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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주의 개관

작성자
Lv.1 redrush
작성
10.06.21 00:36
조회
2,119

절대주의 개관

차   례

1 들어가는 말

2 절대주의와 왕권신수설

(1) 절대주의의 개념

(2) 왕권신수설 - 사상적 배경

(3) 관료제와 상비군 -왕귄강화기구

(4) 상공시민층과의 제휴- 지지계층

3 절대주의의 성립

(1) 중세의 유럽

(2) 중세의 위기

(3) 절대주의의 등장 4- 절대주의의 경제정책 - 중상주의 5- 각국의 절대왕정 6- 절대주의의 모순과 붕괴 /참고문헌 /각주

1. 들어가기

I5-16 세기까지 유럽의 각국은 근대사의 개막과 함께 절대왕정이 성립되는데 그래서, 이 시기를 절대주의(Absolutism) 혹은 절대군주(Absolute Monarchy)의 시대라고 달리 부르기도 한다. 물론, 절대왕정이 전형적인 정치 형태를 갖추고 고유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지만 이 시기는 봉건제의 위기가 표면화되면서 국내적으로는 종교전쟁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귀족들의 경쟁 그리고, 국외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국가간의 대립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또한, 지리상의 발견을 계기로 식민지 획득과 상품시장 개척에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서유럽 국가들의 중앙집권화는 대체로 15세기말이래 진척되었다. 에스파냐는1469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드(Ferdinand)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Isaberra) 여왕이 결혼하여 두 나라를 통합한 후 급성장하였고, 프랑스는 백년전쟁1)이 끝난 이후 샤를르 7세, 루이 11세, 프랑소아 1세(Francois 1, 재위 1515'47)의 치세 아래서, 그리고 영국 역시 장미전쟁 이후 튜더 왕조2)가 성립되면서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국가는 단순히 영역적이고 분산적인 지배에 머물렀던 종래의 봉건국가들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전의 봉건국가들에서 왕권을 제약했던 신분의회-이를테면 에스파냐의 코르테스, 프랑스의 삼부회-는 점차 약화되었고, 그 대신 국왕이 중앙 및 지방행정을 담담할 관료조직의 정비와 함께, 국내치안과 방어를 목적으로 상비군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에스파냐의 레트라도스(letrados), 프랑스의 지사(intendent)제, 영국의 치안판사제 등이 재정비된 관료조직에 해당한다.

상비군의 전형적인 예는 에스파냐의 보병군(tercio)과 프랑스의 칙령군(compagnies d'ordonnance)을 들 수 있다. 한편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 지배세력은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국민에게 조세를 부과함과 아울러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국내 상업과 공업기반을 육성하는 데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기 절대주의 국가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관료기구, 상비군, 공통된 법체계, 국민적 조세제도 등은 모두 근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초기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절대주의국가의 성격에 관해서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나마 그 근대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래서, 근대사의 기점을 절대주의 국가의 성립에서 찾는 서유럽 각국의 정치사 서술은 물론 마르크스주의3) 역사학에서도 절대왕정의 존립기반이 봉건귀족과 부르주아지의 힘의 균형에 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즉, 절대군주는 양 세력 사이의 균형추 역할을 함으로써 스스로 공권력을 강화해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주의의 지배세력이 자본주의의 추진체제인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에 전반적으로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절대주의 체제는 농노제적 사회체제의 해체에 직면한 봉건지배세력이 그와 같은 경제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스스로 재편성한 봉건국가의 최종형태였다.

농노제가 약화될수록 개별적으로 농민의 잉여를 수탈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워졌으며 이에 따라 그들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지배기구를 통하여 전국적인 차원에서 일반민중의 잉여를 수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절대국가의 전국민적인 과세는 집중된 봉건지대인 셈이다. 그리고, 근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알려진 여러 제도들도 전국적으로 직접생산자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잉여를 수탈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였다.

2. 절대주의와 왕권신수설

(1) 절대주의의 개념

절대주의란 '지배자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全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체제'를 말하는데 전제주의(Despotism) 혹은, 참주정a)(Tyrfnny) 등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즉, 여기서의 절대주의는 일반적 의미의 전제주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사의 한 특정한 시대에 출현한 정치형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절대왕권정치는 이집트의 전제군주나 로마의 창제체제에서 이미 나타나기는 하지만 가장 과장된 형태와 세련된 이론으로 합리화된 것은 17세기유럽의 그것이다.

절대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지만 오래 전부터 주장되어 온 것은 계급균형론 내지는 과도정부론이었다. 이 견해는 舊귀족 및 영주의 몰락과 부유한 상인을 중심으로 한 시민계층의 등장을 중시하여 절대왕정은 이 상호 대립되는 귀족과 시민의 양 균형 위에서 그 양 계급의 조정자로서 독자적이고 초월적인 권력을 보유하는 과도적, 예외적 국가형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시민사회로 넘어가는 가교의 시대라고 말 할 수도 있는데 봉건제도 그 자체를 완전히 해체하거나 폐지한 것이 아니고 영주와 교회의 권력을 절대군주에게 통합시키고 또한 신흥시민계급의 지지를 받아 그 위에 군림하는 정치형태인 것이다.

그래서, 왕권은 제후들로부터도 또한 시민들로부터도 제한을 전혀 받지 않는 절대적 존재로 등장하여 그 이전부터 있어온 신분제의회마저도 그 기능이 점차 정지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절대군주에게 집중화된 절대권력은 봉건영주와 교회의 권력에는 대립되는 것이나, 봉건제도 그 자체를 폐지한 것은 아니었다. 즉, 이러한 진력의 집중은 봉건제도를 민족적, 전국적인 대규모로 재편성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집중화된 절대왕정의 정치권력은 그 본질상 일반 개개의 영주와 교회의 정치권력 즉, 지방분권적 정치권력과도 상반되는 것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정치형태인 자유주의의 정치권력과도 대립되는 개념이다.

물론, 절대주의의 정치권력은 통일민족국가를 형성하여 봉건적 신분관계를 대신하는 시민적인 자유평등의 토대를 닦고 중상주의에 의하여 Guild 5) 제도를 Manufacture 체제로 전진시킴으로서 시장의 확대를 초래하는 등 자본주의적 발전을 허용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주의의 정치권력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으며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시민계급 그 자체의 발전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정치권력은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모두에 모순된 일종의 기형적인 권력형태였다.

(2) 왕권신수설 - 절대주의의 사상적 배경

절대주의 국가에서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왕은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인민은 저항권 없이 왕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는 정치 이론을 말한다. 왕권신수설은 절대주의 국가에서 인민의 저항이 높아간 단계에 나타나 절대주의를 보강하는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이용되었다. 영국의 절대주의는 튜더왕조 단계에서는 인민의 저항이 잠재적이어서 파탄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스튜어트 왕조6)에 이르러서는 인민의 저항이 표면화하고 왕과 의회와의 항쟁이 심해졌다.

