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년 황소의 부장이었던 주전충이 당 애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후량을 세운 이후, 중원지역에서는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다섯 왕조가 이어지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오, 남당, 전촉, 후촉, 남한, 초, 오월, 민, 남평, 북한의 10국이 할거했다. 960년 후주의 노장 조광윤이 공제로부터 역사상 최후로 선양의 형식을 밟아 송을 건국하기까지의 50여년간을 우리는 5대, 혹은 5대 10국 시기로 지칭한다.
중국 최후의 대분열기였던 이 시기는 무장들의 혁명으로 점철, 가히 지방적 할거의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로, 왕조사적인 시각을 굳이 고집하지 않는다면, 이미 당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기였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이 시기를 당말오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정치사적인 입장에서는 혼란기였음에 틀림없었고, 중국의 분열을 맞아 북방 유목민족들이 두드러지게 흥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이 마련되고 있었다. 오대의 여러 왕들 중에도 유목민족 출신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돌궐 출신으로 후진을 세운 석경당을 후당과의 대결에서 거란의 힘을 빌린 후, 거란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북방의 연운 16주를 떼어 바침으로써 유목민족의 중국 지배의 서단을 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절도사 등 지방세력의 할거 속에서 위진 이래의 문벌귀족들이 대거 몰락, 송대의 새로운 사회가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던 중국사회의 구조적 변혁기였다.
후주의 명군 세종은 처음 10년간은 천하를 평정하고, 다음 10년간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마지막 10년간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다는 통치 청사진 속에서 천하통일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내정에 충실을 기하고, 거란을 공격하여 연운 16주의 일부를 회복하는 등 눈부시게 활약했으나, 재위 6년 만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가 뿌린 통일의 씨앗을 거두어들인 자는 송태조 조광윤이었다. 세종이 죽고 그의 아들 공제가 7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시 금군 사령관이었던 조광윤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 송 왕조를 개창했다. 중국의 통일은 다음 대인 태종 때, 즉 979년 북한을 쓰러뜨림으로써 완성되었다.
출처. 중국사 100장면중 일부 발췌.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