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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5 태영(太影)
작성
07.09.07 00:31
조회
3,318

주원장 (朱元璋 : 1328~1398). 중국 명(明)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1368∼1398)으로서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며 초명(初名)은 흥종(興宗)이다. 재위연호(在位年號)에 의해 홍무제(洪武帝)라고도 한다.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출신으로 16세에 고아가 되어 기근을 피하기 위해 펑양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었다. 당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출가(出家)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허베이(河北:난징에서 서쪽으로 약 128㎞ 떨어져 있음) 지방과 그 일대를 떠돌아다녔는데 당시 이 일대는 제도적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무법천지였다. 당시 중국의 중부와 북부 지방에서는 기근과 가뭄으로 7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상황은 민중봉기를 촉진시켜 1325년경부터는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민 출신의 비적(匪賊)이 이끄는 반란군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집을 습격하여 그들의 재물을 빼앗은 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지정 12년(1352년)에 고향 호주(濠州)로 돌아간 주원장은 홍건 반란군의 지도자인 지방 호족 곽자흥(郭子興)의 군단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일개 병사에 불과했지만 곧 두각을 나타내어 곽자흥 군단에서 내로라하는 장수가 되었다.

이후 반란군 무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주원장은 일개 병졸로 시작하여 제2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두머리였던 곽자흥은 이러한 주원장을 질시하게 되었고 이 갈등으로 인해 주원장은 죽임을 당할뻔도 하지만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결혼함으로써 갈등은 해소되었다.

이렇게 발판을 굳힌 다음 1353년 주원장은 저주(州: 지금의 안후이 성에 있음)를 함락시켰다. 뒤이어 계속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냈고, 그결과 많은 유능한 인재들을 거느렸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후 명 초기에 벼슬길에 나아가 관리로 일했다.

지정 15년(1355년)에 곽자흥이 사망하자마자 주원장은 그 일족을 죽이고 곽자흥 군단을 송두리째 차지해버린다. 그 후 주원장은 중국 동부지역의 여러 읍과 성을 함락시킨 뒤 양쯔 강(揚子江) 유역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사대부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과 알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주원장의 봉기에 가세하자 그는 그들의 조언을 현명하게 받아들여 실천에 옮겼다. 그들로부터 그는 중국어의 기본을 배웠고, 중국사와 유교경전을 공부했다. 더욱 의미 깊은 일은 그가 통치의 원칙을 배우고, 군대조직과 함께 효과적인 지방행정제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조언자들은 그에게 민중봉기의 우두머리로 자처하기보다는 원(元)나라에 대항하는 국민적인 지도자로 나설 것을 종용했다.

그는 유능한 조언자들을 밑에 거느리고 효과적인 행정조치를 취할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원에 대항하는 가장 강성한 지도자가 되었다. 원을 무너뜨리겠다고 결심한 주원장은 난징으로 진격하여 1356년 그 도시를 함락시켰다. 난징은 양쯔 강 유역의 비옥한 땅과 인접한 군사요충지였다. 스스로를 무공(武公)이라 선포하고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난징 일대에 효과적인 행정업무를 수행했고, 쓸데없는 약탈을 위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일을 삼갔다. 또한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아직 개간하지 않은 토지를 하사함으로써 농업을 장려했다. 여러 차례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기를 주저했다. 그당시 주원장은 송(宋)의 후계자임을 내세우는 무능한 한림아(韓林兒)를 상전으로 받들어 모셨다.

한편 북부의 여러 성(省)들도 남부만큼이나 혼란한 상태였다. 여러 곳에서 원나라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원의 유능한 대신인 탈탈(脫脫)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 반란들을 진압했다. 이렇게 하여 북부는 겉보기에는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되는 듯했으나 남부에는 원의 지배력이 전혀 미치지 못했다.

주원장은 이제 원에 대항하는 국가적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지만 정적(政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정적은 진우량(陳友諒)과 장사성(張士誠)이었다. 진우량은 스스로를 한왕(漢王)이라 선포하고 후베이 성(湖北省) 우창(武昌)에 근거지를 두면서 중국 서부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장사성은 스스로를 오왕(吳王)이라 선포하고 동부의 평강(平江:지금의 장쑤 성(江蘇省)에 있는 쑤저우(蘇州) 지역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1363년 진우량의 대규모 중선단(重船團)과 주원장의 소규모 경선단(輕船團) 사이에 결정적인 해전(海戰)이 벌어졌다. 3일에 걸친 이 해전에서 진우량은 전사하고 그의 선단은 크게 파괴되었다.

1364년 진우량의 근거지인 우창이 함락되었고, 이어 후베이 성, 후난 성(湖南省), 장시 성이 함락되었다. 같은 해인 1364년 주원장은 스스로 무왕(武王)임을 선포했다. 진우량의 죽음과 함께 사태의 국면이 신속하게 대단원으로 향했다. 1367년 송의 후계자로 자처하던 한림아는 저주에 있던 본부에서 몽골족의 위협을 받은 나머지 신변보호를 받기 위해 난징으로 도망쳤다. 그 여행중 주원장 부하의 호송을 받은 그는 양쯔 강을 건너던 중에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이 익사는 주원장이 미리 기도한 사건이라고 추측된다.