그리하여 튜더왕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왕권신수설이 제임스 1세7)에 의하여 창도되었다. 왕은 영국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자유로운 군주국의 진정한 법」(1598)이라는 논문을 써서, 왕이 지상에서 신의 대리이고 왕권에는 제한이 없으며 의회의 권능은 권고하는 데 그치는 것이라고 논하였다. 그 뒤 1609년 '왕이 신으로 불리는 것은 타당하다. 그 이유는 왕이 지상에 있어서 신의 권력과도 같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은 모든 臣民을 심판하며, 더욱이 神이외의 아무 것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였다.

로버트 필머8)는 청교도혁명 중 왕당파로서 활동했던 사람인데 『家父長權論』 (1642)에서 신이 최초의 가부장 아담에게 권력을 주었으며, 그 뒤 역대의 가부장이 이를 계승하여 각지에 군림하였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위그노의 격렬한 반항의 뒤를 이어, 엘리자베스와 거의 같은 시대에 부르봉 왕가의 開祖 앙리 4세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처음부터 왕권신수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앙리 4세의 법률가 베로아는 『왕권론』 (1587)을 저술하여 왕권이 신에 의하여 수립된 것이어서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으며, 왕은 신의 대리로서 신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로 이주해 온 버클리의 『왕권론』 (1600)도 똑같은 취지의 것이었다.

그 뒤 절대주의는 루이 13세에서 루이 14세9)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였는데 루이 14세는 스스로 '신은 사람들이 왕을 신의 대리로서 존경할 것을 희망하였다. 신민으로서 태어난 자는 누구이건 무조건 복종하는 것만이 신의 희망하는 바이다' 라고 말했다. 왕의 황태자의 師父 보쉬에는 『聖書政治學』 (1709)에서 신이 참된 군주이며 지상에 그 대리로서 군주를 두었다고 설명했다.

(3) 관료제와 상비군 - 왕권강화기구

절대왕정의 성립과 유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료제와 상비군이었다 통치와 행정에 있어 전적으로 국왕에게 의존하고, 국왕의 의사를 충실하게 이행하려는 관료집단은 왕권강화의 중요한 첫걸음이었으며, 또한 국왕은 국내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고 국가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언제나 그의 명령을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군대가 필요하였고, 그리하여 상비군이 설치되었다.

군대를 유지하고 관료에게 봉급을 주며 나라를 통치하기 위하여 국왕은 막대한 돈을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아직은 엉성하였으나 조세제도가 마련되고 중상주의정책이 채택되었다. 그밖에 균형 잡힌 정의의 구현을 위하여 통일적인 사법제도가 발전하고 근대국가로서 필요한 통치기구와 여러 제도들이 필요에 따라 마련되었다.

전쟁규모의 확대에 따른 봉건 영주 및 기사계급의 몰락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대의 흐름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 규모의 확대는 상비군뿐만 아니라 그 재정적 부담을 확충시키기 위해 관료제의 특성을 유지하는 요소로도 작용하였다.

중세 이후 근대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사에 있어 빈번했던 전쟁은 당시의 국가로 하여금 재정상의 심각한 고민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주된 요소로 작용하였다. 국가의 부채가 늘어갔다는 것은 국가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책을 계속 수행해 나갔다는 점을 말하는 것인데 결국은 파국적 결과를 빚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계속 넓혀 가는 노력은 부분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그 결과 절대주의 왕조국가의 기반이 상당 정도 강화되었다. 10)

비록 상당한 액수의 부채가 국가의 강제력을 매개로 한 것이지만 국가가 계속부채를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강제력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무한정으로 강제력을 사용할 경우 국가를 상대로 하는 대금업자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므로 국가는 부분적으로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기도하였다.즉 계속 조세를 증가하여 감으로써 자신의 변제능력을 증명하기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제능력을 보이기 위해 국가는 한편으로 납세자의 납세능력을 최대한도로 넓히고 동시에 이를 국가가 직접 통제함으로써 세입을 극대화하는 노력을 계속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왕실은 전쟁의 지속적 수행에 필수적인 전비의 조달을 위해 민간 대금업자들의 대부에 상당히 의존했는데 이 대부는 조세수입의 증가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당시 조세수입의 기반을 어렵게 했던 요인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좁은 조세기반이었다.

즉, 승려와 귀족은 처음부터 면책특권을 갖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민들의 경우에도 부유층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능력에 맞지 않는 가벼운 세금만을 낼뿐이었다. 지역적으로도 몇몇 지역은 조세권이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의 귀족의회의 특권에 귀속되어 있었고, 직접세의 징수 역시 관직 매매를 통한 관리들에 의해 이루어지곤 했다.

전쟁이나 내한의 발발과 같은 갑작스러운 재정상의 필요에 관직을 남발하였기 때문에 관리들이 늘어났는데 이러한 관리들의 증가는 오히려 세수증대에 방해가 되었다. 관직판매를 통한 관직의 증가는 기존 관리들에 의해 불만의 이유가 되었고 또한 관할권 분쟁, 부패 등으로 인해 능률적인 조세행정, 즉 공평하고 정확한 세액사정 및 징세가 어려웠다.

더욱이 이들 조세관리들의 세력기반은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명령하는 인기 없는 새로운 조세의 도입 및 확대를 집행하는 데 이들은 상당히 미온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중앙정부의 정책은 조세행정에 대한 통제권을 국가가 직접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의 수상이었던 리슐리외11)는 지방관리의 감독에 관련된 업무와 관련하여 사용해 오던 군왕의 직접임용관리로서 감독관을 효율적 조세행정에 기존의 관리들과 병행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위와 같은 행정체계의 확립은 전통세력에 대한 절대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세행정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유럽 각국은 장기간의 전쟁에서 필요한 전비를 조세를 통해 조달할 수 있었다. 12)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절대주의국가의 특징 중 하나인 관료제가 갖는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다고 하겠다.

3. 절대주의의 성립

(1) 중세의 유럽

절대주의가 등장하기 이전 유럽의 중세사회는 봉건귀족들이 국내에 할거하여 정치권력은 분산되어 있었으며 국왕은 그들 귀족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데 지나지 않았고 대귀족들은 국왕의 행동을 제한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국왕을 제거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귀족이외의 중세인들은 자신이 어느 나라의 국민인가에 대한 자각은 없었고 오직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사는 마을이나 도시였으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국민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속한 작은 공동체의 일원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던 질서도 오직 신분제의 원리뿐이었다. 이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귀족, 서민이라는 신분 또는 그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집단에 속하고 그 집단에 주어진 권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개인으로서는 누릴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신분사회는 개개인보다 단체가 우월한 사회였다. 그리고, 이 시대의 주요한 공동체인 동업조합, 마을, 도시 공동체들은 각각 고유한 규칙과 권리를 오랜 역사에 의해 길러진 관습으로부터 부여받고 있었다. 이처럼 중세의 유럽은 분산되고 신분제적인 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였다.

