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세유럽인들은 물을 어떤 식으로 구해 썼을까?
중세유럽인들이 자연에 의해 물을 구했다. 그러나 공공건물이나, 귀족의 성, 물이 많이 필요한 도심 지역에서는 수조를 만들어 썼다. 대게 도시의 물은 도시 근처의 강물에서 도시 곳곳에 있는 일종의 수조에 물을 끌어다 그곳에 물을 체워다 썼다. 현대에 남아있는 중세시대의 여러 분수유적들이 예전에는 일종의 공동수조 역할을 했다. 도시민들은 이런 공동수조에서 물을 직접 나르거나, 혹은 물배달꾼이 각 가정으로 물을 운반했다. (물론 물배달꾼은 돈을 받고 운반해 주긴 했지만..) 강물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경우에는 그냥 강에서 수조까지 원시적인 형태의 수로를 사용해서 연결하곤 했다. (방식은 간단하게 강에서 수조까지 땅을 판다음 그 파여진 땅을 돌로 까는 방식)
혹은 빗물을 받아서 물을 충당한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중세유럽의 대부분의 성에서는 빗물을 받아 물을 충당하는 물저장고가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성 옥상에 빗물을 받아놓는 물저장고를 만들고, 하인들이 다시 각층에 있는 수조로 물을 옮겨놓는 방식을 선호했다고 한다. 성에 사는 대부분 사람들은 각 층에 마련된 수조에서 물을 마시거나, 가져다 썼다. 그리고 귀족의 시중을 담당하는 하인/하녀들은 다시 이 수조에서 귀족의 방으로 물을 날라다 줬다.
이런 빗물을 저장하는 물저장고나 강물을 끌어다 쓰는 공동수조가 없는 경우에는 (대부분 농촌지역) 그냥 근처 마을의 우물물에서 물을 가져오거나, 근처 시냇물, 강 등에서 물을 충당했다.
2 중세에 화장실은 있었나?
현대처럼 각집마다 화장실이 갖춰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많이 쓰는 건물에는 화장실이 있는 곳도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보통 여관이나 성에서 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다.
대게 화장실은 (있다면..) 화장실에 좌변기를 하나 만들어 놓고, 파이프를 하수도나, 오물처리장, 해자(성의 경우)까지 연결해 오물이 흘러가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오물처리장에 분비물이 모이면 하인들이 처리하거나 여관의 경우에는 따로 오물을 처리하는 사람을 부르고는 했다. (도시에는 오물을 치워주는 일꾼이 존재했음. 보수는 높은 편이지만 인기없는 직업.) 혹은 강가에 화장실이 있는 건물이 있다면, 그냥 파이프를 강까지 연결하기도 했습니다. 성의 경우에는 대게 해자로 파이프를 연결했다. 그래서 성을 둘러싼 해자에서는 악취가 진동 했습니다. 성의 경우에는 보통 각 층에 화장실을 1~3개 정도 만들어놨다.
성이나, 공공건물에는 화장실이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일반가정에서는 그냥 요강이나, 재래식으로(우리나라 일부 시골마을처럼) 해결하고는 했다.
3 중세유럽인은 목욕을 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중세유럽인은 분명 현대적인 의미의 목욕 즉 목욕탕에서 전신욕을 하거나 샤워를 하는 등의 목욕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중세유럽인이 완전히 씻지도 않고 산 은 아니다.
일단 거의 모든 중세인들은 얼굴과 손발을 철저하게 닦았다. 구체적으로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손발을 ??고, 식사하기 전에도 꼭 세수와 손발을 물로 닦았다.
대게 귀족의 경우 전신목욕은 매일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매일 몸을 씻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단 귀족 내외는 밤에 발가벗고 잠을 잤는데 아침이 되면 하인, 하녀들이 귀족의 방으로 들어와 귀족들이 옷을 입기 전에 전신을 물로 닦아줬다. 이때 닦아줬다는 의미는 목욕탕에 들어가서 닦았다는게 아니고 단순히 떠온 물로, 대충 전신을 행궈줬다는 의미이다. 또한 많은 중세유럽 성의 유적지에서 목욕탕 유적지가 발견되고는 하는데 귀족은 이러한 목욕탕에서 전신목욕을 하기도 했다. (전신목욕이 터부시된 건 흑사병 창궐 이후와, 르네상스 이후로 중세유럽에서는 전신목욕을 그다지 꺼려하지는 않았음)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중세유럽인은 현대인과 비교하면 청결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게 평민의 경우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신목욕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교회가기 전날 대부분의 중세인들이 목욕을 했기 때문이다. 중세유럽에는 현대적인 수도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목욕을 한 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일단 한 번 나무로 만든 목욕통 (일종의 큰 바가지 같이 생긴..) 에 물을 붇고, 불로 데우면, 가족 전체가 차례로 한 목욕통에서 목욕을 했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더럽다고 볼 수도 있을 듯)
또한 대부분의 중세도시에는 여러 군데의 공중목욕탕이 성행했었다. 이런 목욕탕들은 순수하게 목욕을 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창녀촌 비슷하게 운용되곤 했지만, 일반인들이 목욕탕을 갈 기회는 있었다. 흑사병 창궐 이후로는 목욕탕이 성병과 질병의 양산지로 인식되게 되면서 공중목욕탕이 하나 둘 씩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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