같은 해인 1367년 장사성도 생포되어 난징으로 압송된 뒤 자결했다. 다른 반란군들은 투항하거나 또는 처형되었다. 옌안 지대에서 해적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원나라에 대항했던 방국진(方國珍)은 주원장에게 투항하여 영예와 봉록(奉祿)은 얻었으나 실권은 없었다. 반면 타이완(臺灣) 건너편 남동부 해안의 푸젠 성(福建省)을 지켰던 친원파(親元派) 진우정(陳友定)은 생포되어 난징으로 압송된 뒤 처형되었다.

남부지방이 평정되자 주원장은 서달(徐達), 상우춘(常遇春)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북벌을 도모했다. 1368년초 주원장은 마침내 스스로 명의 황제임을 선포하고 난징을 수도로 정했다. 태조가 그의 공식 시호이나 통상적으로 홍무제로 불린다. 북벌군은 계속 성공을 거듭했다. 산둥 성(山東省)과 허난 성(河南省:베이징 남부)이 명에 항복해왔다.

1368년 8월 명의 군대가 베이징에 입성하자 원의 마지막 황제인 토곤 테무르는 내몽골로 도망쳤다. 비록 원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적으로 원은 막을 내린 것이다. 나머지 지역은 손쉽게 명에 함락되었는데 먼저 북서부지방이 투항해왔고 이어 남서부지방의 쓰촨(四川)과 윈난(雲南)이 함락되었다. 1382년 마침내 중국 전지역이 통일되었다. 명왕조는 북송이 멸망한 뒤 무려 240년만에 출현한 정통 한족의 통일 왕조였다.

주원장은 잔인하고 의심이 많았으며 성질이 급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해졌다. 홍무제에게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두 종류의 초상화가 있다. 하나는 온화한 복상(福相)이고 또 하나는 사악하고 잔인한 악상(惡相)인데 아무래도 후자가 실상에 가까운 모양이다. 황제가 된 홍무제는 이 초상화가 암시하듯 타고난 잔인성을 차츰 드러낸다.

그는 31년 동안 황제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몇 번이나 있지도 않은 죄를 날조하여 명왕조의 창업 공싱들을 차례로 처형했다. 홍무 13년(1380년)의 '호유용(胡惟庸)의 옥(獄)', 홍무 26년(1393년)의 '남옥(藍玉)의 옥'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런 사건에 연루되어 살해당한 사람이 수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창업 공신의 대부분을 숙청한 홍무제의 목적은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는 강력한 전제정치체계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 홍무제는 과거에 급제한 사대부가 정치 기구의 중심을 차지하는 북송 이래의 전통적인 관료제를 부활시켰지만, 최종 권한은 모두 황제에게 집중시키고, 이따금 황제를 능가하는 실권을 가질 우려가 있는 재상직을 폐지했다. '호유용의 옥' 사건으로 처형된 호유용은 홍무제와 고락을 같이 한 동지로 승상자리에 앉아 있었던 인물이다. 그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황제권과 재상권의 갈등이 심해지자 그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어 처형한 뒤 재상직 자체를 폐지해 버린 것이다.

황제의 전제적 권한은 명대의 전시기를 통하여 제도화되었다. 그가 취한 정치적인 조치 가운데 하나는 전국의 요지를 분봉(分封)하여 왕부(王府)를 만들고 이를 자신의 아들들(24명)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이같은 조치는 몽골족의 또다른 침략을 두려워하여 취한 것으로서, 황자들에게는 정규군을 도울 수 있는 군사적인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밖의 이유로는 자신의 아들들을 각 지역의 왕으로 책봉함으로써 친히 제국을 관장하겠다는 의도를 들 수 있다.

정치적 전제주의의 경향은 주원장이 취한 그밖의 조치에서도 잘 드러난다. 1380년 좌승상(左丞相) 호유용(胡惟庸)이 대규모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그 일당 3만여 명과 함께 처형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결과 그는 일반행정을 총괄하는 기관인 중서성(中書省)을 완전히 폐지했다. 이렇게 하여 그 다음으로 최고의 행정직급인 6부(六部)는 직접 친정(親政)에 나선 황제를 자문하는 보조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이같은 변화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아무리 뛰어난 황제라도 국사를 모두 관장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6명의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두어 일상적인 행정의 책임을 맡겼다. 전각대학사는 황태자의 교육을 전담했던 기관인 한림원(翰林院)에서 유래한 것이다. 실제적으로 6부보다 상위기관이었던 전각대학사는 전제적인 황제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것이었다. 당대(唐代)의 경험을 통해 송대 황제들은 무사계급이 중국에서 가장 위험한 계급이라고 생각하여, 의도적으로 그 대립세력인 문신(文臣)들을 장려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 반대로 몽골족을 격퇴하고 난 후에는 문신들이 가장 위험한 계급이라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중국 문화를 소생시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유생계급을 복권시켰다. 또한 효과적인 행정을 펴려면 학자들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을 장려하고 관리양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학자들을 훈련시켰다. 동시에 학자들의 권세와 지위를 박탈하는 방법을 썼다. 궁중에서 체벌을 위해 대나무 막대기를 도입하여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르면 이 막대기로 벌을 가해 때로는 학자, 관리들이 죽기도 했다. 그는 학자들이란 황제를 위해 일하는 국가의 노예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황제의 이같은 태도 때문에 많은 사대부 인사들이 관직에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학자들을 관리로 훈련시키기 위해 홍무제는 1369년 각급 지방행정단위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학생들에게는 국가의 교육보조금이 수여되었고, 한림원에 입학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한림원은 교육정책을 수립했고 각급 학교의 학사행정을 감독했다. 이같은 칙령 결과 중국 역사상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은 학교가 명대에 설립되었다. 명대의 교육은 과거시험에 의한 관리선발과 직결되었는데, 이같은 제도의 실현은 당대와 송대에 걸쳐 하나의 이상으로 여겨져왔다.