또한 중세에 있어서의 정치적 지배권력은 사적인 토지지배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므로 영주가 주민에 대하여 직접적인 정치지배를 하고 군주에게는 그 권한이 없었다. 즉, 군주의 신하에 대한 권력적 지배관계는 관념적이고 간접적이었으므로 절대주의 성립이전의 권력구조는 지방영주들에 의한 다원적이고 분열적인 것이었으며 각 정치단위는 독립적이었다.

그러므로, 군주는 영주권을 구속하고 영지의 내부까지 간섭할 강력한 권력을 갖추지 못한 예의상 또는 종교상의 존재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경제분야에 있어서도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나타났는데 중세시기 동안의 경제는 각 영주들의 장원 내부를 중심으로 농업을 바탕으로 독립적이고 자급자족적인 경제활동이 전부였다. 물론, 일부의 도시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수공업과 상업 활동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 역시 길드와 같은 수공업자 혹은 상인들의 공동체를 정점으로 이루어지는 폐쇄적이고 독립적인 활동이었다.

(2) 중세의 위기

이상과 같은 중세사회는 13세기 초반에까지 팽창과 발전을 지속해 왔으나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에 이르면서 정체 내지 쇠퇴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개간 가능한 숲과 황무지가 바닥나자 인구에 비하여 토지의 부족이 심화되어 갔고 지력의 쇠퇴, 등으로 인해 생산성도 낮아졌으며 기아와 질병에 의한 인구의 감소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무엇보다도 이 시기 지배계급의 소비수준이 전투장비와 사치품 구입 때문에 수입을 초과함으로써 다수의 영주들이 재정적 위기를 겪는 14세기초 '중세의 위기현상'이 나타났다 즉, 이것은 봉건적 생산양식이 가지는 구조적인 모순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봉건적 생산력이 더 이상의 인구를 수용할 수도 없고 지배계급의 수입증대 욕구도 충족하지 못 하는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러한 봉건제 자체의 구조적인 위기와 함께 1347년 이후로는 흑사병13)(Black Death)이라는 파국적인 국면이 중첩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시작하여 全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인구의 격감과 노동력의 심각한 부족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이에 따른 식량수요의 감소는 곡가의 하락과 노동임금의 싱승을 초래하였고 그래서, 이러한 위기는 소득 분배를 둘러싸고 지배-피지배계급간의 대립과 계급갈등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된 지배층의 가혹한 정책들은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게 되어 1313년 플랑드르l4)(Flanders)지방의 반란, 영국의 와트 타일러(Watt Tyler)반란, 스페인의 까탈로니아 (Catatonia) 반란등 대표적인 농민, 수공업자들의 투쟁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며 14-15세기에 이르자 장원제 자체가 붕괴에 직면하게되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곡가하락, 지대하락, 임금상승, 농민의 반발에 따른 노동력확보 블능 등으로 인해 현금을 받고 직영지를 임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이것은 결국 중세의 장원제적 농업 경영의 사실상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장원제적 제반 질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시민층의 성장을 촉진하고 자연경제에서 화폐경제로의 전환을 촉진시켰으며 자영농민의 출현으로 인한 농민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은 봉건제도의 존립기반에 동요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3) 절대주의의 등장

앞서와 같은 유럽 사회 내부의 변화와 함께 유럽 사회 외적으로도 십자군전쟁이후 세계로의 통로가 개척되고 IS세기에 이르러 지리상의 발견 등으로 항해와 무역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자 봉건사회의 붕괴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식은 더욱 높은 단계로 발전하여 유럽인의 시야를 더욱 넓히고 유럽인들의 경제적인 활동은 지중해에서 벗어나 전세계로 확대된다.

이러한 경제적 활동권의 확대는 상업적 활동을 더욱 촉진시켜 새로운 중산계급을 낳게 하였다. 즉, 상업자본의 발달은 봉건적인 사회관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근대자본주의 발달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신대륙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양의 귀금속은 자본주의의 발달에 불가결한 화폐의 공급을 촉진하였고 아울러 새로운 시민계급을 나타나게 하였으며 이러한 상업상의 변동은 지금까지의 Guild체제 경제에서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Manufacture체제로의 전환을 야기시켰다.

이상과 같은 사회 경제적인 변화는 정치적인 면에서도 나타났는데 앞서 설명된 '중세의 위기'는 서민층 뿐만 아니라 귀족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즉, 화폐경제의 신장과 서민층의 지위항상 등으로 인한 지배층의 동요는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고 이러한 위기가 내란이라는 권력투쟁을 초래하였으며 또한 이 내란이 봉건귀족의 몰락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절대군주의 후보자들은 평화와 질서를 요구하는 소리에 부응하여 여러 가지 상호대립된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외관상으로는 조정자로서 등장하여 내란의 종지부를 찍고 절대주의국가를 성립시켰다.

유력한 귀족중의 한 사람이 조정자를 자처하며 절대군주로 등장하는 이 마지막단계에서는 귀족들의 분열과 함께 성장하는 시민층 및 농민들의 협력이라는 요소가 절대왕정의 형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즉, 조정자로서의 절대군주는 귀족들 사이의 분쟁에 대한 조정자일 뿐만 아니라 귀족들과 서민들 사이의 계급적 투쟁에 대한 조정자로서도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력의 성장과 함께 사회적 신분의 신장도 함께 추구하는 서민들의 요구는 영주에 의한 직접적인 지배보다는 한 사람 군주에 의한 간접적인 지배를 선호하게되고 여러 귀족들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의 성립을 원하는 군주는 이러한 서민층의 원조에 힘입어 다른 귀족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이 과정에서 시민층은 자신들의 무역과 상업의 이익을 계속적으로 보장받기 위하여 그리고, 농민들은 영주로부터의 봉건적인 제재와 착취를 막는 수단으로서 절대군주를 영주들의 직접 지배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방패로 생각하여 군주에게 협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군주는 서민층이 보유한 경제적 힘을 자신의 강력한 무기로서 이용하여 다른 귀족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강력한 실권을 가지게 된 군주는 그의 절대권을 확립하는 수단으로서 다시 영주들에게도 손을 뻗어 정략적 외교수단, 통혼 등으로 점차 봉건영주들의 권한을 빼앗고 그들로 하여금 영지에 대한 직접적인 행정권을 포기시키면서 그들을 귀족화 하였고 성직계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방법을 취하였다.

이로써, 봉건제 기간동안 분열되고 독립적이었던 정치, 경제, 사회 체제는 종식되고 민족적이고 단일한 국가가 나타나고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게 된 군주는 무역과 상업을 촉진하여 거대한 부를 형성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많은 식민지와 해외발전을 보게되지만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군주는 그들이 바라던 진정한 자신들의 보호자로서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것은 투쟁에서 승리한 군주가 지방의 영주들을 궁정 귀족화 시키고 자신의 관료제 체제 속에 편입시킴으로서 여전히 그들에게 지배층의 위치를 점유하게 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4. 절대주의의 경제정책 -중상주의

15세기부터 18세기 후반 자유주의적 단계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제국에서 채택한 경제정책과 경제이론으로 근대자본주의가 산업혁명에 의해 지배를 확립하기까지의 초기 단계에서 원시적 축적을 수행하는 데 사용된 여러 정책과 이를 뒷받침한 이론체계이다.

