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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을 지배하고있던 원을 멸망시킨 사람은 주원장이다.
주원장은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명(明)이라 했다.
주원장이 낳은 황태자가 주원장보다 먼저 죽어 황제자리는 황태손에게로 넘어갔는데 바로 건문제이다.
북경지역에 근거를 둔 주원장의 4번째 아들인 연왕 주체가 조카 건문제와 싸워 마침내 제위를 빼앗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정난(靖難)의 변(變)'이다.
주체는 즉위해서 원호를 '영락'으로 정했는데 흔히들 그를 '영락제'라 부른다.
영락제는 도읍을 북경으로 옮기고 남경에서와 같은 규모의 성을 지었는데 그 곳이 바로 현재의 자금성이고 명·청대의 황궁으로 사용된다.
이미 12세에 거세당한 색목인이였던 환관 정화는 정난의 변 이전부터 북경의 연왕(주체)에게 출사하고 있었고 정난의 변에서 주체의 부하로 출전하여 극비사항에 해당하는 전공을 세워 후에 태감(太監)으로 발탁되었다.
정화의 대 항해는 영락 3연에 거선 62척, 장병 2만 7천여 명으로 시작되었다.
영락제가 소년시절부터 측근에 있어 그의 능력과 인품을 믿고 대항해의 지휘자로 지명한 것이다.
정화는 영락제의 믿음대로 훌륭히 그 임무를 다하였다.
대항해는 총 7차에 걸쳐 행하여졌는데 본대 및 분견대가 항해한 곳은 중국 주변의 나라뿐만 아니라 인도, 아프리카까지였다.
대항해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선단의 명칭이 '서양취보선'이란 것으로 보아 서양의 보물을 구하러 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한 '정난의 변'에서 패배한 건문제의 유해가 당시에 발견되지 않아 도망쳤다는 소문이 있어 그 수색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영락제로서는 건문제의 생존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일종의 교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당시의 교역이란 조공과 하사라는 형식인 만큼 명나라의 종주권 유지가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3차 항해에서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왕이 명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아 실론 왕을 포로로 잡아 명나라로 연행한 사실도 있다.
1911년, 지금의 스리랑카 갈레라는 곳에서 도랑의 덥개돌이 비석으로 밝혀져 콜롬보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비석에 영락 7년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환관이었던 정화가 대 항해에서 세운 공로는 지대한 것이지만 그 신분상의 편견으로 그 업적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정화는 중원의 한족이 아닌 색목인(色目人)이었고 종교도 이슬람교였다.
서방계의 사람으로 위구르계인지 이란계였는지 아니면 아랍계였는지는 모른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영락제로부터 신임을 얻어 큰 업적을 세운 것은 오로지 인내와 체념에 의해 형성된 인격이었고 그는 편견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을 수 있어, 어떤 나라, 어떤 인간과도 잘 어울릴 수 있다고 신뢰했기 때문에 영락제는 정화를 사령관에 임명했을 것이다.
명, 청대의 환관들은 흔히들 - 앞에는 사마천, 뒤에는 정화-라고 말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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