명대의 중앙정부는 수도에서의 대과(大科) 시험과 어전시(御前試)에 참가하는 자격을 주는 향시(鄕試)까지도 관장할 정도로 철저하게 과거제도를 관리했다. 과거시험은 유교경전에 대한 송대의 성리학적 해석을 강조하고 응시생들에게 인위적, 수식적인 문체의 작문을 강요하여 독창적인 인재의 개발을 억제하는 폐단은 있었으나, 가장 유능한 사람을 정부 관리로 뽑는 제도임에는 틀림없었다. 홍무제가 제정한 군사제도인 위소(衛所) 제도의 기원은 오래된 것이다. 평화시에 경작용 농지를 병사들에게 수여하는 관행을 시행하여 그는 군대가 민간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이상적인 제도를 실천했다.

대외관계에서 홍무제는 명의 세력을 외곽지역으로까지 넓혔다. 만주 남부지역은 제국에 편입되었고, 조선, 류큐 제도(琉球諸島), 안남(安南) 및 기타 국가에서는 명에 복속되었다는 표시로 조공(朝貢) 사절을 보내왔다. 몽골족을 격퇴시킨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홍무제는 2번씩이나 원정군을 몽골로 보내 몽골의 수도인 카라코룸에 도달하게 했다. 명의 군대는 중앙 아시아에까지도 침투하여, 고비 사막에 있는 하미를 함락시키고 중국령 투르키스탄 지역에 있던 여러 국가들을 복속시켰다. 명의 사절이 산간지방을 지나 사마르칸트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차가운 대접을 받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가운데 한 사람인 티무르는 그 지역에 몽골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명의 사절단을 억류시켰으나 결국 풀어주었다. 티무르와 명은 사절단을 여러 번 교환했으나, 명은 티무르의 사절단을 조공사절단으로 여겼다. 티무르는 중국 침략을 준비하던 중 1405년에 죽었다. 홍무제는 중국 연안을 괴롭히던 왜구들의 문제를 놓고 일본 정부로부터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본에 사절단을 3번 보내 회유와 협박을 계속했으나, 왜구를 소탕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왜구 문제에 관한 한 일본 정부도 다른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홍무제에게 가장 큰 문제는 후계자 선정이었다. 그가 무왕으로 있었을 때 선정된 후계자는 그의 맏아들로서 나중에 의문태자(懿文太子)로 책봉된 표(標)였다. 그러나 그의 치세가 계속되면서 4번째 아들인 체(:나중의 영락제 永樂帝)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체는 베이징 지역을 관할하는 연왕(燕王)으로 책봉되어 있었는데, 개인적인 인품이나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1392년 의문태자가 죽자 홍무제는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의문태자의 첫째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했는데, 이 조치로 연왕은 크게 분개했다. 1398년 6월 홍무제가 죽자 손자인 윤문(允)이 뒤를 이어 등극하니 이 황제가 바로 건문제(建文帝)이다. 그의 통치는 1402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연왕이 제위를 찬탈하여 영락제가 되었다.

이처럼 홍무제는 반군의 지도자이자 황제로서 이민족 통치자에 대한 국민적 저항감을 바탕으로 군사를 일으켜 국가를 창업했고, 진정한 중국식 행정제도를 소생시켰다. 그는 이것을 너무 강압적으로 실행했기 때문에 그의 치세는 전제정치의 극치로 간주되어왔다. 그는 외척 또는 실권을 가지고 있는 환관, 군부 등의 일부 집단들이 과거에 음모를 일삼았다고 생각하여 이같은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예를 들면 황후나 환관들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고, 군사문제를 관리하는 데에는 문인 출신의 관리를 임명했다. 지위가 비천한 농민출신이었기 때문에 행정의 부패가 민중에게 주는 고통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비리는 가차 없이 처벌했다.

금의위사(錦衣衛士) 쓰면서 모은 자료인데 필요하신 분들 사용하십쇼. 참고로 출처는 네이버 지식검색입니다-ㅁ-;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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