경제정책으로서의 중상주의의 핵심은 초기 산업자본을 위해 국내시장을 확보하고, 국외시장을 개척할 목적으로 수행되는 보호주의 제도로서 외국제 완제품의 수입금지와 제한, 외국산 원료의 수입장려, 국내상품의 수출장려, 국내원료의 수출금지 등의 조치를 직접 입법 및 관세정책으로 실행하였다. 이것은 절대왕정이 타도되어 산업자본이 국정을 지배하게 되는 명예혁명15) (1688) 때부터 약 100년 사이에 걸쳐 원시적 축적의 체제로서 추진되어 온 정책이다.

경제이론으로서의 중상주의를 보면, 근대자본주의는 아직 생산부문까지를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하였으므로 중상주의자들은 이윤이 기본적으로 생산과정이 아닌 유통과정에서 발생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일반적 等價로서의 귀금속이야말로 富의 본원적 형태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귀금속의 원산지 이외의 지방에서는 외국무역만이 그 획득수단이었으므로 무역차액이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 정책의 중심목표로 추구되었다.

수단으로서 직접무역통제에 의한 개별적 차액의 확보책인 重金主義16)가 주장되다가, 후에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 궁극목표인 총차액은 개별적 통제의 완화에 의해 오히려 증대된다는 주장도 나왔으나, 보호주의의 이론을 전복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중상주의 사상의 주류는 단순히 무역차액이나 산업보호라는 관점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국내시장 확대와 자본축적이라는 관점에서 유효수요의 분석에도 진전을 보여 마침내는 화폐경제이론의 초기적 체계를 완성시켰으며, 한편으로는 고전학파의 前史로서는 W.페티의 노동가치설이나 D.데포의 자유무역론까지 포함하고 있다.

부르봉 절대왕정 하에서의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책은 산업·무역통제로 유명한 콜베르17)의 이름을 딴 Colbertism 이라고 하며, 신성로마제국에 속하였던 18세기 독일의 여러 領邦의 재정정책은 官房主義라는 형태를 가진 절대주의적 중상주의 체계하에 있었다.

중상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시민혁명과 더불어 해체되고, 이론적으로는 A. 스미스의 <국부론> (1776)의 출판과 함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절대주의 하에서는 우선 상품유통의 수단인 화폐 ·도량형을 통일하고, 항해법을 제정하여 국민적인 무역 ·해운의 발달을 꾀하며, 무역상인의 독점조직인 특허무역회사를 정비하고, 시장개척을 위하여 열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식민지 건설에 힘썼다.

무역의 진흥은 수출지향형 공업의 발달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료의 수출을 제한하고, 외국상품의 수입은 억제하는 한편, 공업의 육성 및 발명의 촉진 등을 명목으로 각종 공업에 독점권을 설정하였다.

노동에 대하여는 저임금노동력의 확보를 위하여 최고임금을 규정함과 동시에 최저노동시간을 규정하였다. 즉, 민족의식을 근간으로 하고 시민계급의 이익을 염두에 두면서 형성된 근대민족국가는 점차 그 국력의 팽창과 더불어 특히 신대륙의 상업이권을 놓고 타국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국내적 통일과 부국강병이 절실히 요구되었으므로 관료와 상비군이 확대되었고 이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여야만하였다. 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시민계급을 원조하여 국외로부터 금 ·은 ·재화를 획득하고, 국내산업을 진흥시켰던 것이다.

5. 각국의 절대왕정

1) 에스파냐 : 펠리페 2세와 무적 함대

* 유럽 최초의 절대주의 확립

(1) 배경: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금과 은을 바탕으로 왕귄 강화

(2) 전성기: 필리페 2세

(3) 무적함대 건설: 세계의 해상권 장악

* 쇠퇴

(1) 식민지 약탈에만 의존한 경제기반의 취약

(2) 강압적 카톨릭 종교 정책: 네덜란드의 독립

(3) 영국에 의한 무적함대의 패배

에스파냐는 유럽 최초로 절대주의를 확립한 국가이다.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금과 은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한 에스파냐는 펠리페 2세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무적함대로 세계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독일 황제 Karl 5세는 오스트리아를 동생 페르디난드(Ferdinand)에게, 에스파냐·네덜란드·나폴리 및 해외 영토를 펠리페 2세 (1556-1598)에게 주고 퇴위하였다. 펠리페 2세가 즉위할 무렵의 에스파냐는 세계 최대의 부와 함대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펠리페 2세는 이를 배경으로 프랑스와 싸워 이기고 1571년에는 당시 지중해의 여러 섬을 차지하고 기독교도의 지중해 무역을 방해하고있던 오스만 투르크의 해군을 레판토(Lepanto) 해전에서 쳐부수고, 1580년에는 포르투갈의 왕통이 끊어지자 포르투갈 및 그 식민지를 합하여 전 유럽을 호령하였다. 이때 네덜란드는 17주로 나뉘어 있었는데, 네덜란드와 각주에 에스파냐에서 총독이 파견되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벨기에)와 북부(네덜란드)는 종교, 경제, 문화를 달러하여 북부의 네덜란드는 언어적으로 독일에 가깝고 종교적으로 루터파, 칼뱅파의 신교 세력이 강하고 농목업, 어업, 상업, 해운업이 성하였는 데 대하여, 남부의 벨기에는 언어는 프랑스에 가깝고 종교는 구교가 강하며 모직물공업이 발달하였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의 절대제 수립에 착수하여 조세를 인상하고 상업을 제한하며 여러 가지 특권을 무시하고 새로운 교구를 증설하고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였다.

더욱이 1568년 취임한 총독 Alba(1508-1582)는 신교 측의 지도자 Egmont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고 공포정치를 실시하여 네덜란드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한편 홀란드 주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7주는 유트레히트 동맹(Union of Utrecht)을 맺어 더욱 결속하고 항전을 계속하여 해륙에서 에스파니아를 괴롭혔다.

