 청나라 정부에서는 독판정무처를 설립하고, 혁광과 이홍장 등 6명을 독리대신에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청대 말기의 "신정(新政)"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청말의 "신정"은 무술변법 보다 근대화 성격이 더 강한 개혁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필요없는 관청과 관원을 없애겠다는 무술변법의 노선을 바탕으로 하면서, 전통적인 6부 체제를 폐지하고 외무부, 상부, 학부, 순경부, 우전부 등의 정부기구를 신설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무술변법 때 시행했던 상공업 장려와 기업 발전에 대한 각종 조치를 수용하면서, <상인통례>, <공사율>, <파산율>, <상회간명장정> 등의 다양한 경제 법규를 반포하고, 상공업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법적 보장을 제공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무술변법 때의 주장대로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군제를 개편함과 동시에 현대식 훈련과 현대식 장비를 도입하는 등 군의 전투 역량을 제고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문화교육적으로는 무술변법 때 제기되었던 과거제도의 개혁, 신식학당의 설립, 유학 장려 등의 정책을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신식학당을 대대적으로 설립하고 해외에 많은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제도를 모방하여 중국 최초의 교육제도인 <흠정학당장정>과 <주정학당장정>을 제정하였다.

·1906년 광서황제는 서태후의 명을 받들어 "예비방행헌정"을 선포하고 관제개혁에 착수하였다. 관제개혁은 행정과 사법의 상호 독립이란 기본 원칙을 전제로 쓸데없는 인력을 없애고 전문 인력을 배치하여 맡은 바 직무를 다하게 하는 것이었다. 관제개혁은 권력과 이익의 대대적인 조정으로 이어짐으로써 통치집단 내부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로 인하여 관제개혁에 관한 진정서가 빗발치듯 날아들어 서태후를 심각한 고민에 빠뜨렸다.

·관제개혁 중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중앙과 지방의 권한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청나라 정부에서는 본래 관제개혁을 통하여 지방관의 병권과 재정권을 흡수하려 하였으나 지방관들이 오히려 내각과 개국회를 설치하여 중앙정부를 협박함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그 결과 관제개혁은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1908년 헌정 편사부에서는 예비 입헌 사업 9개년 준비 계획서를 반포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서태후와 광서황제도 <예비 입헌사업 추진 9개년 준비 조칙>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73세 고령의 서태후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으며, 그녀의 죽음으로 개혁은 구심점을 잃고 내분에 휩싸여 방황하다가 실패로 돌아갔다.


Comment ' 4

  • 작성자
    Lv.13 여우
    작성일
    04.10.25 14:40
    No. 1

    이런,,,
    여자들이 하나 같이 엄청 독하군요..
    어떻게 자식을 죽일 수 있는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비적구공탄
    작성일
    05.10.27 20:23
    No. 2

    원래 권력이란 남녀 불문이죠.
    그런데 여자가 정치를 하면 부드러우니 뭐니 하는 정신나간 사람들이 많죠.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92 백고무신
    작성일
    06.03.03 14:51
    No. 3

    좋은 공부가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예교
    작성일
    10.02.09 00:50
    No. 4

    비적구공탄/지금 여성 정치인은 또 모르지만, 옛날 남성 위주 사회에서 여자가 정치하려면 독해질 수 밖에요;; 그 당시에 저 자리에 올랐다면 이미 권력욕이 대단한 수준인 듯. 그리고 무측천의 경우 여자황제라는 반감 때문에 후세에 더 악랄하게 묘사된 케이스이기도 해요. 뭐 실제로도 비정한 여자이기야 합니다만;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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