이에 대하여 펠리페 2세는 정치적인 이유와 더욱이 영국, 프랑스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 타격을 주지 못하였다. 더구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시대에 무적함대가 패배하고, 식민지 경제에만 의존한 경제기반의 취약으로 국력이 기울어졌다. 또한 강압적 종교정책으로 반발한 북부 7주는 1581년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세웠다. 이미 국력이 기울어진 에스파냐는 30년 전쟁 후에 맺은 베스트팔렌 18)(Westfalen)조약에서 네덜란드의 독립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2) 영국 :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

① 영국의 절대주의: 엘리자베스 1세 때 전성기

② 영국 국교회의 확립

3. 해상권의 장악: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 격파,

4. 식민지 확대: 북아메리카 식민지 확대, 동인도회사 설립

⑤ 중상주의 정책, 모직물공업 육성, 해외무역 장려

영국은 장미전쟁이 끝난 15세기 말 튜더왕조 때 절대왕정이 시작되었다. 1485년은 장미전쟁이 끝난 해이며 헨리 7세(1485-1509)가 튜더(Tudor)왕조를 연 해로서 영국 근대사의 출발점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장미전쟁에 의해 옛날의 귀족은 대부분 멸망하고, 1485년 헨리 7세가 소집한 제 1의회에는 겨우 29명이 모였다. 헨리 7세의 이러한 중앙집권정책은 해외진출을 노리고 있던 도시 시민과 잔존 봉건세력의 타도를 희망하고 있던 자영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다음의 헨리8세 (Henry VIII, 1509-1547)는 영국 종교개혁의 창시자, 르네상스 문화의 후원자로서 유명하다. 그가 죽은 뒤 각각 어머니를 달리하는 에드워드 6세(Edward Vl), 메리(Mary) 여왕,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에드워드 6세(1547-1553)는 신교주의를 받아들여 영국 국교를 열어 영국은 대표적인 신교국이 되었다. 다음의 메리(1553-1558)는 어릴 때부터 구교도이며 에스파냐 국왕이 된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다. 메리의 친가톨릭 정책에 의해 구교가 부활되고 친에스파냐 정책에 의해 에스파냐 세력이 영국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영국의 독립과 발전에 큰 위협을 주었다.

이 무렵 신교도이며 총명한 엘리자베스(1558-1603)는 메리의 반동정책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국민의 환호 속에 즉위하였다. 그녀는 수장령19)을 부활하고 통일령을 발표하여 영국 국교의 기틀을 확립하고 특설 고등법원을 만들어 국교도 이외에는 신교이거나 가톨릭이거나를 막론하고 억압하였다.

영국은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을 원조하여 에스파냐의 왕실 및 군대의 재정적 기초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에 분격한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영국의 구교도의 음모를 도와 엘리자베스를 폐하고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를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처형하여 화근을 끊었다.(1587).

이를 계기로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1588년 에스파냐의 필리페 2세는 무적함대(Invincible Armada)를 이끌고 단번에 영국의 해군을 격멸하고자 하였으나 영국 해군은 제독 Howard의 지휘아래 잘 싸워 이를 물리쳤다. 에스파냐에 대한 승리는 영국인의 국민적 감정과 해외로의 발전을 부채질하였다.

1600년에는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또 북아프리카 東岸에는 여왕의 특허아래 버지니아 식민지가 열려 대규모의 무역 식민 활동의 실마리를 열었다. 엘리자베스의 치세는 국민 문예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세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 등이 나와 근대 영국문화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3) 프랑스: 짐은 곧 국가다

1. 프랑스의 절대주의: 태양왕 루이 14세때

② 왕귄 신수설의 신봉.

③ 중상주의 정책: 콜베르 등용

④ 강한 군대 양성

⑤ 베르사이유 궁전 건축, 문학과 예술 장려로 궁정문학 발달

6.쇠퇴: 잦은 전쟁, 신교도 박해 등으로 국력 소모, 산업 타격

1589년 앙리(Henry) 4세가 즉위하여 농업을 보호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대귀족을 억압하여 절대제의 확립을 꾀하는 동시에 낭트(Nante)칙령20)(1595)을 발표하여 오랫동안의 종교분쟁을 해결하였다. 그는 다시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을 타파할 필요가 있다하여 독일의 신교파 동맹을 원조하여 황제에 대항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앙리 4세에 의해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기틀이 열렸다. 앙리 4세가 광신적인 가톨릭교도의 손에 죽은 뒤 어린 아들 루이(Louis) 13세(1610-1643)가 즉위하고 모후가 섭정하였다. 1614년의 삼부회 때 승려 신분의 의원이었던 리슐리외(Richelieu)는 섭정모후의 총애를 받아 차차 벼슬이 높아져 추기경이 되어 드디어 그녀 대신에 국정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고등 법원의 권한을 줄이고 낭트칙령 후에도 계속 반항하고 있던 신교도인 위그노21)에 탄압을 가하여 그들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켜 군주 독재 체제를 수립하였다. 독일의 30년전쟁에 간섭하여 독일을 분열시키고 에스파냐와 싸워 이에 큰 타격을 주었다.

루이 13세가 죽은 뒤 5살된 루이 14세(Louis XW, 1643-1715)가 즉위하고 마자랭22)(Mazarin)이 재상이 되어 리슐리외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30년전쟁을 계속하여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독일로부터 라인 좌안의 땅을 얻고 영국의 크롬웰과 연합하여 에스파냐를 쳐부숴 필레네 조약을 맺어 필레니 이동의 땅을 빼앗았다. 내적으로는 절대제의 강화에 불평을 품고 있던 대귀족이 일부의 시민계급과 결합하여 마자랭의 고등법원의 간섭을 반대하여 일으킨 프롱드(Fronde)난23)(1648-1653)을 진압하였다.

1661년 마자랭이 죽자 루이 14세는 친정을 선언하였다. 프랑스의 중앙집권적 정치기구는 루이 14세 때 비로소 완성되었다. 루이 14세는 특히 재정의 강화에 힘을 기울여 콜베르(Colbert)를 재무대신에 등용하여 '콜베르주의'라 불리는 중상주의정책을 실시하였다 외국 공업생산품의 수입을 금지하고 혹은 관세를 인상하고 국내 제품의 수출세를 경감하는 등 수입의 억제와 수출의 증대를 꾀하고 자본가에 보조금을 대여하고 외국의 기사, 노동자를 초치하고 공업제품의 품질, 양, 판매를 통제하는 등 Manufacture를 보호, 육성하였으므로 산업과 무역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루이 14세는 국부를 기울여 파리 교외에 웅장, 화려한 베르사이유(Versailles)궁전을 완성하였다. 문학, 과학, 음악, 회화, 건축 등의 각종 아카데미가 설립되고 국왕의 보호 아래 숱한 예술가들이 쏟아져 나와 프랑스는 유럽 문화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다. 코르네이유(Comeille, 1604-1684), Raclne(1639-1699) 등의 비극작가와 Moliere(16BB-1673) 등의 희극작가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이 나오고 바로크(Baroque)식 미술과 18세기에 일어난 우아한 로코코(Rococo)미술이 전 유럽에 퍼졌다.

그러나 왕은 군주의 권력은 신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절대무한'이며 백성이 이를 제한할 수 없다는 왕권신수설을 이념으로 하여 백성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하고 낭트칙령을 폐하여 신교도를 압박하였다.

4) 프로이센 : 군주는 국가 제일의 심부름꾼이다.

1. 독일의 분열. 300여개의 지역 국가

2. 황제귄의 미약: 오스트리아와 그 주변 통치

3. 프로이센의 흥기: 프리드리히 대왕 때 융성

(1) 산업이 발달한 슐레지엔 지방 차지

(2) 계몽군주24) 자처:제도정비, 산업 장려

프리드리히(Friedrich) 대왕은 어릴 때부터 문인, 철학자, 예술가를 모아 교우하고 영국의 로크, 프랑스의 볼테르 등과도 교우를 맺어 당시의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국정을 독재하는 절대군주였지만 스스로 '국가의 제일의 공복'이라 하여 국가와 국민의 복리 증진을 이념으로 삼아 이른바 계몽 절대 군주의 본보기가 되었다.

국왕의 절대권을 확립하기 위한 중앙기관으로서 내각을 확립하고 문무의 관직에 귀족(Junker)의 우월권을 인정하고, 군비를 확장하여 엄격한 법률과 우수한 무기를 가진 유럽 최강의 육군을 건설하고, 사법제도를 개혁하여 계몽주의에 의해 고문을 폐지하고 법률의 통일을 꾀하여 대왕이 죽은 뒤 발표된 『프로이센 일반국 법전』을 편찬하였으며 절대제의 稅制에 익숙한 프랑스의 세무관리를 대량으로 채용하여 세수입의 증가를 꾀하고, 황무지의 개간, 內地植民의 장려 등 농업을 일으키고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공업을 일으켰다.

종교정책으로는 실제상의 필요와 계몽주의에 의해 실용주의를 취하여 신교국이면서도 가톨릭교도를 국토개발을 위하여 받아들였다. 건전한 농민층의 존재를 위해서 대왕은 명령을 내려 융커의 농민보유지 몰수를 금하고 농민의 부역을 경감하였다.

5) 러시아의 팽창 정책

① 절대주의 확립: 표뜨르 대제

② 서유럽의 문화와 제도 도입

③ 영토 확대: 시베리아 경영, 발트해 진출

④ 18세기말 Ekaterian II : 전성기 (계몽군주)

모스크바공국의 Ivan 3세(146B-1505)는 킵차크 한국이 쇠한 틈을 타서 제공령을 합쳐 독립하였다. 이반 4세(1533-1584)는 대귀족의 세력을 억누르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고 중앙집권하의 무력적 기초로서 상비군을 창설하고 교회의 토지를 빼앗아 황제의 직영지를 늘렸다.

1598년 이반 4세가 죽고 왕통이 끊어지자 국내에 각종 반란이 일어나 소멸하였다. 그러나 신귀족 및 상인의 활약에 의해 질서가 회복되어 1613년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이 컸던 로마노프(Michael Romanov).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로마노프 왕조(1917년 혁명까지 지속)를 세웠다.

로마노프 왕조25)가 성립된 지 약 70년에 표트르 1세(Piotr 1, 1682-1725)가 즉위하였다. 표트르는 서유럽에 비해 수세기나 뒤떨어져 러시아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루 바삐 서유럽의 선진국의 기술 문화를 받아들여야 된다 하여 수배명의 귀족, 관리, 기술자로 조직된 견학단을 서유럽에 보냈다.

표트르의 서구화정책은 각 방면에 걸쳐 행해졌다. 곧 정치 개혁에 착수하여 원로원을 두어 황제가 임명한 의원으로 하여금 국정을 지도, 감독하게 하고 검찰관 제도를 두어 관리의 부정을 단속하며 모스크바 시대의 많은 불규칙한 관청을 정리하여 10개의 성을 두어 국정을 분담하게 하고 만년에는 기밀청을 두어 정보망을 설치하였다.

서유럽풍으로 훈련된 정규군을 창설하고 북방전쟁(1700-l72l)에 의해 발트해를 얻은 뒤에는 후년 북방의 중진이 된 발트 함대를 건설하였다. 새로운 기술을 수입하고 기사, 직공을 초빙하고 유학생을 파견하고 국영 혹은 국가 보호의 공장을 설치하여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장려하여 산업을 일으켰다. 이 결과 광업, 야금공업, 군사 공업이 크게 발달하여 특히 철의 생산은 세계 제일이 되었다.

서유럽의 문인, 미술가를 초빙하고 슬라브 문자를 읽기 쉽도록 고쳤다. Leidnitz는 대제의 조언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끝으로 그리스정교의 교회 개혁에 착수하여 總주교 대신에 聖務會員 (synodos)을 두어 여기에 종교검사총장을 보내어 교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 결과 교회도 짜리즘26)(Tzarism:皇帝權)에 봉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남방의 영토 확장을 꾀하여 터키와 싸웠으나 곧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구하여 스웨덴과 북방 전쟁을 일으켜 스웨덴을 쳐부숴 발트해를 얻고 보수적인 모스크바를 버리고 국부를 기울여 새로운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였다.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죽은 뒤 한동안 궁정의 음모로 37년 동안에 6명의 황제가 바뀌더니 표트르 3세의 황후 예카테리나 II(Ekaterina II, 1762-1796)가 1762년에 즉위하였다. 예카테리나 정치는 계몽 절대 군주제였다. 이 무렵 서유럽 문화, 특히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이 러시아 상층 계급사이에 퍼져 예카테리나 자신도 그 영향을 받아 볼테르와 알게 되었고 디드로(Didrot)를 원조하였다.

예카테리나가 통일적 법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각계 각층에서 소집된 위원회에 준 훈령은 몽테스키외의 영향을 받은 진보적인 것이었으나 위원회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해산하고 말았다.

6. 절대주의의 모순과 붕괴

서유럽 각국의 절대주의 지배세력은 부의 양도를 강요하거나 수탈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봉건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절대주의 시대에 크고 작은 전쟁과 정략결혼과 영토확장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이 점에서 보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관료조직과 상비군을 운영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따른 재정 부담은 특히 경제적 수축기였던 17세기에 이르러 가중되었다. 절대주의 지배세력은 그들에게 필요한 부를 획득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도 다양하였다.

절대군주들은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욕을 감추지 않았는데, 특히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네덜란드 상속전쟁(1667/68), 네덜란드 침입전쟁(1672/78),아우구스부르크 동맹전쟁(1688/97), 에스파냐 계승전쟁(1701/14) 등에서 여러 차례 충돌하여 국력을 소진하였다.

이전에 농민보유권의 안정을 도모했던 절대왕정이 이제는 오히려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강화했기 때문에 17세기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농민경제가 저생산성의 순환이라는 덫에 빠지기도 했고, 잉여분배를 둘러싸고 지배세력간의 갈등 또한 첨예하게 나타났다.

프롱드난이나 1640년 까딸로냐 혁명 등을 비롯한 갖가지 소요와 내란을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결국 절대주의 체제는 농노제 해체나 소상품생산의 발전과 같은 이행기의 경제적 변화에 직면한 봉건지배세력이 일반 민중에 대한 잉여수탈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재편성한 결과를 나타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 고유의 경제적 토대를 갖지 못한 불안정한 지배체제일 뿐이었다.

절대주의 지배세력이 영토확장과 중상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대외전쟁에 전념한 것은 이 체제가 갖는 근본적인 불안정성 때문이었다. 특히 무역차액을 통해 부를 취득하려는 일련의 경제정책은 특권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절대주의 지배세력의 이해관계에 상응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래로부터 분출해 온 상공업자층에게도 성장의 토대를 제공했다.

절대주의 체제는 봉건세력의 특권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으나 그와 동시에 부르주아지 일반-이들은 조만간 봉건지배세력의 대립물로 전화할 수도 있었다-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절대주의 체제가 지속될수록 그것은 오히려 기존 지배구조의 혁명적 변화 가능성을 증폭시킬 것이었다. 절대주의의 내적 모순은 바로 이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원래 절대주의 국가 권력의 증강은 재정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재정력의 증대는 국민경제의 발달과 근대시민의 활동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절대주의의 재정 구조는 마침내 그 실질적 권력기반인 시민계급의 권리의식을 조장시켜 그들이 절대권력에 저항하는 결과를 낳았다.

프로테스탄트 특히 Calvin교도는 유력한 이론과 실천력으로 절대주의에 대항하게 되었다. 또한 절대왕정에 기생하던 시민층 중에서 축적된 자본을 공업에 투자함으로써 점차 산업자본가로 전환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들 산업자본가들은 종교적 자유를 외치는 반면에 절대주의적 산업통제에 반대하고 상공업의 자유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 결과 시민혁명이 발생하여 봉건요소적 잔재가 불식되면서 근대적인 민주· 민족국가가 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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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을, 절대왕정의 빛과 그늘-절대주의의 성립과 발전, 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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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중세 말기에 프랑스의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죽은 후 프랑스의 왕위계승문제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 필립 6세와 영국의 에드워드 3세의 대립이 그 원인이 되었으며, 프랑스를 전장으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계속되었다.

2) House of Tudor. 1485-1603년 5대 118년에 걸친 절대주의 시대의 영국 왕조. 장미전쟁을 수습하고 즉위한 헨리 7세가 시조이다. 그는 장미전쟁에 따른 유력 귀족의 몰락을 이용하여 星室廳재판소 등을 재편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등 절대주의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 기초 위에 그의 아들 헨리 8세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로마 교황청과 절연하고 영국 국교회를 수립하여 절대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3).Marxism. 마르크스가 엥겔스의 협력으로 만들어 낸 사상과 이론의 체계. 레닌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사상과 학설의 체계인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의 3가지 정신적 主潮, 즉 독일의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경제학 및 프랑스의 혁명적 학설과 결합된 프랑스 사회주의를 그 원천 또는 구성부분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체계는 G.W.F.헤겔, L.포이어바흐 등 19세기 독일의 고전철학에서 변증법과 유물론을, 또 영국의 고전경제학 중에서도 특히 D.리카도의 경제학으로부터 노동가치설을,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통일시킴으로써 형성되었다.

4). Tyrannos. 고대 그리스에서 참주가 국가를 지배하던 정치. 고대 그리스의 참주정치는 귀족정치가 쇠퇴하기 시작한 BC 3세기까지 각지에서 출현하였다.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이 사망한 때 (BC 467 또는 BC 466)로부터 디오니시오스 1세가 출현한 때(BC 405)까지의 약 반세기 동안은 참주가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 시기를 경계로 전기 참주정과 후기 참주정으로 구분한다. 전기 참주정 시대는 귀족정치에서 민주정치 시대로 변모하는 과도기로서 많은 폴리스에서 경제적·사회적 변동이 있었다. 그 결과 귀족과 평민 사이의 항쟁이 격심하였다.

5).Guild. 중세 유럽의 동업자 조합. 서유럽의 길드는 일반적으로 중세도시가 성립. 발전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발전을 한 상공업자의 동업자조직이다. 그러나 길드라는 말은 퍽 뜻이 넓어서 그 중에서 公同祭祀 ·公同酒宴· 상호부조에 의해서 맺어지면서 중세 초기에 일어났다가 없어진 古길드나 나중에는 정치길드 둥도 포함되지만, 중세도시경제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뜻을 지니게 된 것은 상인들에 의해서 결성된 상인길드 및 수공업자들의 동직길드(craft guild)이다.

6). House of Stuart. 중세 말기에서 근세에 걸쳐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통치한 왕가, 스튜어트家는 본래 노르만왕조 시대의 프랑스계 귀족의 혈통을 계승한 명문으로 12세기부터 스코틀랜드에 정주하였고 1371년부터 왕가가되었다. 16세기 중반 메리 스튜어트가 여왕이 되었으며, 그녀가 폐위된 뒤에는 외아들 제임스 6세가 뒤를 이었다.

7). James I, (1566-1625). (영국왕 재위기간: 1603-1625), 스코틀랜드 왕으로서는 제임스 6세(재위 1567-1625).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로, 어머니의 퇴위로 인하여 1세 때 스코틀랜드 왕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1603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계자 없이 서거하자,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왕권신수설을 주창하여, '왕은 신 이외 것에는 책임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법이 왕과 의회보다 우선한다는 국민의 주장과 대립하였다. 1624년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한 무리한 제도개혁을 하다 귀족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암살 당하였다.

8). Robert Filmer. 1589-1563. 영국의 정치사상가. 찰스 1세로부터 기사에 서임되고 청교도혁명 초기에는 국왕파로 지목되어 투옥되었다. 영국에서는 왕권신수설의 대표적 논자로서 왕권을 옹호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대표작은 사후인 1680년 간행된 <가부장권론: Patriarchia> 이다.

9). Louis XIV, 1638-1715.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 (재위 1643-1715). '대왕' 또는 '태앙왕' 이라고 불렀으며, 부르봉 절대왕정을 대표한다.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가 결혼한지 23년만에 생제르망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즉위하였으므로,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고, J.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보필을 받았다. 이 때는 30년전쟁과 관련 에스파냐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하여 국민들은 점차 반항의 기미를 보였고, 파리고등법원은 국민의 입장을 대표하여 왕권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일어났다. 여기에 대귀족과 불평분자의 책모가 작용, 프룽드의 난이 일어나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왕은 파리를 떠나 모후와 함께 각지로 유랑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 난은 오랫동안 왕에게 불쾌한 기억으로 남게 되고, 파리가 싫어져 나중에는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겼다.(1682).

10). 키케로가 말 했던 'Bellorum nervi sunt pecuniae: 돈은 전쟁의 힘줄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유럽은 전쟁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재정적 뒷받침이 국가의 생존여부를 결정짓는 주요 용소로 작용하였다.

11). Richelieu. 1585-1642. 프랑스의 정치가, 파리대학에서 신학전공, 1606년 서부 해안의 뤼송 주교로 임명되었다. 1614년 전국 삼부회에서 열변을 토하여 루이 13세의 모후이며 섭정인 마리 드 메디시스를 섬겼다. 2년 후 왕실 고문관으로 있었으나 루이 13세의 친정과 함께 궁정을 쫓겨나(1617) 아비뇽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최초의 저서 <교리문답>을 썼다.

12) 이러한 사항은 프랑스로 하여금 1648년 웨스트팔리아, 1559년 피레네에서의 스페인과의 강화조약에서 프랑스가 자국에 유리하게 전쟁을 마무리짓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13) pest. 페스트균의 감염에 의하여 일어나는 급성 전염병. 14세기 중기 전유럽에 대유행한 이래 흑사병(black Death)이라고도 한다. 사람에 대한 감염원이 되는 것은 보통 밭 다람쥐·스텝마못 등으로부터 벼룩이 감염시킨 시궁쥐 (집쥐)·곰쥐 등이다. 이러한 보균동물이 있는 지방에는 풍토병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중국 동북부·중국 대륙의 오지, 몽골 중앙아시아(주로 러시아) 등은 그 전에 유행하여 보균동물이 잔류되어 있으므로 기근 등이 닥치면 유행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14) Flandre. 벨기에 東플랑드르와 西플랑드르 2州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북해에 임하여 북유럽과 지중해, 영국과 라인 지방을 잇는 교통의 십자로에 위치하기 때문에 평화시에는 브뤼주를 중심으로 하여 통과무역이 번창하였고, 유럽 최대로 알려진 모직공업도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전란으로 자주 지배자가 바뀌고 영역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1482년부터 합스부르크家가 영유하였고, I584-1714년에는 에스파냐가 지배하였으며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일부), 1830년 벨기에 독립전쟁으로 네덜란드에서 분리되어 지금처럼 동·서 플랑드르 2주가 성림되었다.

15). Glorious Revolution. 1688년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 영국의회가 제임스 2세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제임스 2세를 폐위, 메리와 그의 남편 월리엄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유혈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되었다. 월리엄과 메리에게 1689년 2월, 의회에서는 '권리장전' 을 제출하여 숭인을 요구, 월리엄 3세, 메리2세는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16). Bullionism. 16-18세기 서유럽 각국을 지배하였던 중상주의 중에서 특히 초기에 속하는 경제사상 및 정책. 國富는 곧 地金銀 이라는 관점. 부(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무역통제로 개별적 무역차액을 플러스가 되게 하고, 정화(교토)와 귀금속치 수출을 제한 ·금지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절대주의하의 영국에서 중금주의가 전형적으로 등장하였는데, G.말린스가 대표적 인물이다. 또 각국의 군주는 지급은을 획득하려고 금은광을 개발하는 한편, 식민지경영에도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국내 화폐가치의 하락 (물가앙등)을 가져와 오히려 국내산업의 발달이 저해되었는데, 그 대신 수입을 상회하는 수출의 실현으로써 지금은을 획득하려는 무역차액주의의 중상주의가 득세하였다.

17).Colbert, Jean-Baptiste, 1619-1683. 프랑스의 정치가. 루이 13세 때 재상 J.마자랭에게 발탁되어 그 측근이 되었으며, 루이 L4세의 親政 이후 재정총감 N.푸케의 독직사건을 적발하여 그를 징계하고, 1664년 스스로 그 후임에 올라 재정 이외에도 상공업·농업. 토목. 식민문제·해군의 업무를 담당하여 한때는 재상과 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특히 경제개혁에 주력, 중상주의정책을 추진하여 프랑스의 국부를 증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8) Peace of Westfalen. 1648년 10월 24일 독일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조약. 유럽 사상 최초의 구제회의로서, 베스트팔렌 오스나부르크에서 조인되었다.

19). Act of Supreamcy. 영국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국왕을 영국교회의 '유일한 최고의 수장'으로 규정한 법률. 1534년 국왕 헨리 8세가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문제로 인한 분규로 로마교회로부터의 이탈을 결의, 의회를 통과시켜 발포하였다.

20). dit. de Nantes. 1598년 4월 13일 앙리 4세가 낭트에서 공포한 칙령.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약 30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 (일명 위그노전쟁 I562-98)을 종식. 앙리 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구 양파의 종교적 대림으로 국내는 2분되었고, 혼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고자 이 칙령을 공포.

21). Huguenot.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칼뱅파 교도에 대한 호칭.

22). Mazarin 1602-1661.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에 이어 부르봉가의 절대주의를 완성시키는 데 공헌. 처음 군직에 있다가 외교관으로 전직. 1634년 로마교황의 특별사절로 파리체류 중 리슐리외에게 발탁되었고, 1639년 프랑스에 귀화. 먼저 추기경에 임명되었으며, 1642년 리슐리외가 죽은 뒤에는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의 신뢰를 받음. 이듬해 루이 13세의 사망으로 모후가 섭정이 되자 재상으로 임명.

23). La Fronde. 1648-1653년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내란. 섭정 모후 안 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을 중심으로 한 궁정파에 대하여 일어났다. 최후의 귀족의 저항이라고도 하고, 최초의 시민혁명의 시도라고도 한다. 프롱드(Fronde)란 당시 청소년 사이에 유행한 돌팔매 용구인데, 관헌에게 반항하여 돌을 던진다는 뜻으로 빗대어 쓴말이다. 반란의 계기는 파리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한 관직 보유층의 반절대왕정의 시도에서 비롯된다.

24) enlightened despot.유럽 17~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에 스스로 계몽사상의 이념에 의하여 일정한 근대화 개혁을 실현하려고 시도한 전제군주. 개명전제군주라고도 한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그 전형이다.

25). Romanov dynasty. 1613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를 지배한 왕조. 14세기 중엽에 모스크바에 온 프로이센의 귀족 A.L.코빌라가 먼 시조. 16세기에 모스크바대공 바실리 3세를 섬겼던 대귀족 로만 유레프 때 그의 이름을 따서 로마노프家라고 불렀다. 딸 아나스타시아는 이반 4세와 결혼하였으며, 조카인 료트르 니커티치 로마노프(나중의 총주교 필라레트)의 아들 미하일(재위 1613-1645)이 1613년 젬스키 소보르(신분제 전국회의)에서 차르로 선출되어 불과 16세에 즉위함으로써 로마노프왕조가 시작되었다.

26). tsarism. 차르(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정 러시아의 전제적인 정치체제. 16세기 중반 이반 4세


Comment ' 3

  • 작성자
    Lv.10 동넷사람
    작성일
    10.06.23 08:08
    No. 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봉건제에 비해 '덜' 뜯기고자 하는 상공민+농민들의 힘이 있었기에 성립 가능했던 것이 절대주의인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착취가 심해지는데다 절대주의 시스템자체가 반체제 세력인 상공업자들을 더 키워준다는게 아이러니... 글에 표현된 그대로 '모순된 체제' 라는 말이 적절한듯 하군요.

    혹시 직접쓴 글이신가요, 아니면 퍼오신 글인가요? 개념글 본 김에 질문좀 하고 싶은데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redrush
    작성일
    10.06.26 02:00
    No. 2

    동넷사람/ 이런거 쓸 능력이면 여기서 뒹굴거리지 않고
    대학교수나 연구원 하고 있었겠지요. ㅋㅋㅋ
    제가 백과에 올리는 글들은 모두 퍼온겁니다.
    그리고 출처는 몇년전에 블로그에 갖고와서 묵혀둔거라 완전히 잊어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월광접
    작성일
    11.02.20 01:09
    No. 3

    좋은 글이네요.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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